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핵심은 나를 스쳐지나간
타인들의 흔적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찬란하고 무참한 기억들과
타인이라는 이름의 열병에 대하여
“삶의 사소하고도 사무치는 조각을 날카롭게 파악하는 관찰자”라 불리는 이아 옌베리의 장편소설 『기억의 순간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삶의 한순간을 가득 채웠지만 이젠 곁에 없는 이들과의 기억을 돌아보는 밀도 높은 이야기로 ‘기억’과 ‘관계’의 속성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출간 3주 만에 23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스웨덴 최고의 문학상인 아우구스트상을 수상하고 2024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기억의 순간들』은 고열을 앓던 주인공이 책 속에서 우연히 옛 연인이 쓴 메시지를 발견하며 불현듯 지난 기억의 순간들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그린다. TV 프로그램 진행자가 된 전 연인과 연락이 끊긴 애증의 친구,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던 남자와 평생 이해할 수 없던 엄마까지, 화자가 만나고 헤어졌던 타인들의 이야기는 섬세한 묘사와 작은 일화들로 생생히 그려진다. 네 장은 각각 ‘만남’ ‘전개’ ‘갈등’ ‘이별’의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몰입을 유도하는 서사 구조를 이루고, 사소하고 일상적인 순간과 기억들은 점차 하나의 뚜렷한 퍼즐을 완성해가며 읽는 이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지금 우리를 만든
모든 사랑의 형태들
바이러스로 인한 고열에 시달리던 화자는 오래전 읽었던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다시 펼치고픈 충동에 휩싸인다. 그러다가 책의 속표지에서 25년 전에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의 “빨리 낫길 바랄게”라는 메시지를 발견한다. 당시에도 말라리아로 인한 열과 두통에 괴로워했단 사실과 함께 그 글씨의 주인공인 전 연인과의 기억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문득 몽롱한 열기 속에서 자신을 스쳐간 이들과의 기억을 반추하기 시작한다.
메시지를 쓴 요한나는 문학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며 서로 좋은 자극이 되어주고 전에 없던 방식으로 대화가 잘 통하는 연인이자 소울메이트였다. 요한나에게 느꼈던 ‘연결감’은 그녀와 이별한 후 딸을 낳았을 때조차 느끼지 못한 고유하고 강렬한 감각이었다. 한편 대학 시절 서로의 꾸밈없는 모습을 공유했던 친구 니키도 있었다. 더러운 것들에 매료된, 난해한 소설을 탐독하는 열렬한 작가 지망생이자 지독한 기분파였던 니키. ‘나’는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좋아하고 또 미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니키에게서 배웠다. 가장 좋은 타이밍에 마법처럼 나타난 남자 알레한드로도 있었다. 밴드 ‘좀비 우프’의 멤버인 그를 처음 본 건 한 재즈클럽에서였고, ‘나’는 한눈에 그의 모든 움직임에 매료되었다. 알레한드로 역시 ‘나’와 사랑에 빠졌던 건 기적 같은 운명이었고, 그를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몸이 떨릴 만큼의 사랑을 느꼈다.
떠난 이들이 남긴 조각은
나라는 진실에 가닿는다
만났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나’를 조금씩 변화시켰지만 가장 궁극적으로 ‘나’를 뒤바꾼 타인은 엄마 비르기테였다. 남들보다 예민하게 불안을 느끼는 성정 때문에 개성이 있어야 할 자리마저 ‘불안’이 파고들어 어떤 면에서도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던 ‘나’의 엄마. 그리고 ‘나’로서는 다 알 수 없던 그 고통과 욕구. 비르기테는 가장 중요한 미스터리였고, 타인의 ‘디테일’을 관찰하는 법을 체득하게 된 건 어쩌면 그 미스터리를 풀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곁에 없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꺼내볼 수 있는 건 가장 사소한 순간의 기억들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어쩌면 영영 그런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기에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간절함 속에서 배운 것이다.
작품 속에서 화자를 ‘기억의 순간들’로 돌아가게 하는 고열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일상의 무자비한 추동력을 잠시나마 효과적으로 제어한다. 자리에 앉아 우연히 생긴 기억의 틈 사이로 빠져보는 일, “한 무리의 개처럼 다리 사이를 슬금슬금 맴도는 과거”를 견디며 “골짜기에 빠져 무력감을 느끼는” 일에 얼마간 나 자신을 맡길 수 있도록 몸을 흐물흐물 녹여버리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의 순간들』을 읽는 일 역시 열병을 겪는 것과 닮았을지 모르겠다. 대담하면서도 섬세하고, 솔직하면서도 우아한 이아 옌베리의 문장은 독자를 순식간에 열기 속에 빠뜨린다. 그리고 타인이 스쳐온 또다른 타인들과 순간들을 이해하는, 그리하여 끝끝내 나 자신을 이해하는, 어쩌면 ‘삶’ 그 자체와도 닮은 기쁨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