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계층, 인종의 여성들의 삶을 담아낸
거트루드 스타인 문학의 정수
퀴어문학 출판사 큐큐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의 《세 명의 삶\Q.E.D.》를 출간했다. 우리에게 피카소와 헤밍웨이를 발굴한 현대 예술의 대모로 알려진 거트루드 스타인은 시인이자 소설가, 비평가로 영미문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다. 하지만 그의 명성에 비해 그의 작품은 한국 독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대표작 《세 명의 삶\Q.E.D.》는 다양한 계층, 인종의 여성들의 삶을 전통 서사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로 그려내며, 절제된 어휘와 반복을 통해 실험적이고 대담한 문체를 완성했다. 이 소설들은 모더니즘 문학운동의 일부였지만, 그 존재는 혁신이자 전복이었다. 작가 주나 반스는 스타인을 “모더니스트들의 영적 어머니”라고 불렀는데, 우디 앨런의 영화 에서 묘사됐듯 그는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아폴리네르와 같은 작가뿐만 아니라 피카소, 만 레이, 에릭 사티 같은 예술인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벨 에포크에 피어난 퀴어문학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유럽은 평화와 번영의 ‘좋은 시대belle epoque’를 맞았다. 벨 에포크의 파리에는 모더니즘 운동이 번졌고, 이 시류 속에 ‘신여성’이라 불리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성애 원칙을 깨뜨린 모더니즘 덕에 작가들은 퀴어 정체성을 거침없이 작품에 담았다. 작가 주나 반스와 콜레트, 낸시 큐나드, 화가 로메인 브룩스와 마리 로랑생, 셀마 우드 등의 작품은 이성애와 남성 중심 문화예술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대개는 레즈비언이나 바이섹슈얼이던 그들은 계층, 인종, 성별을 넘어 서로의 작품을 존중하고 격려하며, 오랫동안 친구 또는 연인으로 남았다. 그 흐름에 거트루드 스타인과 앨리스 B. 토클라스도 등장한다. 스타인에게 앨리스는 뮤즈이자 비서, 비평가, 독자, 지지자였고, ‘스타인의 살롱’이 지속될 수 있었던 데에는 앨리스의 역할도 컸다. 스타인은 그들의 관계를 “우리는 정말 (서로의) 아내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앨리스를 위해 시와 글을 썼고, 앨리스는 그의 글쓰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플레인에디션’이라는 출판사를 함께 운영하는 등 40여 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자 자산이 되었다. 앨리스는 스타인이 사망한 후에도 계속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는데, 《Q. E. D.》는 스타인 사후에 앨리스와 칼 반 베히텐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Things As They Ar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어쩌면 그녀의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일지도”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肖像, 《세 명의 삶\Q. E. D.》
《세 명의 삶》은 1909년에 완성돼 6년 만에 스타인의 자비로 출판됐다. 그는 원고의 모든 수정 제안을 거절하였고, 작품에 있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고 외부와 타협하지 않았다. 《세 명의 삶》의 처음 제목은《세 역사들Three Histories》이었고, 출판사에 원고를 보낼 땐 ‘제인 샌즈’라는 필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후에 출판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지금의 제목이 되었다.
스타인이 《세 명의 삶》에서 가장 먼저 쓴 는 집안의 살림을 담당하는 집사로 주인을 섬기며 타인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전형적인 성역할을 고수하는 한편, ‘일생일대의 사랑’ 렌트먼 부인과의 관계에서 몰려오는 피로와 감정적 소모로 힘겨워한다.
세 번째 이야기 는 다른 작품보다 젠더 문제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다. 평범하고 단순한 레나는 결혼과 출산과 같은 인생 중대사를 단 한 번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타인에게 순응하는 삶을 산다. 자유의지가 없고 활기를 잃은 그녀의 삶 속에는 당시뿐만 아니라 현대 여성들의 모습도 보인다.
