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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Shine) 상세페이지

BL 소설 e북 현대물

샤인(Shine)

소장단권판매가2,800 ~ 4,000
전권정가37,600
판매가37,600
샤인(Shine) 표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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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인(Shine) (외전 2) (완결)
    샤인(Shine) (외전 2) (완결)
    • 등록일 2017.04.14.
    • 글자수 약 11.1만 자
    • 2,800

  • 샤인(Shine) (외전 1)
    샤인(Shine) (외전 1)
    • 등록일 2017.04.14.
    • 글자수 약 11.1만 자
    • 2,800

  • 샤인(Shine) 8권 (완결)
    샤인(Shine) 8권 (완결)
    • 등록일 2017.04.14.
    • 글자수 약 14.5만 자
    • 4,000

  • 샤인(Shine) 7권
    샤인(Shine) 7권
    • 등록일 2017.04.14.
    • 글자수 약 16.7만 자
    • 4,000

  • 샤인(Shine) 6권
    샤인(Shine) 6권
    • 등록일 2017.04.14.
    • 글자수 약 16.9만 자
    • 4,000

  • 샤인(Shine) 5권
    샤인(Shine) 5권
    • 등록일 2017.04.14.
    • 글자수 약 13.9만 자
    • 4,000

  • 샤인(Shine) 4권
    샤인(Shine) 4권
    • 등록일 2017.04.14.
    • 글자수 약 16.7만 자
    • 4,000

  • 샤인(Shine) 3권
    샤인(Shine) 3권
    • 등록일 2017.04.14.
    • 글자수 약 14.8만 자
    • 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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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Shine)작품 소개

<샤인(Shine)> 현대물, 복수, 사내연애, 정치/사회/재벌, 키잡물, 나이차이, 첫사랑, 배틀호모, 이공일수, 미인공, 다정공, 순진공, 재벌공, 사랑꾼공, 재벌수, 계략수, 절륜수, 능력수, 사건물, 성장물, 시리어스물, 3인칭시점, 기업사냥, 악덕사장‧만렙비서, 양다리없음

※글이 최대한 긴장감 넘치게 독자들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에서 키워드를 최소로 작성하였으니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윤연희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들이
왜 모두 나를 떠나는지, 혹시 아니?”

위압감 있고 저돌적인 자수성가 사업가, 연희.
대한민국 유통업계 제패를 꿈꾸는 그의 앞에
당신의 꿈에 동참하겠다 약속하는 한 사내가 나타난다.

“당신께 올인하겠습니다. 지분을 주십시오.”


이호진
“내가 선택한 간결하고 합리적인 삶의 방식
아플 것 같으면 도려내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쳐 낸다.”

케임브리지 저지 출신의 비서실장이자 유능한 사업 파트너, 호진.
그의 앞에 나타난 두 갈래 길.

“……나는 어째서 당신을 도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선기형
“아저씨는 왜 이 실장 아저씨밖에 안 봐요?
왜 옆에 있는 저는 못 보냐고요!”

어릴 때부터 키운 아들 같은 소년, 기형.
얼른 어른이 되어 연희의 기사가 되기를 꿈꾸다.

“영혼의 동반자라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네가 아닐까.”


국내 유통업계의 격동기였던 1994년 그리고 현재.
약육강식만 존재하는 정글 속에서 벌어졌던 치열하고 살벌한 기업 전쟁,
그리고 그보다 더 뜨겁고 냉혹했던 연인들.

〈천년의 제국〉 테암컵 작가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편집자 추천사 : 〈천년의 제국〉에서 보여 주었던 거대 서사의 한국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업 전쟁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90년대에 국내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유통업체들 간의 주도권 다툼을 연상시키는, 긴박감 넘치는 전개가 훌륭합니다. 유려한 문장에 이끌려 그들의 행보에 발맞추다 보면 어느새 그 거대한 발걸음을 함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인물들, 그리고 아슬아슬하고 치명적이며 애달픈 사랑까지도 놓치지 않은 수작입니다.


