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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런던 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한때 태권도 유망주로 손꼽혔던 임세규.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슬럼프가 찾아오면서 성적과 자신감이 급하락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운 좋게 리우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고, 스스로도 부담을 느낀다.
그러던 차, 임세규의 눈앞에 캐나다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에 귀화한 천재 테니스 선수 허식이 나타난다. 10대 시절 TV로 본 임세규의 경기 장면에 반해 그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국적까지 버린 허식. 하지만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어지러운 임세규는 쉽게 허식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허식의 마음에 더욱 불을 붙이는데…?!
[미리보기]
대낮임에도 내가 있는 곳은 수풀과 나무가 우거져 어두웠다. 습한 풀냄새와 눅눅한 이끼 냄새가 진득하게 내려앉았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멀리 보이는 선수촌의 산행로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거의 다리를 끌며 움직였다. 나무 둥치를 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접질린 왼발에 힘이 들어갈수록 통증이 거셌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 상태로 혼자 산을 내려갈 수도, 그렇다고 한없이 주저앉아 기다릴 수도 없었다. 지팡이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멀리서 작지만 분명하게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에 몸을 지탱한 채로 소리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임세규!!!!!”
목소리의 주인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목 끝으로 넘어오던 음성을 그대로 삼켰다. 눈을 의심했다. 왜 여기에,
“임세규!!! 어딨어!!!”
허식이…왜.
“임세규!!!! 대답해!!!! 임세규!!!!”
그는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이 보였다. 단단한 어깨가 실성한 듯 떨리고 있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서있는 나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 쇳소리가 나도록 부르짖었다. 내 이름을. 목소리가 마구 갈라졌다. 가까이 있는데도, 고작 50여 미터 거리인데도, 허식과 내가 있는 공간이 영 딴 세상인 것처럼, 아득했다.
어둑한 그늘 속의 나와, 태양 아래 빛나는 너.
번뜩이는 빛줄기 아래, 부시게 서있는 너를.
부르고 싶었다. 부를 수 없었다.
ㅡ불러서는, 안 된다.
이게 각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야.
그 순간, 사방을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던 허식의 시선이 나를 스쳤다. 우뚝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내 쪽을 보았다. 본 게 분명했다. 표정이 변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허식은 빠르게 다가왔다. 어둠을 부술 듯이 헤집으며. 우거진 수풀과 나뭇가지를 마구잡이로 헤치고, 순식간에.
“아…!”
“왜 대답을 안 해, 얼마나! 내가 얼마나!!!”
끌어안았다, 나를. 말 그대로 뼈가 으스러지도록. 순간 발목에서 느껴지는 찡-한 통증에 신음을 내뱉었지만, 듣지도 못한 것 같았다. 왼발에 힘을 줄 수 없어 무게가 온전히 그에게로 쏠렸다. 그런데도 허식은 단단하게 버티고 서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어깨 위로 쏟아졌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소리 질러서 미안….”
맥이 풀렸다.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허식의 몸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맞닿았다. 얼마나 헤맨 걸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애타게 찾아준 적이 있었던가.
아주 낯선 감각이 내 안에 미끄러지듯 스몄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끌어안은 탓에 폭주하는 허식의 심장 박동이 오롯이 내 오른쪽에 닿았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내 심장 또한 비슷한 속도로 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허식을 밀어냈다.
“아!!”
그 바람에 허식에게 쏠렸던 무게가 고스란히 왼발에 쏟아져,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옆으로 넘어지려는 나를 허식이 붙잡았다. 정확하게는 한쪽 팔목을 붙잡으며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러니까 허식과 내가 마주 본 자세로, 코끝이 거의 닿을 듯한 거리에서,
“왜? 아파?”
허식의 음성과 숨결이 한꺼번에 입술로 쏟아졌다. 얼굴로 확 열이 올랐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팔목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오른쪽 발목에만 힘을 주고 서있는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식한 건 나뿐이었는지, 허식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숙여 내 다리를 살폈다. 그리곤 새된 소리를 질렀다.
“뭐야, 다쳤어?!!”
팔목을 잡았던 손이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며, 나를 바닥에 조심스레 앉혔다. 제가 더 아파하는 듯한 표정에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너덜너덜하게 찢겨진 바지를 위로 걷어내자, 퉁퉁 부은 발목과 쓸린 상처들이 드러났다.
“하. 접질렸나 보네.”
“…….”
“너도 넘어졌다고 하더니…이 정도일 줄은….”
불현듯 혜미가 떠올랐다. 다급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혜미 누나는? 봤어?”
“응. 코트에서 구급차 소리 나서 나갔다가… 너 없길래 이상해서 니네 팀한테 물어봤는데 넘어져서 내려오는데 좀 걸릴 거라는 거야.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넌 안 내려오지….”
허식은 내 부은 발목을 이리저리 살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유도팀 내려오길래 너 봤냐니까 못 봤다지. 진짜 미치는 줄 알았는데.”
발목을 눌러보는 손길에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자 허식이 나를 본다.
“서은호가 말해주더라. 너 아직 산 중턱쯤에 있다고. 아마 혼자 내려오기 힘들 거라고.”
“…….”
“근데 그 말이 이상하게…그렇게 들리더라고. 그걸 알면서도 널 버리고 왔다고.”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렀다. 허식은 조용히 나를 보았다. 마치 모든 걸 꿰뚫어 보듯, 깊이를 알 수 없는 흑갈색의 눈동자가 짙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썰물처럼 휘몰아치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허식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곤 제 목에 걸려있던 수건으로 다친 부위를 압박하듯 감았다.
“좀 아플 거야, 잠시만 참아.”
허식은 상처 부위를 살피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서은호, 울 것 같더라.”
“…….”
“근데…씨발….”
“…….”
“네 표정도, 똑같아.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