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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역사

고백

격변의 현대사를 살아온 한 역사가의 회상
소장전자책 정가13,000
판매가13,000

고백작품 소개

<고백> 들어가는 말


하루는 길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쇼윈도우 속에서 하얀 머리털 흩날리는 노인을 만났다. 처음엔 누군지를 몰라 유심히 들여다보니, 바로 다름 아닌 나의 얼굴.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입력되어 있는 얼굴은 팔팔한데, 그곳에 보이는 얼굴은 호호백발에 주름살로 쭈그러진 늙은이었다. 해서 <장승>이라는 시 한 편을 써서 읊조려 보았다.

누가 세웠는가.
손끝이 가려워 심심풀이 장난으로 깎아 세운 장승 하나
양미간 찌푸리고 눈알 부라리며
세상을 노려보다 너털웃음에 고개를 숙였다.
눈, 비바람, 서리, 세월은 비껴가고
돌아보는 이 없는 길목에서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살을 에는 삭풍 속
삭을 대로 삭은 삭신에
골은 패이고 옹기만 남은 입가에선
조용한 미소가 흐른다.
무無의 세계로.

어이하여 머릿속의 나와 거울에 비친 내가 이토록 다른가? 마음과 현실의 다름인가? 마음은 세월을 비껴가는데, 육신과 세상은 비껴 갈 수 없음이 현실. 낡은 앨범을 차례대로 열어보니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나의 삶의 모습이 일목요연한데 거기에 붙어 있는 사진 하나하나의 주인공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더라. 그런데도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나는 마냥 어릴 적, 젊었을 적, 과거로 되돌아가려고만 한다.
이제 내가 40여 년 해묵은 교단을 떠난 지 6년. 고희를 넘기고 희수를 바라보는 세월에, 마음 속 나만을 기억하고 있으니, 망령이 아니면 치매가 분명할 터. 세월에 따라 바뀌고 바뀌어야 하는데, 몸이 바뀌는 것처럼 마음도 정신도 생각도 바뀌어야 하는데, 몸은 바뀌었는데 마음과 생각은 안 바뀌었단 말인가?
아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처음부터 되돌아보니, 바뀌어도 너무나 바뀌었더라. 가난한 이발쟁이 셋째아들로 태어났음을 탄하며 애통하던 일이 어제 같고, 동족상잔의 피비린내에 몸서리치던 후진저개발국가에 태어난 민족적 콤플렉스가 그제 같은데, 지금은 아니더라.
그래, 교수라는 직업에 충실하려면, 가난을 천직으로 삼아야 된다 하여 각오를 단단히 하라 했으나, 이제 보니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은 내 모습이 세상이 변하고 내가 변했음을 보여 준다. 일제강압 36년, 콩깻묵을 입에 털어놓고 냉수를 마셔서 배를 채우던 흐릿한 기억 속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좌우명을 마음에 품고, 6·25 전쟁의 피 흘리며 쓰러져 썩어가던 시신들 앞에서 ‘피보다 진한 것이 사상이요, 이념.’이라는 생각을 뼛속 깊이 새겼으나, 지금 나의 눈길은 세계인을 향해 미소를 던지고, 나의 입은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깨자고 외치고 있으니, 내 마음과 내 정신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었나?
민족주의자의 세계주의자로의 전환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아니, 타인들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에게 묻는다.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세상에서 구분하고 있는 대로 진보주의자인가? 보수주의자인가?”
나의 삶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나의 초기 작품은 철저한 민족주의자라 하고, 후기 작품은 세계주의자라 한다.
그러나 확실한 답은 있다. 나는 단지 배움의 길을 가는 학도일 뿐이다. 진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갈 것이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일체의 종교·정치·사회·경제적인 관념을 떠난 자유주의자다. 이데올로기로부터도 해방을 해야 하는 자유주의자다.
세계주의를 앞세워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외치며 혁명을 했다는 소련이 또 하나의 제국주의, 나치스와 다름없는 전체주의라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현대 한국이 걸어 온 고난의 길은 조선의 폐쇄적 봉건사회를 떨쳐버리고 세계사의 물결 속으로 뛰어드는 과정에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구나! 하는 이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군자는 초지를 굽히지 않아야 된다는 말로 반박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그것을 고집이라 생각한다. 신의 세계가 아닌 인간세계에는 절대적 진리란 없다. 비코의 말대로, 인간세계의 진리란 영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발견된 진리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겸허해야 한다.
컴퓨터를 앞에 놓고, 옛날 등사판으로 유인물을 만들겠다고 고집을 한다면, 그는 정신병자에 속한다.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지 못하는 것을 자랑 삼는 학자나 교수가 있다면, 스스로는 보수주의자라 자부할지 모르나, 시대에 뒤떨어진 뒷방 늙은이일 뿐이다.
나는 마르크스가 다시 태어나면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다. 그 정도의 탐구력을 지닌, 그 정도의 쟁론가라면, 그가 죽은 뒤 펼쳐진 그의 사상이 얼마나 왜곡되어 왔으며, 또 그의 사상자체가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를 깨달았을 터이니 말이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한 현실을 비탄하여 그의 사상과 이론을 펼친 학자였지, 그것을 선전구호로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를 족쇄에 채워, 죽음의 전장, 고난의 공장과 탄광으로 끌고 다니는 권력자가 되려 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도 진리를 찾아내어 그것으로 인간적 욕망을 채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진리는 진리이고 허위는 허위일 뿐이다. 진리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취해야 하고, 허위는 그것이 무엇이든 타기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가 문제시 되지 않는다. 무엇이 인민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완전한 것은 없다. 도적이 활용하면 도적의 무기일 뿐이고, 의인이 활용하면 의인의 도구일 뿐이다. 민주를 부르짖으면서도 독재를 하는 자는 독재자요. 인민이라는 말을 앞세우고도 인민의 삶을 인질 삼아 정권 유지만을 위해 몸부림치는 자는 인민의 적이다.
미국을 체험하고 세계주의자가 되지 않으려 하는 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사용을 외면하려는 자와 같다. 미국에는 미국인은 있어도 미국민족은 없다. 어떠한 민족도 미국에 살면 미국인이다. 이젠 한국도 단일민족국가인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는다. 세계는 국경을 초월해서 하나의 촌으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세계의 시민이 되어야 하고 지구촌의 식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니까. 나를 억죄는 일체의 것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이니까. 심지어 나의 자유를 막아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육신이라 할지라도 벗어버리고자 단전에 기를 모으고 있는 자이니까.
나는 이러한 세상의 변화와 나의 마음, 나의 정신의 변화를 되짚어보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그래서 책 제목을 《고백》이라 했다. 70여 년에 걸친 내 삶의 고백이란 뜻이다. 좋은 점 나쁜 점, 즐거웠던 이야기 슬펐던 이야기, 진지했던 이야기 실없고 무의미한 넋두리가 다 들어 있는 솔직한 고백이다. 다만 지면이 모자라 보다 구체적이고 깊은 비밀이 담긴 이야기들 중 못다 한 이야기들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닌 한, 또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 한, 거짓은 없다. 숨기는 일도 없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작가자신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돌아보면, 이 시대를 살아 온 모든 이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개인의 역사일 수도 있고, 민족의 역사일수도 있다. 해서 개인의 사진은 싣지 않기로 했다. 독자들이 각자의 빛바랜 사진을 시기시기에 맞추어가며 회상하면 좋을 것 같아서다.
끝으로 나의 세종대학교 마지막 강의의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이 글을 써보라 권유하여 출판까지 맡아 준 중앙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권중달 학형의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책을 만든 여러분의 노고에 치하를 드린다.