출판사 서평

〈 본문 발췌 〉
호진을 처음 보았을 때, 연희는 대나무 숲에서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청죽을 떠올렸다. 이호진은 키가 큰 편이었으며 꽤 마르기도 했다.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간 가는 눈꼬리에는 총기가 들었고 물기를 머금은 눈자위는 맑고 정갈했다. 팔다리와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고, 군살이나 옹이가 없었다. 희고 깨끗하며 담백하고 서늘했다.
호진은 이력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공사 중인 사무실을 찾아 들어왔다. 희타운을 막 매각하고 철거 직전의 신촌 그랜디스 유통 건물을 어렵게 사들인 연희는 영어회화 능통한 비서를 구하고 있었다. 연희의 영어 실력은 더듬거리며 날씨 이야기나 간신히 할 정도였지만 외국 바이어들을 만날 일은 점점 늘고 있었고, 주거래은행 역시 미국계였다. 그러잖아도 연희는 자신의 배움이 짧은 것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 사람은 뭔가 잘못 알고 찾아왔나 보다. 연희는 호진을 보고 고개를 기우뚱했다. 세련된 입성과 귀태가 흐르는 분위기도 그랬지만 이력서에 기재된 내용도 어마어마했다.
“케임브리지에서 경영학 전공, 동 대학 MBA 과정인 저지 비즈니스 스쿨(Cambridge Judge Business School)에서 수석, 박사 과정 수료……. 맞습니까?”
“예. 논문 심사를 남겨 놓고 잠시 귀국한 상태입니다.”
연희는 얼떨떨했다. 얼마나 공부를 지독하게 했기에 세계 MBA 랭킹 10위권에 속한다는 저지 비즈니스 스쿨에서 수석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 들어올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겠다. 교수 자리로 스카우트되거나 대기업에서 헤드헌팅 될 만한 사람이 왜 이렇게 초라한 곳에 이력서를 내밀었을까?
“가능성 있는 곳에서 처음부터 함께 크고 싶습니다.”
피부가 깨끗한 사내는 이를 보일락 말락 드러내며 모양 좋게 웃었다.
연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입 발린 소리도 유분수다. 가능성이고 나발이고, 아무 볼 것 없는 신촌의 낡은 유통센터에서 비서직을 구하고 있을 뿐인데. 급여도 대기업 신입 사원 수준에 훨씬 못 미치고 근무 조건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저지 스쿨 수석 졸업생이라는 사람이, 게다가 제냐 같은 명품 슈트로 몸을 휘감고 와서 이런 곳에서 막일이나 잡무를 하겠다고 지원을 해?
호진은 그의 의심을 짐작한 듯 웃음을 거둬들이고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희타운을 키우신 윤연희 사장님 아니십니까?”
연희의 손에서 흔들리던 만년필이 딱 멈췄다.
어떻게 알았을까? 희타운의 성장 스토리가 가끔 기사화되면서 개인적인 인터뷰 요청이 몇 번 들어오긴 했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는데. 하다못해 사진 촬영조차 허락한 적이 없었다.
연희는 회사 자체에 대한 취재라면 적극 협조했고, 언론의 관심을 PR의 기회로 활용해 매출 신장의 호기로 삼았지만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가 노출되는 것만큼은 극도로 피해 왔다. 학력에 대한 열등감과 자랑할 것 없는 개인사가 그를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사진을 보고 아는 사람이 뒤에서 이러니저러니 떠드는 것도 싫었다. 입지전적 자수성가? 연희는 기자들의 입발림을 믿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쓴다고 해 봐야, 잘해야 중학교밖에 못 나온 사장의 성공 스토리 따위,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줄 나부랭이로 마무리할 것이 뻔했으니까.
연희가 자리에 앉은 채 눈을 치뜨자 서 있던 사내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웃음은 보기 좋았으나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고 입가에 머무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희타운 신촌 본점에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매장 내셔서 직접 판매도 하고 물건 해 오고 그러실 때요. 단골은 아니었지만 몇 번 옷을 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성장세가 대단해서 그동안 가끔 스토킹 좀 했습니다. 귀국하고 알아보니 상장까지 하셨고, 좋은 가격에 매각하셨다고 하더군요.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신지 궁금해서 수소문해 봤습니다.”
아아. 연희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 눈을 껌벅였다. 그런 거였나. 호진이라는 사내가 싱긋 웃었다.
“현장에서 뛰고 싶어 배웠던 겁니다. 윤연희 사장님처럼 배울 게 많은 분 밑에서 일할 기회를 꼭 잡고 싶었습니다. 유통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시는 일에 저도 동참하고 싶습니다.”

