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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상세페이지

소설 한국소설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소장종이책 정가13,000
전자책 정가31%9,000
판매가9,000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작품 소개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죽은 내 영혼을 밟으며” 사는,
저항마저 사치인 한 청춘의 자화상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김의 작가의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은 그 어디서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무력한 한 청춘의 자화상이 담긴 작품이다. 초라한 변두리 아파트에서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엄마와 함께 사는 이 청춘에게, 저항은 사치다. 모멸감을 속으로 견디며 사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유령처럼, 식물처럼 살아도 이 모자의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유린하는 손아귀가 들러붙는다. 게다가 그 손아귀의 주인공은 그 모자와 너무도 가까운 곳에 산다. 세상 끝으로 내몰린 자들의 거주지인 그 변두리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이웃 소년인 것이다. 즉 김의 작가는 소외된 자들끼리의 공동체라는 우리의 느슨한 환상에 찬물을 끼얹으며 세상 끝에서 다시 짜이는 먹이사슬의 세계, 너무도 끔찍해서 슬쩍 구경하기도 불편한 한 편의 지옥도를 우리 앞에 재현해낸다. “죽은 내 영혼을 밟으며” 사는, 하루하루가 역겹고 더러운 악몽인 한 청춘을 통해.

심사평, 간만에 등장한 ‘밑바닥 소설’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은 성 소수자인 트랜스젠더를 엄마(혹은 아빠)로 둔 젊은이(혹은 소년)의 성장기로, 짐짓 위악적으로 느껴질 만큼 생생하고 처절한, 간만에 등장한 ‘밑바닥 소설’이었다. 거친 소재와 표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삶에 대한 순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평이 있었다. -심사평 중에서
(박범신 김성곤 임철우 은희경 김형경 하응백 한창훈 김미현 김별아)

●책 속에서
형벌이다. 트랜스젠더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때론 너무 힘들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장난기가 발동했던 모양이다. 남자를 만들어놓고 여자의 살가죽을 입혔으니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그 살가죽을 벗으려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지 정말 몰랐단 말인가. (34쪽)

나는 엄마가 이른바 신이 정한 윤리를 어기고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는 그저 본래의 모습인 여자를 되찾은 것뿐이다. 신이 엄마에게 운명이란 이름으로 잘못 입혀놓은 남자의 옷을 벗은 것뿐이다.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서 그 옷을 벗은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나는 엄마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트랜스젠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 가스토치의 파란 불꽃을 점화한다. 그리고 밤색 머리의 얼굴을 향해 불길을 갖다 댄다. 내가 인간이었을 때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양이이므로 할 수 있다. 나는 파란 불꽃의 방향이 밤색 머리의 눈으로 향하게 한다. 밤색 머리의 눈이 또 한 번 타기 시작한다. 너덜해진 눈꺼풀이 마저 탄다. 이윽고 눈알이 타기 시작한다. 강렬한 파란 불꽃을 견디지 못한 눈알이 그만 터져버린다. 밤색 머리의 터진 눈알에서 지지직 소리와 함께 액체가 흘러나온다. 밤색 머리가 내게 흘리는 눈물이다. 용서를 구하는 항복의 백기다. 아, 이 벅찬 심장의 자유와 황홀감을 어디에 비할까.

개털 작업 아르바이트는 불쌍한 개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죄책감만 빼면 다른 어떤 아르바이트보다 편하다. (…) 그렇다고 이 일이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덜 고되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일이 편한 것은 대면하는 고객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적어서다.
(…)
그 이전에 했던 다른 아르바이트들은 모두 고객들을 직접 상대하는 일이어서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른다. 특히 개념을 상실했거나 양심이 불량한 손님들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은 아예 인간 이하로 대하는 손님들이 의외로 많다. 아무리 손님이 왕이라지만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노예는 아니잖은가.

어둡고 습한 동굴이다. 햇볕도 바람도 들지 않는다. 매우 습하고 칙칙하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그저 지독한 어둠뿐이다. 죽음보다 더 어두운 동굴이다. 불안하고 우울한 동굴이다. 그 동굴 속엔 우주로부터 버려진 온갖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햇볕도 들지 않고 바람도 들지 않고 은빛 날개를 가진 새는커녕, 박쥐 한 마리도 날아들지 않는다. 나는 그 쓰레기들을 하나씩 파헤친다. 지독한 피해의식, 자퇴생의 늦잠, 아침마다 불안한 눈빛, 휘청대는 발걸음, 무죄의 허허벌판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엉엉 우는 사람, 쓰다 만 일기장, 밤색 머리와 그 패거리가 로마군 병사처럼 몰려와 체포해 간 나의 노래하는 새들, 어릴 때 할아버지가 기르던 털 많은 똥개, 바로 그 똥개를 잡아서 양은솥에 끓이던 친척 아저씨, 그가 피워대던 담배 연기, 똥개가 죽어서인지 더 지독하게 울어대던 미루나무의 매미들, 자라며 내가 피워대던 담배 연기, 푸른 약국의 밥맛없는 여자 약사, 보리가 내 곁에 벌렁 드러누워 세상모르고 잠을 자던 달콤한 오후, 그 오후를 깨뜨리며 울리던 악마의 초인종 소리, 능멸하듯 내 엉덩이를 밀고 들어오던 악마의 더러운 성기, 집에 오면서 게워대던 골목길, 그 골목길을 몰래 엿보던 숙명여고 여고생들에게 나도 모르게 보였던 망신스러운 눈물, 운명의 저주라고 밤낮으로 믿는 피해의식, (...)