2011년 12월
북한산 밑
현곡재玄谷齋에서


저자 프로필

이상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40년
  • 학력 경희대학교 역사학 박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역사철학 석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학사
  • 경력 미국 버클리대학 객원교수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숭의여자전문대학 교수

2015.12.03.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이상현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문학박사
한국사학사학회 명예회장
이상현(아호_玄谷)은 1940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태어나, 서울중·고등학교 재학 당시, 학교 담을 넘어 YMCA에서 만나던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의 영향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에 진학하였다. 4·19 때 교수단 데모를 실제로 이끈 우관 이정규 성균관대학교 총장의 조언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역사철학을 연구, 1966년에 <베네데토 크로체의 역사사상>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역사학을 강의하다가 1973년 공군대위로 전역한 후, 2년간 시간강사로 떠돌다 1975년 9월에 숭의여자전문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때에 R.G 콜링우드의 《역사학의 이상》을 번역했고, 《자유·투쟁의 역사》를 발표했다.
1980년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학보사주간, 2부교학처장, 학생처장 등을 역임하면서 《역사철학과 그 역사》를 출간하였고, 김성식 교수의 권유와 지도로 경희대학교에서 <신이상주의 역사사상>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86년 보직을 사퇴하고 1년간 미국 버클리대학 객원교수로 갔다 온 뒤, 15년간 강의와 논문 저술 활동에 열중하여 《지성으로 본 세계사》, 《역사적 상대주의》, 《다시 쓰는 역사, 그 지식의 즐거움》, 《세계적 한국사 38강》, 《종교, 그 벽을 넘어 진리의 세계로》 등을 펴냈으며, 1997년부터는 문필계에 뛰어들어 수필가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역사 에세이집 《역사 속 사랑이야기》, 수필집 《아버진 홍은동 이발쟁이었다》, 회고록 《고백》을 발표하였다.

목차

들어가는 말

1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해방의 시대
유소년 시절
전쟁
피난
38선을 넘는 미군 탱크
1·4 후퇴
빙판으로 이어진 피난 길
다시 만난 아버지
소년시절

2부 경희궁 옛 터에서
중학생이 되다
중학교 시절의 친구들
교회와 연애당
입신방언
홍제동 화장장
함석헌 선생
불교와의 인연

3부 고뇌와 갈등의 와중에서
방황하는 대학 생활
실존주의와 나
자살의 문 앞에서
농민혁명의 예감
4·19 그날의 나
사회활동
학문방향의 결정

4부 데모의 현장에 서서
공군사관학교
이 시기의 친구들
학원강사가 되다
숭의여자전문대학 생활
세종대학교 생활
한국 정치사의 전환점
교환교수로 떠나다

나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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