***

윤연희, 그를 대범하고 거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지금 세대에는 쉽지 않은, 밑바닥부터 치고 오른 자수성가형 경영주였다. 전란이 끝난 직후의 도덕 부재의 시기, 혹은 모든 것이 엉성한 6, 70년대에 회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반짝하고 특수를 누렸던 스포츠 사업체도, 눈먼 돈이 덩치 크게 오가는 건설업계도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유통업이다. 쫀쫀하고 물 더러운 바닥에서 성공하려면 대범하고 끈덕지고 무자비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호진이 처음 만난 젊은 사장에게선 옅은 향수 냄새와 더불어 땀 냄새, 희미한 파스 냄새가 났다. 몹시 더운 날이었고, 사무실에선 에어컨 대신 선풍기만 몇 대가 덜덜대며 돌아가고 있었다.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넥타이는 아래로 헐겁게 풀렸고 단추를 하나 풀어 둔 와이셔츠도 땀에 젖어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제가 신촌 그랜디스, 아니 연희유통 대푭니다. 면접 보러 오신 이호진 씨 맞습니까?”
호진이 사무실에 들어가 사장을 찾았을 때, 사무실에서 짐을 나르고 있던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너무 거대한 사람이라 호진은 얼빠진 얼굴로 한참 올려다보았다. 자신도 작은 키가 아닌데 시선을 올려야 했다. 선이 굵은 얼굴에서 속이 보이지 않는 눈이 호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새까만 눈은 우물처럼 짙게 깊었다.
덩치 큰 사장은 호진의 이력서를 보고 눈썹을 꿈틀, 찡그렸다.
“저희는 영어 회화 능통한 사람을 구하는 거지, 교수님을 초빙하는 게 아닙니다만.”
사실 영어 회화 능통한 비서를 구한다고 했지만 비서라기에도 애매한 자리였다. 첫눈에 보아도 업무 시간의 절반은 몸으로 뛰어야 할 분위기였다.
인사 담당자들은 필요 이상의 고학력자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학력이 지나치게 높은 구직자들은 레벨이 낮은 직장을 쉽게 그만두기 때문에. 저 사내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다. 의심을 풀고 이곳에 발을 붙이려면 말 한 마디도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이다. 호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신촌 그랜디스 유통을 어느 그룹에서 낚아채려고 하는지부터 알아봐라……. 소문만 무성하지 확실한 건 하나도 없어.’
큰형의 말이 귓바퀴에 남아 붕붕 떠돌았다.
‘형님, 검증 테스트가 필요합니까?’
건방진 놈, 하던 큰형의 얼굴엔 노여움이 없었다.
‘기회를 잡고 싶으면 능력을 보여. 이호진.’
형과의 계약에 걸린 것은 거대했다. 집안의 미운 오리 새끼에게 간신히 돌아온 실낱의 기회. 호진은 그것을 잡기로 결정했고, 그러자면 이곳에 반드시 취직해야 했다.
잡지 못할 목표는 깨끗하게 도려내 흔적마저 지우고, 달성 가능한 목표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손에 넣는다. 선택과 집중. 군더더기 없는 효율성. 호진이 만들어 낸 삶의 방식은 매끄럽고 간결한 것이었다.
예상했던 질문에 안도했다. 호진은 그 대답을 준비하기 위해 며칠 동안 품을 들여 조사도 했다. 면접에서의 질문이란 모범답안이 정해져 있는 시험과도 같았다. 희타운이란 매장에 가 본 적도 없고, 윤연희란 사내를 난생처음 보는 것임에도 예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노라, 하는 대답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유통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시는 일에 저도 동참하고 싶습니다.”
면접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연희는 애초에 바랐던 ‘영어 실력’이라는 필터를 굳이 검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했다. 외려 호진 개인 상황에 대한 질문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진 것이 예상 밖이었다. 형제가 몇인가, 아버지는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 따위의 이야기를 왜 묻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도 한국 취업 문화의 일부려니 여겼다.
“아버님은 개인 사업을 하셨습니다. 형제는 저를 합쳐 여섯입니다. 형이 셋이고 누나가 둘이 있습니다.”
호진의 대답에 덩치 큰 사장은 성글게 웃었다.
“난 외동이라 형제가 많은 친구들이 부러웠는데 말입니다.”
사장의 대거리가 친밀하게 들렸다. 호진은 그 형제들이 배다른 형제이며, 생판 모르는 남보다도 못한 관계라는 것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영국에 오래 계셨습니까?”
“태어나서 그곳에서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한국말을 잘하시는군요.”
“중, 고등학교는 이곳에서 다녔고 대학 진학을 다시 영국으로 가서 했습니다.”
업무와 관련된 것을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준비했던 호진은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연해 묻는 사장이 마땅찮았다. 하지만 호진은 차분한 미소를 끝까지 유지했다. 감정을 드러내면 이익보다 손해가 훨씬 많다는 것 정도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면, 호진이 간혹 입술이나 눈썹을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실룩거리는 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균형이 잘 잡힌 이목에 깨끗하고 습한 피부, 유리로 만든 마스크처럼 맑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표정은 그 속에 든 어떤 감정도 흘리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그곳에 터를 잡으셨나 보군요.”
“어머님이 독일로 취업이민을 가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런던으로 직장을 옮겨 정착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아, 독일로 취업이민이면……. 어머님께서 간호사 일을 하셨습니까?”
