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선배의 끈질긴 섭외에 못 이겨 방송국을 관두고 RN소속사에 매니저로 입사한 서예은.
케어하게 된 배우의 일로 회사를 방문했던 예은은 우연히 톱 배우인 유채란을 만나게 되고, 예지몽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사소한 조언을 건넨다.
“채란 씨. 아무리 화가 나도 남에게 뭔가를 뿌리는 건 자제하는 게 좋아요.”
채란은 정확하게 들어맞은 예은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이후 예은을 눈여겨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툭툭 내뱉는 예은의 말은 채란을 더욱 혼란에 빠트리고, 자칫 주제넘다 생각했던 예은의 날카로운 조언은 채란의 앞날에 서서히 광명을 드리우는데…….
***
적당히 푹신한 매트 위를 전용 슬리퍼로 오가며, 예은은 자신과 맞지 않는 낯선 곳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환한 조명 아래에는 무수한 사람들과 윤택한 운동기구들이 즐비했다. 트레이너와 회원들이 평상복을 입은 예은과 착 붙은 운동복을 입은 채란을 수시로 흘끔거렸다.
“채란 씨, 나쁜 제안 아니잖아요.”
예은은 러닝머신을 뛰는 채란의 옆에 붙어 그녀의 땀이 배어난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운동을 하는 중인데도 채란의 혈색은 창백했다.
“이런 건 물올랐을 때 치고 빠져야 된다니까요. 같은 회사 후배인 수아를 봐서라도 한 번만 도와줘요. 실장님도 좋게 보고, 남훈 선배도 비는 스케줄에 채워 넣으면 된다고 하잖아요.”
“…….”
“얼굴이 노출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꺼려요? 채란 씨 목소리 좋잖아요. 그걸로 한 시간만 어필…….”
“적당히 안 해? 아까부터 진짜 진상이 따로 없네.”
듣다 못한 채란이 러닝머신을 멈추고 짜증스럽게 땀을 쓸어냈다. 닦아낸 뺨 아래로 흐른 땀이 그녀의 하얗고 긴 목 아래로 천천히 흘렀다. 평상복을 입었을 때도 마르고 맵시가 좋은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착 붙는 운동복을 입은 지금의 채란은 탄력 있는 매끈한 몸매를 자랑했다.
러닝머신 위에서 내려온 채란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덧붙였다.
“넌 진짜 내가 만만하니? 찔러서 될 사람 안 될 사람 구분이 안 돼? 어느 정신 나간 매니저가 남의 배우 스케줄까지 파악해서 쫓아와? 겁이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그 정도면 그냥 병이야, 병. 그만 좀 해, 너 때문에 없던 기피증도 생길 것 같아.”
“채란 씨가 받아주시면 바로 갈게요.”
“대체 이 상도덕 말아먹은 애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나 수아보다 높은 사람이야. 한참 선배라고! 근데 남의 매니저가 뭐 맡겨 놓은 듯 굴면 돼, 안 돼?”
“근데 이건 뭐 맡긴 듯 구는 게 아니라 서로 좋자고…….”
“나가.”
급기야 채란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출입문을 턱짓했다. 그 출입문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채란을 봤을 때 채란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훌쩍 빠져나가 힙업 운동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동을 꽤 골고루 하네. 예은은 그녀를 설득하면서도 수아가 할 수 있는 운동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발목에 튜빙밴드를 걸어 뒤로 당기고 있는 채란을 잠시 보다, 예은은 근처 정수기에서 물을 떠왔다. 마침 쉬고 있던 채란에게 물을 넘기자 따가운 시선을 보내오면서도 건네받는다. 물컵을 비운 채란은 괜스레 컵을 던지듯 돌려준다. 컵을 받아내자 운동이 다시 시작됐다.
율동적으로 당겨지는 튜빙밴드. 곧게 뻗어지는 다리 라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나로 묶은 머리 아래로 돋보이는 가늘게 긴 목. 땀에 젖은 목과 어깨.
한참이나 튜빙밴드를 당겼던 채란이 문득 말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