필균이 아저씨는 술에 취하자 노래를 부른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옛날 노래 같은데 나는 잘 모르는 노래다. 필균이 아저씨가 일어나서 춤까지 춘다. 나는 옆집과 아래층 사람들에게 소음 피해를 줄까 봐 아저씨를 말린다. 아저씨가 미안하다며 다시 자리에 앉다가 책상 위의 휴대용 가스토치를 발견한다. 이런 게 왜 방에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영화네식당 아르바이트 얘기는 하지 않고 그냥 잠깐 누구한테서 빌린 거라고 말한다. 그러자 필균이 아저씨가 가스토치를 손에 들더니 갑자기 가야농원 최 사장을 욕한다. 아까와는 달리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최 사장 그 개새끼라고. 아마 최 사장이 휘두르는 롱가스토치 불꽃에 자주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아픈 기억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나도 술김에 밤색 머리 얘기를 꺼낸다. 남 앞에선 처음으로 악마를 욕한다. 그러자 필균이 아저씨가 대뜸 그 밤색 머리 아이가 누구냐고 눈에 불을 켜며 묻는다.

나는 죽은 내 영혼을 밟으며 집으로 몇 걸음 옮기다가 뒤를 돌아본다. 밤색 머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악마는 여자아이와 함께 1505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노닥거리고 있다. 담배를 다 피우면 집에 들어갈 모양이다.
저 악마는 도대체 누구인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다. 그리고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추운 겨울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엄마는 악마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참담했을까.
세상은 무슨 이유로 저 악마를 내버려두는지 모르겠다. 응당한 형벌을 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세상도 악마가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악마에겐 관심조차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내 엄마를 잡아먹은 저 악마를, 또 다른 엄마들을 잡아먹을 수도 있는 저 악마를 내버려두는 것일까.
도저히 그냥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나는 뒤로 돌아선다. 그리고 아직도 1505호 앞에서 여자아이와 노닥거리고 있는 저 밤색 머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끝내 처참하게 죽은 내 젊은 날의 영혼을 아프게 밟으며 달려간다.

●추천사
이 소설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어둡고 우울하다. 가난, 청춘, 트랜스젠더, 강간, 폭력, 죽음, 자살 등 가능한 모든 불행과 슬픔의 기호들이 난무한다. 때문에 이 소설을 현재의 현실에 대한 기록이나 비판으로만 읽으면 그냥 부정적 결말에서 끝나버리는 ‘한 겹’의 소설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과연 ‘인간다운 삶’이 과연 권리인지 아니면 의무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그리고 불편하게 질문한다. 사건의 중심에서 주변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소설 속 ‘악마’가 죽어도 여전히 지옥은 지옥이고 타인은 이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결말에서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두 겹’의 소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악무한적인 현실 속에서 인간 은 과연 자퇴할 수 있는가. 대답이 곤란한 이런 질문에 의해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된다.
―김미현(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교수)

이것은 ‘바닥’의 이야기다. 낮고 어둡고, 거칠고 비리다. 개 같은 청춘이 개털을 그슬리며 개 같은 인생을 짓부순다. 그 낯선 혼돈과 파괴에 몰입할수록 불편하고 역겨워지지만, 바야흐로 그때부터 ‘바닥’이 진동한다. 비정하게 얼어붙었던 마음이 동정이든 혐오 때문이든 밑둥치로부터 흔들려 마침내 아릿하고 뻐근해진다. 그것이 외면하고프나 뿌리칠 수 없는, 이 소설의 감동이다. ―김별아(소설가, 세계문학상 1회 수상자)