“예. 정확히는 간호조무사셨습니다.”
6, 70년대 독일로 팔려 가듯 떠났던 광부와 간호사들의 2세였던 건가. 보기와 달리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연희는 시답잖은 질문을 하면서도 호진의 반응을 깊은 눈으로 분해하듯 살폈다.
“훌륭하신 어머님을 두셨습니다. 일전에 영국에서 들어오신 걸 보니, 어머님께선 아직 영국에 계시나 봅니다.”
연희는 서류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잇느라 호진의 얼굴에 스치듯 나타난, 실낱같은 비웃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가족이 영국에 있으면 한국에 오래 체류할 가능성에 대해 확인을 해야 했기에 그렇게 먼저 둘러 물어본 것뿐이었다. 하지만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호진은 적당한 선에서 무난히 대답할 참이었다. 하지만 훌륭한 어머니라는 말에 선뜻 맞장구치기는 쉽지 않았다. 하나뿐인 아들의 인생을 가지가지로 말아먹은 여자. 잠시 말을 고르는 동안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호진의 반응이 없자 연희가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호진은 훌륭한 어머니라는 말에 긍정도 부정도 없이 다른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어머니께선 한국에 잠깐 오셨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앉은 사내의 눈이 당황한 듯 빠르게 껌벅였다. 아, 저런. 어쩌다가. 호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될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침묵이 꽤 거북해서 결국 입을 뗐다.
“……영국식 좌측주행에 익숙하셔서, 반대 방향으로 커브를 틀다가 10톤 트럭과 충돌했습니다.”
침묵이 길게 더 이어졌다. 연희는 한참 만에야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괜한 걸 물었군요.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호진은 덩치 큰 사장의 눈에 담긴 감정이 가식이 아니란 것을 알고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거짓말같이, 자신은 어미의 죽음에 아무 감정이 일지 않았다. 어미가 저지르고 간 짓에 대한 짜증과 분노가 유일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저 사장에게 할 수는 없다.
어머니 제니 리. 한국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나뿐인 아들의 인생을 알뜰하게도 망쳐 놓았다. 그의 자동차 조수석 위에는 며칠 전 장례를 마친 어미의 뼛가루가 든 나무 상자가 있었다. 어머니는 영국에 있는 애인에게, 나 죽거들랑 예쁜 공원묘지나 산에 곱게 묻은 담에 봉분을 잔디와 꽃으로 화사하게 장식해 줘, 따위의 헛소리를 하곤 했다.
호진은 어머니의 뼛가루를 아무 강가나 개천에 뿌려 버릴 생각이었다. 흔적도 남지 않게. 한강에 뿌려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개천이면 더 어울리겠지만 남의 눈에 띄기도 싫었고, 그런 장소를 찾기도 귀찮았다. 어미를 위해 한 낱의 에너지도 낭비하기 싫었다. 다만, 어미의 소원대로 땅에 묻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호진은 대답하지 않았고, 연희는 미안한 낯으로 가족에 대한 질문을 접었다.
업무에 관련된 몇 가지 질문과 연봉, 근무 조건과 인센티브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호진은 열악한 근무 조건과 박한 연봉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다. 다만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가 있다는 말에 ‘직원에게도 스톡옵션이 나가게 됩니까?’ 하고 질문했다. 연희는 껄껄 웃었다.
“이런, 이런! 대기업 CEO 뽑는 게 아니라서요. 그냥 연말 보너스 말입니다. 목표 매출액을 넘기면 본봉의 500% 안쪽에서 상여금이 지급될 겁니다. 그 말입니다.”
연희의 웃음에 호진의 미간이 잠깐 꿈틀하다 스러졌다.
‘아하. 저 사람은 무안하거나 당황할 때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연희는 흥미 있는 얼굴로 호진이라는 사내를 관찰했다. 호진의 얼굴은 이내 담백하고 서늘한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왔으나 연희는 그 짧은 순간에 보여 준 호진의 표정이 훨씬 인간적이라 느꼈고, 그래서 조금 안심했다. 지나친 학력 인플레이션 때문에 들었던 의심도 점차 사그라드는 중이었다.
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같이 일하게 되면 호진 씨가 도와주셔야 할 게 많을 겁니다.”
바로 결정된 건가? 크고 두툼한 손을 맞잡으며 호진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만 사장이 손에 힘을 너무 주어서 손이 아팠다.
“언제부터 출근하실 수 있으십니까? 내일부터 가능합니까?”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알 수 없는지라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그나저나 내일이라. 급하기도 하다. 원래 이렇게 급하게 휘몰아치는 성격인가? 아니면 기업이라기보다 그냥 작은 사무실에서 사람 하나 쓰는 거라 그런 건가? 아무래도 좋았다. 호진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겠습니다.”
연희는 호진의 빠른 결정이 마음에 든 듯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다. 시장통 장사꾼 출신이라 하여 억센 사람일 거라 속단했는데 웃을 때는 꽤 물러 보이기도 했다.
호진은 덩치 큰 사장을 말갛게 바라보았다. 커다란 그림자가 호진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 직원 하나가 내일부터 바로 출근하겠다는 말이 그렇게 기꺼워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웃는 모습은 생각보다 보기 좋았고, 그가 만들어 낸 그늘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리고 그와의 만남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

