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실부모한 이래, 마물이 출현하는 위험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동생 셋을 먹여 살리던 유주원은 도심에서 마물의 습격을 받고 쓰러진 날 가이드 판정을 받는다.
남자와의 섹스도 OK, 에스퍼가 마물로 변했을 때 섹스도 OK.
국가 공무원으로 받는 어마어마한 혜택을 보고 어느 정도 인권을 포기한 계약서에 흔쾌히 서명한 유주원은, 그러나, 마물화가 진행된 에스퍼를 발견하고 혼비백산한다.
“슬, 슬라임, 슬라임이라고는 말 안 했잖아! 이 씨발! 잠깐, 잠깐! 잠까아아악!”
물컹한 감촉에 대한 생리적 혐오와 두려움을 갖고 있는 그의 담당 에스퍼는…… 이능을 쓰면 슬라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S급 에스퍼 도연우가 유주원을 목격한 순간 일방 각인해 버렸으니, 다른 에스퍼를 담당할 수도 없다.
외통수 상황에서 동생 셋을 자식처럼 키워 온 서른둘의 가장은 도망가는 대신 슬라임으로 변한 에스퍼를 가이딩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
“어, 어디로…… 어디로 갑니까?”
[네?]
“가이딩, 어, 어디서 하냐고요!”
[에스퍼와 가이드가 같이 있으니까 거기서 하시면 되죠.]
“야외에서 하는 거 시히이이익!”
[네, 잠깐 송신 중단할게요.]
“아니 잠…… 끄악! 악!”
아직 연결이 끊기지 않았는데, 직장인의 체면이고 뭐고 비명이 마구마구 터져 나왔다. 주원은 벌에 쏘인 사람처럼 펄쩍 뛰어올랐다가 촉수가 등판을 위아래로 비벼 대어 창백해진 얼굴로 바닥을 디뎠다. 석상처럼 굳어 봤자 촉수에게도 움직일 자유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의 옷은, 등은, 터질 것처럼 꿈틀거리며 촉수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울긋불긋하게 도드라진 꼴을 봤으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원의 시선은 그를 향해 걸어오는 물체를 향해 있었다. 허리 위로는 슬라임처럼 흐물거리며 걸음마다 진득한 덩어리를 툭툭 떨어트리지만 그 아래로는 멀쩡한 다리를 지닌…… 괴물과 사람의 경계에 선 물체를 말이다.
성큼성큼 다가와 벌써 세 걸음 앞까지 가까워진 이 키메라는 그의 에스퍼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주춤 두 걸음을 물러나게 됐다.
다섯 걸음 멀어지자 허리……로 추정되는 위치에서 튀어나온 점액질 줄기가 그의 신발을 붙잡았다. 발목에 직접 닿았으면 꽤액 비명을 질렀을 거 같은데 다행히도 신발이다. 신발. 오로지 신발. 신발에만 닿았다.
꿈틀꿈틀 움직이는 게 금방 바짓단 안으로 들어올 것 같아서, 하필 자다가 불려 나와서 긴 양말도 신지 못해서 주원은 정말로 울고 싶었다.
그는 촉수가 무서웠다.
“도, 연우 씨?”
한 걸음 더 다가오던 에스퍼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상반신이 슬라임 같은 덩어리가 되었으나 어떻게든 말은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인체가 저런 식으로 변하는 것부터 이해 불가능의 영역이었으므로 주원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유를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문과 출신에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약간 좆같은 중소기업에서 막내로만 6년을 보낸, 온갖 잡무를 쉴 새 없이 하는 중에도 틈만 나면 이름이 불려 벌떡벌떡 일어나야 했던 대리에 불과했던 남자가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대화가 통한다는 그 사실이다!
그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기 위해 애썼다.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연우 씨 가이드, 주원입니다.”
* 가볍고 강렬하게 즐기는 미니 로맨스 & BL, 미로비 스토리 - BL 컬렉션 《슬라임이 된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