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와 경찰활동 두 표현을 나란히 둔 이 책의 제목이 혹자에게는 형용모순처럼 어색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남성 중심적인 것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경찰활동에 있어 젠더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느낌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렇게 젠더와 경찰활동을 서로 무관한 것으로 여기거나, 젠더와 경찰활동을 연결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들과 함께 젠더를 고려한 경찰활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2021년 이후 입학한 경찰대학생들은 성인지 교과목으로 지정된 ‘성인지 관점의 이해’와 ‘여성과 범죄’ 둘 중 하나를 필수로 이수하여야 한다. 페미니즘이나 젠더 관련 과목이 수강인원 부족으로 개설되지 못하고 있는 최근 일반대학의 여건과는 사뭇 다르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이 젠더와 관련된 이야기를 낯설어 하는 점은 일반대학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쉽게 읽히면서도 가볍지 않은 내용”은 집필진이 공유했던 핵심 목표였다. ‘성인지 관점의 이해’를 수강할 경찰대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글쓰기를 구상하며 집필진이 함께 내용을 추리고 논의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익숙하다고 여겨 온 사실의 재조명”, “좀 더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 제공” 등과 같은 학술적인 목표가 추가되었다. 이를 위해 본문의 길이를 미리 정해두고 내용을 압축해서 정리했으며, 출처 표기나 상세한 설명은 미주로 구분하였다. 또한, 본문과 별도로 개관, 학습목표, 주요용어, 생각해 볼거리, 찾아보기 등을 두어 내용의 이해와 심화를 돕고자 했다. 젠더와 경찰활동에 대한 학습과 이해는 비단 경찰대학생뿐만 아니라 경찰조직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 책의 집필진들은 경찰 내 치안정책을 수립하고, 경찰관들을 교육하고, 수사를 진행하는 단계에서 성인지 관점을 반영한 경찰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집필진들이 각기 다른 지역과 부서에 근무하면서도 이 책의 취지에 공감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집필에 참여하였던 배경이다. 때로는 생각을 나눌 사람이 가까이 있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기도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총액인건비 활용 일반임기제’로 임용되었던 경찰청 및 시·도경찰청 성평등정책담당자들은 2022년 말로 경찰조직을 떠나야 했고, 몇 개월간의 공백 후에 임용될 후임 담당자들은 2024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근무할 예정이다. 집필진 중 몇 분도 그간 젠더 관점의 경찰활동에 대한 기여나 경찰조직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경찰조직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마주해야 했다. 가까이 있어 주셨음에 감사하고, 다시 가까이 와 주시기를, 가신 곳에서도 늘 마음은 연결되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장기적으로는 ‘총액인건비 활용 일반임기제’와 같은 행정적인 이유로 성인지 관점을 반영한 경찰활동 추진이 단절되는, 안타깝고 씁쓸한 상황이 해소된다면 더 좋을 것이다. 경찰조직 내 성평등정책담당자들의 고용이 안정화되는 때가 온다면, 젠더를 고려한 경찰활동이 진일보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아마도 상당 부분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때의 개정 작업은 너무나 기꺼운 일일 것임에 분명하다. 이 책은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발생하지만 비단 여성만이 피해자가 아니며, 젠더위계(gender hierarchy)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모든 폭력을 통칭하기 위해 ‘젠더폭력범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종래의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지배, 소유, 억압,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성착취 및 스토킹과 공통점이 있다. 아울러, 이들 ‘젠더폭력’은 형사사법체계에 의해 규율되는 엄연한 ‘범죄’다. 즉, ‘젠더폭력범죄’는 성폭력(sex violence)이 아니라 젠더폭력(gender-based violence)을 이야기하고자 하며, 우리 형사사법체계상 젠더폭력이 범죄로 규율되고 있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집필진이 함께 고민한 끝에 택한 표현이다. 이러한 젠더폭력범죄의 정의에 따라 성희롱이나 직장 내 괴롭힘은 이 책에서 다루는 범위에서 제외되었으나, 이는 다분히 현행 형사사법체계를 반영한 데 따른 것으로, 2차피해 예방이나 피해자 보호·지원에 관한 이 책의 논의는 현재에도 성희롱이나 직장 내 괴롭힘에 충분히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젠더와 경찰활동이라는 제목도, 집필과정에서 추구했던 목표도 형용모순과도 같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날이 있으리라 믿으며, 그 당연한 것을 위한 나름의 노력을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계속할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 책의 기획을 지지해 주셨던 박영사의 정연환 과장님과 업무를 이어받아 마무리해 주신 장유나 과장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