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W세대인 나는 회사에서 X세대 상사와 워라밸 세대 후배 사이에서 가교 구실을 해야 하는 중간자다. 본인은 회사의 통제에서 자유를 추구하지만, 정작 조직의 자유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X세대 상사가 있다. 상사는 “아니, 요즘 애들은 기본이 안 되어 있어. 상사가 퇴근하기도 전에 지들이 먼저 가는 게 말이 돼”라며 나에게 눈치를 준다. 군기 좀 잡으라는 말이다. 후배들도 나에게 하소연한다. “아니, 저희는 이해가 안 가요. 왜 할 것도 없는데 매일 야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분은 항상 ‘답정너’라 답답해요. 칼퇴근할 수 있도록 건의 좀 해주세요.”
한쪽 팔은 상사가 다른 쪽 팔은 후배가 붙잡고 동시에 잡아당길 때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라는 생각으로 카오스에 빠진다. 중간자 위치에서 양쪽의 말을 균형 있게 전달하며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예술의 경지인지 해본 사람만이 안다. 내 의견이 조금이라도 상사 편으로 기울면 나는 후배들에게 ‘똑같은 꼰대’로 낙인찍힌다. 반대로 후배들 편으로 기울면 상사에게 ‘똑같은 무개념’으로 욕먹는다. 마음속에서는 ‘마이 웨이’를 외치지만, 현실 속에서는 박쥐 같은 내 모습에 자괴감을 느낀다. 나는 꼰대도 무개념도 되고 싶지 않다. <샌드위치 신세가 된 W세대> 중에서
공포 세대는 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일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이들은 자기 혐오감에 빠졌다. 끊임없이 진로를 고민하고 불안해했다. 시장 논리가 대학을 집어삼킨 상황에서 공포 세대는 무력했다. 대학에서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부 학과가 폐지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 자기 철학을 구축해 가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공포 세대는 각종 스펙 쌓기에만 열중했다. 대학의 낭만 따위는 개나 줘버린 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대학 졸업만 해도 여러 기업에서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며 담뱃값이라도 아껴야 하는 ‘호랑이 담배 끊는 시절’이 도래했다. 취업시장은 점점 얼어붙었다. 공포 세대는 “나… 떨고 있니?”라는 대사를 자신에게 던지며 살아왔다. <서른의 공포, 공포의 서른> 중에서
아내와 오랜만에 추억의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보았다. 이 영화는 1995년 픽사가 월트 디즈니와 함께 제작한 최초의 3D 애니메이션이다. 장난감들의 우정과 모험담을 그린 스토리로 세계 흥행작이 되었다. 20여 년 만에 성인이 되어 다시 보니 어릴 때는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중 하나가 장난감들의 주인 꼬마 앤디가 벽에 선을 그으며 자신의 키를 재는 장면이었다. 어릴 적 추억이 소환되었다. 나도 벽에 발뒤꿈치를 대고 꼿꼿이 서 있으면 어머니가 정수리에 맞추어 선을 그어주곤 했다. 선이 점점 높아질 때마다 나는 마치 골리앗이라도 된 듯 기고만장해졌다.
그런데 학교에 가면 늘 나보다 큰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우주 전사 장난감 버즈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버즈는 언제나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를 외치며 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추락을 거듭하며 현실을 자각한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는다. 자신이 우주 전사가 아닌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명대사를 남긴다. “이건 나는 게 아니야. 멋지게 떨어지는 거지!”
<부족한 나를 그대로 사랑하려면> 중에서
결손가정에서 자라 20대에는 한 살이라도 더 어렸을 때 빨리 결혼하고 싶었고, 그 누구보다 배우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또한, 행복한 가정에서 많은 자녀를 낳고 싶기도 했다(미쳤다고 하겠지만, 축구팀까지는 아니더라도 농구팀 정도는 도전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편해져 가던 그때,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영화 제목처럼 ‘왜 굳이 결혼을 서둘러야 할까’, ‘편한 싱글 라이프를 포기하고 불편한 결혼을 해야 할까’라고 생각했다.
‘행복=편리함’, ‘불행=불편함’이라는 공식이 머리를 지배하던 나에게 ‘불편함=성숙=행복’이라는 공식은 낯설고 무서웠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경받는 참 어른들은 ‘불편함=성숙=행복’ 공식을 삶으로 증명하며 살았다. 삶을 돌아보았을 때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불편하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나의 성숙하지 못한 민낯을 대면했다.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일까?> 중에서
아직 우리 주위에는 ‘사회적 왼손잡이’가 많다. 소수라는 이유로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약자라는 이유로 소외와 무시의 대상이 된다. 사회는 그들을 불편한 존재로 여긴다. 편리함을 해치는 장애물로 여긴다. 비열한 이기심이 빚어낸 결과다. 나도 분명 알게 모르게 그 이기심에 일조했다.
불편하다고 해서 그른 것이 아니며 편리하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니다. 숨고 싶은 뙤약볕은 과일을 잘 익게 하고, 피하고 싶은 태풍은 바닷물을 순환시켜 정화 작용을 돕는다. 우리는 불편한 만큼 성숙해진다.
주변에서 편리함만 추구하다 단 한 치도 자라지 못한 추악한 늙은이를 볼 수 있다.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불편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오른’쪽만 ‘옳은’ 쪽이 아닌 이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