출판사 서평

죽은 개를 태워 돈을 벌고, 그림 속 고양이가 되어 견디는 삶
주인공 인우는 해바라기밭에서 죽은 개의 털을 그스는 작업을 능숙하게 해낸다. 그렇게 털을 다 그슬고 나면, 그 개를 ‘영화네식당’이라는 보신탕집에 넘긴다. 얼마 전 다니던 대학을 자퇴한 후, 그는 이 개털 작업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70만 원을 벌며 생활하고 있다. 비닐봉투로 질식사시킨 개의 사체를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다루는 그이지만, 자기 집 초인종을 함부로 누르고 가끔씩 대문 앞에 쓰레기봉투도 갖다놓는 ‘악마’와 그 패거리에게는 꼼짝도 못한다. 그는 악마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숨죽이며 몸을 웅크린다. 그 악마는 인우가 사는 아파트 같은 층에 산다. 그래서 인우는 그 악마와 마주칠까 봐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늘 긴장한다.
인우는 집에 처박혀 고양이 그림을 그릴 때만, 그 그림 속 고양이가 되었을 때만 비로소 자유롭다.
개털 작업, 고양이 그리기, 그 외의 인우의 일상이라곤 혼자서 오므라이스를 해 먹는 것밖에 없다. 인우는 엄마와 함께 살지만, 엄마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렵다. 엄마는 늦은 오후에 출근해서 다음 날 새벽에야 퇴근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직장은 인우가 개털 작업을 하는 해바라기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페 ‘해바라기’다. 엄마는 월급도 얼마 안 되는 그 직장에 거의 목숨을 걸듯 집착한다. 그곳에서만은 차별과 모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제3의 성, 트랜스젠더들의 쉼터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빠였던 엄마
인우의 부모는 인우가 다섯 살 때 이혼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돈은 벌어다줄 수 있지만 더 이상 남자 노릇은 못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인우는 아빠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어린 인우는 변화된 삶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점점 여자로 변해가는 아빠의 모습도,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라는 아빠의 요구도, 무엇보다 엄마는 물론 친가 외가와도 갑작스럽게 단절된 고독한 삶도, 그리고 아빠가 엄마가 되면서 겪게 된 가난도. 그러나 그보다 더한, 평생을 견뎌야 할 시련이 남아 있음을 인우는 엄마가 된 아빠의 손에 이끌려 간 결혼식장에서 깨닫게 되었다.

“쟤, 트랜스젠더지?”
“몰라보겠다.”
“얼굴 수술도 한 거 같은데?”
“만졌네.”
“아닐걸? 호르몬 치료를 하면 자연스럽게 변하는 거 아냐?”
“몰라. 어쨌든 여자처럼 예쁘네.”
“자지도 수술했나?”
“모르지. 하지만 쟤들 중엔 안 한 애들도 많아.”
“왜?”
“돈이 없으니깐. 그래도 상관없어.”
“왜?”
“왜긴. 한번 해봐라. 환장한다.”

엄마는 옛 친구들의 이런 수군덕거림을 듣고도 아들에게 그간 못 먹였던 맛있는 음식을 먹이기 위해 식장의 식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날 밤 몹시도 서럽게 운다. 인우는 그때부터 이 세상에서 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옛 친구들의 창녀 취급은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병원에 가고, 자동차를 사는 일상적인 일도 트랜스젠더에겐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외모를 여성적으로 가꾼들 주민등록 앞자리 번호가 1에서 2로 바뀌지 않는다면 늘 성별을 추궁받는 삶, 정상성을 의심받는 삶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 삶이 야만적인 폭력을 당하면 항의도 하지 못한다. 자칫하면 그 항의가 미디어에서 흥밋거리로 다뤄져 ‘신상’을 털리기 때문이다.
인우는 그렇게 엄마로부터 가난뿐만 아니라 체념까지 대물림받게 된다. 이 세상에서 인우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기 때문이다. 별명이 ‘게슈타포’인 독일어 선생에게 폭력을 당했을 때, 한 친구가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었다며 고발하라고 해도 인우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칫 그 문제가 커지면 엄마의 정체가 드러나 엄마는 물론 자신도 이 세상에서 발붙이고 살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불면이 깊어지는 밤이었지만 어찌어찌 그 세월을 건너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느 날, 도서관 뒷산에서 인우는 자신의 아파트 같은 층 1505호에 사는 고교 중퇴생 소년으로부터 강간을 당한다. 소년의 패거리가 다 보는 앞에서. 게다가 돈까지 뜯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인우는 대학을 자퇴하고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그래도 1505호 악마는 피할 수 없다. 대문만 열어도 다시 그 악마와 마주칠 수 있는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 있는 형편이 못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우는 자기 집 안에서도 악마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위축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드디어 그 악마는, 인우가 아르바이트로 개털 작업을 하는 해바라기밭까지 따라와 인우를 괴롭힌다. 악마의 패거리는 인우를 ‘남자 걸레’라고 말한다. 인우 역시 자신을 걸레라고 여긴다. 찍소리도 못하고 강간을 당하는 자신, 개고기를 먹기는커녕 냄새도 못 견디면서 개털 작업으로 돈을 버는 자신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인우가 1505호 남자애를 ‘악마’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 남자애가 자신을 강간했기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을 강간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아도 인우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인우는 그 피해자의 침묵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저자 프로필

김의

  • 학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 수상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1993년 제2회 크리스찬월드문학상
    1984년 제3회 계몽사 아동문학상
    1983년 제1회 새벗동학상

2016.03.02.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으며, 2004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83년 제1회 새벗문학상(동시)과 1984년 제3회 계몽사 아동문학상(동시)을 수상했으며, 단편소설 「바람의 초상」으로 1993년 제2회 크리스찬월드문학상을 받았다.
특히, 2015년 장편소설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로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대해서 위악적으로 느껴질 만큼 생생하고 처절한, 간만에 등장한 ‘밑바닥 소설’이라고 평하고, 거친 소재와 표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삶에 대한 순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순천향대학교 기술경영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면서 학업과 소설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목차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작가의 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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