호진은 동호대교 남단에 자리한 백화점에 주차를 하고 어머니의 유골 가루가 담긴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묵직했다. 귀찮고 번잡한데 무겁기까지.
호진은 보자기에 싸인 함을 손에 들고 현대 아파트 단지 사이를 가로질러 터덜터덜 걸었다. 퇴근 시간의 압구정역 주변은 교통이 혼잡했고, 동호대교는 양방향 차량들이 점점 느리게 움직였다. 가까울 거라 생각했는데 인도로 올라가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하류로 향하는 강바람은 시원했다. 호진은 다리 중간쯤 서서 상자를 거꾸로 들었다. 얼굴과 몸태가 곱고 피부가 습하여 사내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여자는 물기가 사라지자 부피가 아주 작아져 있었다.
허연 가루는 풀썩, 아래로 덩어리져 떨어졌으나 일부는 부옇게 날아올라 바람을 탔다. 가루는 먼지처럼 호진의 머리카락과 어깨를 덮었다. 빵빵, 어떤 차량인지 지나가며 요란하게 클랙슨을 울렸다.
어미와 이별이 섭섭했던 적은 없었다. 아비에게 불려 왔던 열네 살의 이별도, 어미와 절연하고 케임브리지로 들어갔던 스무 살의 이별도, 생사로 갈리게 된 스물아홉 살의 이별도 한결같이 버석버석 건조했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죽음을 슬퍼할 당위도 찾지 못했다. 하나뿐인 아들마저 눈물 흘려 주지 않는 장례식은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유일한 조문객이었던 큰형이 한밤중에 들렀다 간 후 인적이 끊어진 빈소를 지키며, 화장터에서 그녀가 허여스름한 가루 한 상자로 변할 때까지 기다리며, 그는 다른 생각에 골몰했다.
형과의 비밀 계약. 얻을 수 있는 것과 포기해야 할 것.
천칭 양쪽 팔에 걸린 것들은 거대했다. 하지만 모두를 가질 순 없다. 호진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원하던 대로 신촌 그랜디스 유통, 아니 이젠 연희유통이랬던가? 그곳에 발붙이는 데 성공했으니 다음 스텝을 밟을 차례다. 내 손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거대한 덩어리가 어른거렸다. 그것을 움켜잡을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기회가 닿았다. 그것에 집중하려면, 미리 정리할 것들이 있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쌓아 올린 성취는 포기하기 아깝긴 했다. 하지만 목표를 위해 잘라 내야 할 것이 있으면 흔적도 남지 않게 도려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그는 상자를 거꾸로 들고 털털 털었다. 가루들이 얼추 떨어진 것을 확인한 그는 상자까지 강으로 던져 버렸다. 나무 상자는 제법 큰 물보라를 일으켰으나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 떠서 하류로 흘러 내려갔다. 그는 어깨에 얹힌 하얀 가루를 털 생각도 않고 난간에 기대 바람을 맞았다.
턱턱턱턱, 누군가 지나가려는지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호진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바람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류로 향하는 강바람이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왔다. 약간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위로 흩날렸다.
“호진 씨, 이호진 씨, 맞습니까?”
낮고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호진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 면접을 보았던 연희유통의 덩치 큰 사장이 놀란 눈으로 뛰다시피 걸어오고 있었다.