《세 명의 삶》에서 큰 존재감을 차지하는 는 《Q.E.D.》와 배경만 달리할 뿐, 중심 이야기는 비슷하다. 스타인은 레나와 애나의 이야기에 ‘착한’과 ‘상냥한’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지만, 멜란차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멜란차에게는 레나와 애나의 면면이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장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 멜란차는 어리석지만 순수하고, 용감하지만 연약하다. 성별을 넘어 관계 속에서 ‘지혜’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방황하던 멜란차의 이야기는 스타인의 삶이 단편적으로나마 재현한다. 나아가 스타인은 를 “19세기를 벗어나 20세기로 들어서는 최초의 확실한 문학적 행보”라고 자부하기도 했다.
《Q. E. D.》는 그가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 재학하던 당시 겪은 메리 북스테이버, 메이블 헤인즈와의 연애 사건이 모티프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써졌던 《Q. E. D.》는 그가 죽은 뒤 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Q. E. D.’는 라틴어 ‘Quod erat demonstrandum’의 약자로 ‘증명완료’를 뜻하는 수학기호이자 명제로 인물의 감정을 암시한다.
헬렌을 사랑하는 아델은 자신의 감정을 낯설어하며 경계하지만, 후에는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그 감정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명제는 소설과 맞닿는다.
나아가 세 사람의 암울하고 피로했던 관계는 스타인에게 깊은 좌절감을 주었고, 그 고통은 더 깊은 창작으로 이어졌다. 그는 중산층 지식인이라는 계급에서 벗어난 평범한 인물을 구상함으로써 1905년에 ‘애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세 명의 삶》을 쓰기 시작했다.
《세 명의 삶\Q.E.D.》에 등장하는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여성들은 각기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만, 결국 그들 삶의 집합점은 스타인 자신의 삶이었다. 그는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문학 안에 속박되지 않았고, 새로운 여성 글쓰기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그 시대에도 스타인의 문학은 쉽게 인정받지 못했고, 그의 나이 60세가 넘어서야 책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앨리스 B. 토클라스 자서전》이 앨리스의 입을 빌려 쓴 자서전이라면, 《세 명의 삶\Q.E.D.》는 스타인이 글로 써 내려간 자화상이었다.
“글자들의 입체파”, 거트루드 스타인
《세 명의 삶》은 거트루드 스타인 문체의 특징을 아주 잘 드러낸다. 스타인은 자신의 글은 ‘반복’과 ‘현재형’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세 명의 삶》에서도 그는 문장을 반복하고 번복해 해체했다. 실제로 그는 반복이 곧 ‘강조’임을 강조했는데, 그럼으로써 그만의 입체적인 문체가 완성되었다. 는 그에게 “글자들의 입체파”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다.
스타인은 피카소와 세잔의 회화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세 명의 삶》을 집필할 당시에도 그는 오빠 레오와 세잔의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피카소는 그의 초상화를 작업해 완성했다. 스타인은 피카소의 그림처럼 여러 시점으로 《세 명의 삶》 인물들을 보여주는데, 내면 심리에 집중해 묘사하기보다는 특정한 행동이나 상황을 반복해 서술한다. 서사 구조도 전통적인 연대기 서술이 아닌 ‘현재’라는 무대에서 인물의 반경을 넓혀가는 식이다. 이런 그의 서술 기법은 당시 문단에서도 엇갈린 평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세 명의 삶》 출간을 거절했던 한 출판사는 “솔직히 우리는 이 원고를 출판할 만큼 현대문학이 진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을 보내기도 했다.
거트루드는 출판계나 비평계의 비판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언어를 갖고 있다”며 그 자신의 문학을 믿고 계속 글을 썼다. 그의 이런 신념과 의지는 근대 영미 문학사와 문화사가 진일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의 마지막 작품인 오페라 를 공연하는 등 미국에서는 그의 문학을 재조명하며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그의 작품이
소개되지 않아 영미문학 독자들의 아쉬움이 컸는데, 그 공백을 《세 명의 삶\Q.E.D.》가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길 바란다.
“희망이 넘치는 이는 저항한다.” 거트루드 스타인이 끊임없이 시도했던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작품들, 가부장적 전통과 시대에 투쟁해 쟁취한 자유와 사랑,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