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우정을 그린 영화 『렛미인』의 원작소설.
열두 살 외톨이 소년, 혹독한 겨울의 끝에서 뱀 파 이 어 친구를 만나다
소외와 권태로 얼어붙은 스톡홀름의 교외 블라케베리, 그 구멍 같은 곳에서 벌어진 3주 동안의 이야기…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던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데뷔작이다. 1981년 스웨덴을 배경으로, 지옥 같은 현실에서 탈출하기를 꿈꾸는 열두 살 왕따 소년과 그런 소년을 위해 복수를 해주는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그렸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비극 속에서 반쪽짜리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복지국가의 하층민들의 비루한 삶에 가공할 존재가 스며들면서 벌어지는 3주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뱀파이어 장르에 기적과도 같은 숨결을 불어넣은 아름다운 걸작 !
영화에서도 그랬듯 소설 『렛미인』에서도 이야기의 배경인 1981년의 스웨덴은 통념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풍요의 시대, 발전의 시대, 그 어느 시대보다 글래머러스하고 화려했던 1980년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똑같이 생긴 3층짜리 아파트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황량하고 쓸쓸한 곳, 점심때만 지나면 바로 어둠이 내리는 겨울. ‘거주자는 9천 명이나 되는데 교회는 없는 도시’, 역사가 부재한 블라케베리는 역사적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 구멍 같은 장소다.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공동체를 이루는 도시가 아닌, 처음부터 모든 것이 주도면밀하게 계획되는 곳.
북유럽식 사민주의가 실현되는 그곳에서는 바닥에 내려앉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공동주택으로 대변되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후기산업사회의 산물인 교외지역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는 이들이다. 이혼을 했거나 사별한 중년의 남녀들, 결손가정의 아이들, 아동성애자, 왕따, 비행청소년, 변변한 직업이 없어 인력시장을 기웃거리거나 생계를 위해 악착같이 일해야 하는 노동계급…… 주인공 오스카르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결손 가정에 학교에서는 끔찍한 왕따에 시달리는 열두 살 소년. 그런 그들의 비루한 삶의 틈새로 어느 날 가공할 열두 살 소녀가 스며든다. 영원히 열두 살로 살아야 하는 200살의 뱀파이어 엘리가.
‘살인을 하지 않으면 결국 죽음에 이르는 뱀파이어의 절박한 생존조건’에 매력을 느껴 뱀파이어 물을 쓰게 되었다는 작가의 이야기처럼, 『렛미인』에는 뱀파이어의 존재적 초월성과 우월성보다는 실존적 고뇌와 노동에 대한 피로가 두드러진다. 뱀파이어 소설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나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같은 고전부터 최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스테프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에서 주축을 이루는 도취적 에로티시즘의 전통은 이 소설과 무관하다. 오히려 『렛미인』은 위에 언급된 작품들이 가진 고딕적 광휘를 거둬내고 리얼리티라는 뼈대로만 지은 대성당 같은 작품이다. 그리고 그런 리얼리티가 피로한 뱀파이어 장르에 기적과도 같은 숨결을 불어넣는다.
작가의 말을 밀리면 뱀파이어 엘리는 ‘비참하고, 역겹고, 고독한’ 존재다. 그리고 그런 엘리의 처지는 실존을 가진 모든 이가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집약이라는 점에서 초월적 존재의 특수성에서 벗어난다. 호칸과 비르기니아가 피를 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 역시 글래머러스한 아우라로 희생자를 취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아닌 살고자 하는 몸부림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살상에 대한 공포 뒤로 삶을 지속하는 것의 피로와, 반복된 육체노동으로 마모된 정신이 도드라질 뿐이다. 초월적 존재로 그려져온 뱀파이어의 모습은 관성과 피로에 찌들었으면서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일터로 나가야 하는 현대사회 노동계급의 일상과 겹쳐진다.
그리고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고 촌극과 환몽이 어우러진 혼돈의 한가운데, 오스카르와 엘리의 이야기가 있다. 우정 혹은 로맨스로도 볼 수 있는 이 관계는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인 둘에게 판타지의 실현으로 다가왔다가, 서로의 모습을 또렷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면서 (특히 오스카르에게) 성장의 계기로 작동한다. 엘리의 살인 행위를 비난하는 오스카르에게 엘리는 말한다. 나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지만 너는 재미로 죽이고 싶어하지 않느냐고.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 미워하는 누군가가 죽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도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너는 기꺼이 그러지 않겠느냐고. 재미를 위해, 복수를 위해.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잠시 내가 되어봐.” 영화에서는 다분히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장면으로 처리되었던 이 장면은(영화에서는 오스카르가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하는 동안 엘리의 얼굴이 노파처럼 변한다), 소설 속에서는 엘리의 과거를 이야기해주는 직접적인 (그러나 여전히 그 미스터리의 핵심은 숨겨둔 채)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호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엘리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치자 둘은 이별의 입맞춤을 나눈다. 그 순간, 오스카르는 엘리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보다 훨씬 강인하고, 아름다운 오스카르를. 엘리를 통해 본 오스카르 자신은, 사랑을 하고 있다. 수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부정하던 소년은 마침내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엘리라는 또다른 자신을 통해.
그리고 이런 현실의 디테일을 집요하게 쌓아올린 후 작가는 구원의 카타르시스와 해피엔딩이라는 판타지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나 작가가 준비해둔 것은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클라이맥스가 아니다. 영화에서의 클라이맥스가 다분히 생략적이고 순화된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소설에서는 그보다 한층 신중하고 절제된 버전으로 그려진다. 클라이맥스에서 정지한 오스카르와 엘리의 이야기는 곧바로 암시적인 에필로그로 넘어가면서 종료된다. 1981년의 블라케베리 아파트 단지에 뱀파이어 소녀를 초대한 작가답게, 말초적 카타르시스나 섣부른 해피엔딩에서 한 발짝 물러섬으로써 판타지와 현실의 거리를 없앤 것이다. 그렇다면, 오스카르와 엘리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인가, 아닌가?
많은 이들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 이제 엘리에게 새로운 조력자가 생겼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의도한 엔딩이 아니다. 나는 『렛미인』의 에필로그에 별도의 짧은 에필로그를 더 써놓았다. 몇 년 후에 발표할 예정으로, 분량은 대여섯 페이지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가 직접 선보이는 엔딩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토마스(<렛미인>의 감독)의 엔딩이 지배할 것이다. 영화상으론 정말 멋진 엔딩이다. 완벽하다. 하지만 나의 의도와는 다르다. 책에 잠깐 비춰지긴 하지만 엘리는 이미 성인이 된, 타락한 호칸을 선택했다. _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이번에도 역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책장을 덮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상상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소설 『렛미인』이 가진 매력이리라. 이 소설은 한동안 가장 인상적인 뱀파이어 소설로 독자들의 뇌리에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