날이 좋지 않으려나. 예전에 다쳤던 왼쪽 무릎이 지근지근 쑤시고 있었다. 연희의 굵은 눈썹이 천천히 우그러들었다. 집에 바로 가서 핫팩을 해야 할까? 늦었지만 병원에 잠깐 들러서 진통제를 맞고 갈까? 그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닌데.
장애가 될 뻔한 다리의 후유증이란 애매해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 회복한 것도 다행이고, 시간이 갈수록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쿡쿡 쑤시거나 징징 저릴 적마다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희는 주먹을 들어 왼쪽 허벅지를 콱콱 내리쳤다. 순간 오른쪽으로 익숙한 인영이 스쳤다.
“음?”
순간 잘못 보았는가 했다. 깜짝 놀라 하마터면 운전 중에 뒤를 돌아볼 뻔했다. 다행히 차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연희는 백미러로 조금 전에 인도에서 스쳐 지나간 인영을 확인했다.
틀림없다. 아까 면접을 보았던 호리호리하고 귀태 흐르던 사내가 난간에 기대 강물을 보고 서 있었다. 강을 보고 혼자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저렇게 위태로워 보이는 줄은 처음 알았다. 빵빵! 크게 클랙슨을 울렸으나, 호진은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몸도 좋지 않고 집으로 가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갈 수 없었다. 난간에 기대 있는 뒷모습이 질기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난간에 기대서 있던 사내가 연희를 발견하고 난간에서 몸을 뗐다.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여기……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퇴근하는 길입니다. 집이 선릉 쪽이라 매일 이곳으로 지나가는데 눈에 확 띄어서요. 아까 클랙슨을 울려도 듣지 못하시기에 무슨 일인가 해서 말입니다. 어, 물론 뛰어내리실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연희는 강물 위로 느리게 흘러가는 나무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호진의 어깨에 얹힌 허연 가루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혹시…….”
연희는 호진의 미간이 아까처럼 꿈틀,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사람은 여기서 나를 만나 당황한 것일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화장을 했던 연희는 저 상자와 허연 가루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맙소사.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더니, 설마 엊그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왔다는 말인가? 그걸 지금 여기에서 뿌리고 있었다는 건가? 혼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저 사내의 물과 같은 담담함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기이했다.
호진은 말없이 어깨와 머리카락에 얹힌 허연 가루를 털었다. 길고 미끈한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조심스럽고 가지런했다. 호진은 한참 만에야 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희가 차마 묻지 못하는 것을 호진은 차분하게 답했다.
“어머님 맞습니다. 발인은 며칠 전이었지만 자식이라곤 저 혼자라……. 혼자 장례를 치르자니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보내 드리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형제가 다섯이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연희는 눈썹을 찌푸렸다. 내용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첫 면접부터 거짓을 말한 사람이 좋아 보일 턱이 없었다. 의심스러운 기색이 안타까움을 눌렀다.
이런, 하필 이런 실수를. 호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쓸데없이 사족을 달면 이렇게 꼬투리 잡힐 일이 생긴다. 지금 저 사람 곁에 붙박여 신뢰를 쌓아도 모자랄 판에 불신부터 사게 생겼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처음부터 의심을 사는 것이야말로 현재 가장 피해야 할 일이었다.
연희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린 것이 보인다. 일말의 진실로 의심을 덮어야 할 때였다. 말하기 싫은 내용이라 해도.
“배다른 형제들입니다. 제가 혼외 자녀라 제 어머니 장례식에 형, 누나들이 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대답은 차분했다. 이 정도면 납득이 될 듯했지만, 호진은 호리의 의심도 남기지 않기 위해 몇 마디 덧붙였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말하게 했다는 미안함까지 조금쯤 넘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 쪽 친척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연락을 못 했습니다.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해서 아까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아. 미안합니다. 괜한 걸 물었습니다.”
연희는 한 걸음 물러서서 자세를 다듬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스며든 의심의 기색이 스러지자 밑에 깔려 있던 안타까움과 미안해하는 감정이 드러났다. 하지만 값싸게 동정하는 말을 주절대는 대신 그는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나무 상자는 꿈틀꿈틀 허덕이며 하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말없이 위로라도 해 주고 싶은지, 연희는 한참 동안 그렇게 옆에 서 있었다.
“많이 힘드실 텐데 말씀 안 하셔서 몰랐습니다. 당장 출근하기 힘드실 테니 일주일 정도, 마음 추스르시고 다음 주에 나오십시오.”
호진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많이 힘드실 텐데, 하는 말에서도 연희는 납득하지 못한 것을 덮는 눈치였다.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조금쯤 눈물을 흘려 보이는 게 차라리 더 좋았으려나? 아니면 슬픔을 억지로 참는 모습을 연기하는 게 좋았을까?
하지만 호진은 이 사람 앞에서 우스운 연극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인성이 동일할 수 없듯, 모든 어머니가 숭고할 수도 없는 것을 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홀린 듯, 호진의 입에서 생각이 툭 튀어 나갔다.
“사장님. 헌신적 모성이 여성의 본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호진 씨?”
“마빈 해리스라는 인류학자의 말을 들어 보면 모성은 본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더 많은 단백질 섭취를 위해서 자신의 아이를 선택하여 살해하던 어머니들에게 거룩한 모성애란 말이 과연 합당할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런데 저는 마빈 해리스를 읽기 전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나에게 어렸을 때부터 저질렀던 짓들 덕분에 말입니다.”
“……호진 씨.”
“어머니의 죽음에 무감한 것을 비난하고 싶으십니까? 그것이 해고 사유가 됩니까?”
이런. 연희는 이마에 손을 짚고 혀를 찼다. 이 사내의 어머니가 어떤 일을 했기에 이런 말을 듣는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물어볼 수 없는 내용이란 건 알겠다. 오히려 해고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희는 무겁게 말했다.
