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력자의 갈등과 연대가 그리는 새로운 한국형 근미래 SF 연작
과학 및 첨단 기술문명과 문학이 결합된 한국 SF 문학을 소개하기 위해 작가를 발굴하고 뚝심 있게 출간하고 있는 그래비티북스가 내놓는 GF 시리즈. 이열 작가의 장편 연작 SF소설 《픽셀로 그린 심장》이 GF 시리즈 22권으로 출간됐다. 이번 작품은 2040년대부터 2060년대까지의 근미래를 무대로, 초능력을 지닌 능력자와 일반인이 공존하는 사회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픽셀로 그린 심장》은 총 14편의 독립 단편이 모여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하는 연작 장편이다. 기억 조작, 시간 회귀, 재생 능력 등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겪는 이야기가 출발점이지만, 단편들은 서로의 시간과 사건을 넘나들며 다층적 레이어 구조로 맞물린다. 독자는 단편을 순서대로 읽으며 세계의 전모를 퍼즐처럼 완성해 가는 새로운 독서 경험을 얻게 된다.
각 에피소드는 독립된 이야기로도 충분히 읽히지만, 전체를 따라가다 보면 인물과 사건의 연결고리가 드러나며 더 커다란 서사의 흐름이 보인다. 두 번째 읽기에서 비로소 보이는 복선과 구조적 장치들은 연작의 정교함을 증명한다.
작품 속에는 죽은 연인을 AI로 재현해 살아가는 남자, 30초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세탁소 주인, 목소리로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는 소녀 등 독창적인 능력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중심은 능력이 아니라, 능력 때문에 더 깊은 외로움과 상실,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 인간의 내면이다. 작품은 능력자의 고립과 연대, 개인의 회복과 성장이라는 정서적 주제를 근미래적 상상력과 결합해 설득력 있게 펼쳐낸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이야기 속에 다층적으로 얽혀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남자친구에게 집착하던 재이는 후반부에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핵심 인물로 재등장하고, 불을 다루던 소년 겐지는 청년이 되어 다른 능력자 태오를 돕는다. 정호가 바텐더 시절 만난 인물이 후속 에피소드의 빌런으로 등장하는 등, 개별 사건들은 보이지 않는 결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축적된다. 마지막 에피소드 〈공전의 궤적〉은 첫 작품 〈침묵하는 사랑〉과 구조적 서사적 대구를 이루며 세계의 변화를 집약한 피날레를 완성한다.
장르적 폭도 넓다. 청춘 멜로, 휴먼 드라마, 범죄 서사, 포스트아포칼립스 등 다양한 장르 요소가 단편마다 독자적인 색채를 지니며, 웹툰·드라마·영화 등 다른 매체로 확장될 가능성 또한 높다. 짧은 콘텐츠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빠른 호흡의 재미를, 깊이 있는 서사를 찾는 독자에게는 구조적 완성도를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한국형 컨템포러리 판타지다.
《픽셀로 그린 심장》은 파편화된 개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연결하여 공동체를 형성하는지 보여주며, 기술과 인간, 능력과 고립, 연대와 회복이라는 현대적 질문을 근미래적 상상력 속에서 다시 묻게 한다.
책 속으로
첫 문장
소녀는 항상 도서관 창가 네 번째 테이블에 앉았다.
태양광 패널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고요한 버스 안에서, 소녀와 소년은 이따금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
버스에서 내린 둘은 좁은 우산 아래서 천천히 걸었다. 빗소리가 귓가에 리듬을 만들고, 거리의 불빛이 물웅덩이에 반사되어 흔들렸다. 그녀는 가끔 민기의 팔이 스치면 아래를 보며 수줍게 웃었다.
-p14 〈침묵하는 사랑〉
그가 불 주먹을 내질렀다. 뜨겁고 강렬한 분노가 다가왔다.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힘껏 끌어안았다.
“뭐, 뭐 하는 짓이야! ”
“딱 한 번만 안아 줘. 아버지.”
그는 나를 팔꿈치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하지만 나는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우리는 그 옛날
처음처럼 하나가 되었다. 이윽고 나는, 온몸을 발화시켰다.
-p54 〈화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투명 칸에 낡은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아내의 미소. 병실에
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여보, 늘 후회 없이 살아. 알지? 사랑해…….”
‘후회 없이……. 차라리 30초 능력 따위 없었더라면 미련이 덜할 텐데.’
-p118 〈교차로〉
사장님이 ‘아날로그 성지’라고 부르는 이곳은 2050년대 들어 멸종 위기에 처한 유사 천연기념물 공간이다. 종이 사용 제한 정책 때문에 신간은 대부분 전자책으로만 나오고, 양자 공명 기술을 통해 정보를 뇌로 이동하는 방식도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세태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가게 천장을 올려다보면 높은 층고 끝까지 빼곡히 꽂힌 책들이 사람을 압도한다. 테이블 다섯 개가 놓인 작은 공간에 비해 너무 많은 책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p191 〈락스타 북카페〉
창 너머 도시의 불빛 위로 거대한 물체가 떠 있었다. 검은 광택의 디스크 형태, 둥글고 매끄러운 외형에, 축구장 열 개는 될 법한 크기. 몇 초마다 한 번씩 눈을 찌를 듯한 섬광이 번쩍였다. 건물 유리창이 미세하게 진동했고, 귀를 후벼 파는 듯한 낮은 윙윙거림이 공기를 긁어댔다. 거칠게 풍겨 오는 끝 모를 위압감 앞에서 도시의 불빛들이 마치 촛불처럼 흔들렸다.
-p214 〈픽셀로 그린 심장〉
“재이야, 넌 몰라, 내가 어떤 걸 목격했는지. 글쎄, 어쩌면 네가 말한 대로 순리를 따라야 하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끝내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 사람들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해. 그리고 우월한 대상은 시기하지. 그런데 우리는 거기 둘 다 해당하네? 다시 평화가 온다고 해도, 초인들이 소수인 이상 평범한 인간들에게 사람다운 대접을 받기는 글렀어.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려면, 우위에 있는 자가 누군지 그들의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시켜 놓아야 해. 다시는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p241 〈공존의 심리학〉
흑백의 파도가 수평선 너머 도시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도시의 빛은 파도의 어둠을 깊이 드러낸다. 가까운 것은 먼 것을 아련하게, 먼 것은 가까운 것을 소중하게. 닿을 수 없지만 아름다운 관계가 한 프레임 안에서 조화롭다. 바다와 육지, 현재와 미래, 그녀와 그가 마주한 경계선.
-p336 〈공전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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