“왜 내가 당신을 비난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일부터 신촌 사무실로 출근하겠습니다.”
“괜히 속을 어지럽힌 것 같군요. 편할 대로 하십시오.”
연희는 정중했고, 호진은 구질구질한 변명은 집어치우고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동호대교 중간부터 차를 세워 둔 곳까지 말없이 걸었다. 바람이 일 때마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풀썩대며 흔들렸다.
“면접 보자마자 결정되다니 지원자가 별로 없었습니까?”
“예? 호진 씨는 오늘까지 14대 1의 경쟁을 뚫으셨습니다만.”
연희의 눈이 멀뚱해졌다. 호진은 고개를 숙이고 실긋 웃었다. 그래 봤자 어차피 별것도 아닌 경쟁이고,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왔겠지. 그 정도 연봉에, 중소기업이라 하기도 면구한 유통센터니까.
“바로 결정이 돼서 지원자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허? 연희는 걸음을 멈추고 호진을 돌아보았다. 코끝으로 주름이 훅, 잡혔다.
“사장 비서 뽑는 건데, 사장 마음에 딱 들면 상황 끝난 거 아닙니까? 뒷사람 볼 게 뭐 있습니까? 뭐가 더 필요합니까?”
연희는 호진이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자 속이 슬그머니 불편해졌다. 그래,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그렇다고 사람 얼굴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매너가 아니지 않나?
연희는 다시 몸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었다. 연희는 보폭이 몹시 큰 편이었다. 호진은 자신의 보폭을 굳이 바꾸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걸었다. 연희는 가다가 중간중간 멈추어서 호진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주었다.
두 사람의 차는 같은 블록에 주차되어 있었다. 연희는 호진이 자동차를 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가 날카로운 육식동물 모양의 엠블럼이 라디에이터 그릴 위에서 반들거렸다. 외제 차량이 드물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곳에서도 주인을 닮은 미끈하고 날렵한 차량은 특별해 보였다. 우와! 저거 저거, 재규어 아냐? 지나가던 사람 몇몇이 감탄사를 뱉으며 호진의 차를 흘긋거렸다.
연희의 시선이 자동차에 오래 고정되어 있자 호진이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연희의 중형 세단을 응시하던 호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국에선 상사보다 좋은 차를 타면 안 된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 같다.
“물려받은 차라서 타고 온 것뿐입니다. 차는 조만간 다른 것으로 바꿀 생각입니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연희는 호진이 인사를 한 후 주차장을 빠져나가려 할 때에야 의미를 알아차렸다. 직원 차가 사장 차보다 고급 기종이라 차를 바꾸겠다고 한 건가? 내가 기분 나빠 할까 봐? 이런 젠장할! 나를 어떻게 보고!
“호진 씨! 이거 보세요. 이호진 씨!”
덩치 큰 사내가 뒤에서 맹렬히 주먹을 흔들었다. 사이드미러를 본 호진이 멈춰 창을 열자 우렁우렁,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터졌다.
“대체, 대체 날 어떻게 보고 그따위 말을 합니까? 누가 멀쩡한 차 팔라고 했습니까?”
“……예?”
“다른 차로 바꾸면 가만 안 둡니다! 해고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해고한다고 했습니다! 월급 한 푼 안 주고 그냥 자른다고!”
아하? 호진의 눈이 커졌다. 이런, 이런! 사장이 저런 사람이었나? 아하, 하하하! 호진의 입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제가 희마트에 처음 입사했을 때 말입니다. ……무얼 믿고 그렇게 단번에 결정하신 겁니까?”
의외의 질문에도 연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덤덤하고 약간 느려진 목소리로 답했다.
“더웠어, 그래요, 더웠어요. 기억합니까?”
“…….”
“며칠 동안 사무실을 재배치하고 정리를 하고 있었어요. 머리가 곤두설 만큼 더웠는데 에어컨은 아직 작동되지 않았고. 그런데 당신을 보니, 갑자기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덩치 큰 사내는 회상하며 큼직한 눈동자를 위로 향했다. 속눈썹이 가만가만 흔들렸다.
“대나무밭에 온 것 같았어요.”
“……네?”
“푸르고 물기 많은 청죽이 한 대 서 있었습니다. 감히 손대지 못할 만큼 푸르고 정갈하고 시원했어요.”
호진은 말을 멈추었다. 연희는 그와의 첫 번째 기억을 순결하다 할 정도로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었다.
“시원해서 좋았습니다. 대나무밭에서 바람을 맞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아니, 아니 그냥 좋았어요. ……좋았어요.”
대나무란 그리 안심할 만한 나무가 아닌 것을. 스스로를 세우는 고집에만 골몰하여, 아무것도 깃들지 못하게 하는 나무. 단 한 번의 칼질로도 세상에서 가장 흉포한 무기가 될 수 있는 나무. 텅 빈 배 속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오로지 차디찬 한기만 숨기고 있는 그런 나무. 그 한기를 시원하다고 느낀 것입니까.
“시원해서 좋았습니다. 대나무밭에서 바람을 맞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좋았어요.”
고장 나서 몇 번이고 튀어 오르는 LP 레코드처럼, 덩치 큰 사내는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호진은 그날 저녁, 영국에서 자신을 찾아온 사내에게 작별을 고했다. 급작스럽긴 했지만, 영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은 시점부터 별리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연인이라 불러야 할지, 필요에 따른 섹스 파트너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상대였으니 작별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한국이라는 나라에 발을 디딘 케빈은 호진을 보자마자 열렬히 끌어안기부터 했다.
“허니, 마이 스윗 하트,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얼마나 힘들었어? 장례는 잘 마쳤고?”
호진의 이마가 잠시 구겨졌다. 이거 곤란한걸. 길게 관계를 잇자 하는 것은 달갑잖은데.
하지만 호진은 이내 미소를 되돌렸다. 케빈은 파트너 편력이 화려했으며, 만남과 헤어짐에 별 미련이 없던 사내였다. 게다가 대대로 작위를 가진 영국 토박이에, 어미는 방계이긴 해도 윈저 가문 사람이었다. 함부로 모국을 떠나 동양의 낯선 나라에 뿌리내리겠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귀국이 늦어 걱정했다며 얼굴을 부비던 벽안의 사내는 난데없는 이별 통보에 눈과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는 호진에게 몇 차례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하더니, 손을 들어 몇 차례 따귀를 올려붙였다. 호진은 퉁퉁 부은 뺨을 문지른 후, 눈물범벅이 된 사내에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조심해서 가, 케빈.”
몇 년간 살을 맞대며 지냈던 귀족 사내와의 이별은 어미의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건조했다. 눈자위에 물기가 많은 사내는 이별을 위해 그 물기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고, 다른 이의 눈물만 익숙하게 보아 왔던 부박한 귀공자는 짐을 막 풀어 놓은 스위트룸 화장실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얼굴이 뒤덮이도록 눈물을 쏟았다.
호진은 케빈을 위로하지도, 눈물을 닦아 주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액체를 더럽다 여겼고, 그중 가장 더럽고 가증한 것이 눈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호진은 울고 있는 사내를 그대로 놓아두고 몸을 돌렸다.



저자 소개

테암컵
취향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목차

-1권-
프롤로그
1. 하늘을 나는 멸치, 거대 우루사를 만나다
2. I have a dream
3. 청죽, 이호진
4. 재규어 인 더 정글/Jaguar in the Jungle
5. 두 갈래 길
6. 설득의 방법
7. 섹시 짜장면
8. 철거 현장
9. The Hunter
10. 거대한 나무의 그늘
11. 잠 못 이루는 밤
12. 열병, 40.8

-2권-
13.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14. 굳어 돌이 된 말
15. His days and nights
16. 매혹
17. 칵테일, 섹스 온 더 비치
18. 맥스웰 경의 영국식 브렉퍼스트
19. 키스 오브 파이어
20. 달콤한 제안
21. 이것이냐 저것이냐

-3권-
22. 마지노선
23. 졸업
24. 등가교환
25. 행복한 꿈
26. 황사
27. 춘우세진 春雨洗塵
28. 각인
29. 자각

-4권-
30. 변성기
31. 사랑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32. 서른이 되면
33. 연인들
34. 사과하지 마세요
35. 비린내든 향내든 감추어지지 않는다
36. 우선순위

Bonus Track
1. 양육일기
2. 일천 슈퍼마켓

-5권-
37. 연애상담
38. 성장통
39. 먹느냐 먹히느냐
40. 부비트랩
41. 상장
42. 단 한 번의 통증
43.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왜

-6권-
44. 백병전
45. God Father, Louis XIII, 황금의 음료
46. love letter
47. 주주총회
48. 아홉 번째의 파도
49. 단장지애 斷腸之愛
50. Dear, my deer

-7권-
51. 담장 높은 집
52. 재회
53. 한 사람에게 허용되는 짐의 무게
54. 게임의 규칙
55.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

-8권-
56. 네메시스 게임
57. Switch on
58. PEF SYNG
59. 흘러간 것에 경의를 표하는 법
60. Shine, You are my Sunshine

외전
-1권-
1. Old Freshman / by 선기형
2. Call me Honey Honey Baby
3. 이, 이, 이놈의 인기!
4. 여름, 여름, 여름

-2권-
5. 자반고등어 / by 윤연희
5.5. 진짜 사나이
6. 불굴의 역동성 (Resilient Dynamism)

작가 후기

Hidden track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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