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종이책출간작으로 다시 선보입니다.
초등학교 동창으로도 모자라 이웃집에 사는 영미와 규철.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강산이 변하고 변하도록 줄기차게 동창으로 지낸다.
어느덧 삼십대가 된 그녀에게 규철이 달려드는데……. 아니? 그녀가 먼저 달려든 건가?
뭐 어째건 둘은 불타오르는 관계가 되어 버리고, 친구에서 조금 더 나아간 그들의 관계는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편집인 왈 - 규철아 화이팅!)
<작품 속에서>
영미는 다가오는 규철을 보며 꼬장꼬장하게 등을 폈다. 유방이 팽팽해져 여간 들쑤시는 게 아니었다. 어색하지 않은 동작으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긴 했지만 마음 속 동요까지 잘 숨겼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 뜬 영미는 눈동자에 스며들었던 불안이 자취를 감추기를 바랐다.
“오랜만이야.”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져 당황한 마음을 감추기 급급했는데 어느새 그는 맞은편 자리에 앉고 있었다. 영미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는 목덜미를 살살 문지르며 천천히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한 달 건너뛰었으니 무지 오랜만이다.”
어쩌다 들어 올린 눈이 그의 입술에 멎은 건 또 다른 실수였다. 하지만 규철의 눈을 곧바로 마주하는 게 더 겁났다. 그 날 이후 한자리에 마주앉는 건 처음이었다.
“오영미. 그렇게 사라지면 재미있어?”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영미는 울컥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규철의 눈을 노려봤다. 말투와는 달리 그의 눈동자는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들끓고 있었다. 영미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바싹 붙였다. 그리고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너야말로 웃긴다, 송규철. 내가 무슨 신기루니?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게? 손님이랑 밥이나 먹지, 여긴 뭐 하러 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오호라, 나한테 할 말이 있어? 그래, 좋아. 들어줄 테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이나 말해.”
“들어 주시겠다? 별로 할 말은 없어. 그냥…… 딱 한 가지만 묻고 싶어.”
“한 가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하고 사라져 주면 고맙겠다. 아, 퍼뜩 물어 보라 안하나!”
저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왔지만 가슴에 이는 파고를 감추기에 급급한 영미는 규철의 대답에 온 신경을 집중할 뿐이었다.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규철이 마침내 입술을 뗐다.
“너……, 임신한 건 아니지?”
컥!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째 십 원어치도 거르지 않고 이렇게 직선적으로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나쁜 놈. 영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성질머리를 가까스로 억누르고는 입술 끝을 끌어올려 생글생글 웃었다.
“응. 그런 것 같아. 내겐 다행한 일이고, 그 날 일을 빌미로 날 괴롭히려는 너에겐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임신 같은 거 하지 않았어. 뭐 생겼다 해도 책임지란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니까, 넌 아무것도 걱정할 거 없어. 첫 상대가 너라 심히 괴롭다만 어쩌겠냐? 내가 좀 급했나보다.”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게 잘 말했다 싶었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규철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 모양인지 자꾸만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자신의 얼굴을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바라보는데 영미는 도대체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라 당혹스러웠다.
“너랑 더 이상 엮이기 싫으니까 할 말 있으면 얼른 해.”
“그러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넌 처녀가 아니었어.”
영미는 규철의 폭탄선언에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심장이 어디론가 튀어나가 버린 듯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미는 다행이도 도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처녀가 아니었다고? 처음이 아니었다니, 그렇다면? 그가 첫 남자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와? 언제? 라는 물음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말도 안 돼.”
“유감스럽지만 사실이야. 여자를 안은 지 오래돼서 그런지 그날은 자제할 수가 없었어. 10년 만에 다시 미쳤었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그런 식으로 속여 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렇게 레퍼토리 하나 안 틀리고 같을 수가 있냐?”
“무, 무슨 소리야? 레퍼토리 하나 안 틀리고 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영미는 연타로 이어지는 공격에 기가 막혀 자신의 특기인 속사포 질문을 퍼부을 수가 없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규철이 이런 말을 하는 저의를 가늠해 보는 게 고작이었다.
“10년 전 졸업 파티 때도 그랬어. 그날 밤에도 내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지. 넌 그 때도 그놈의 순결딱지 타령을 해댔어. 사귀던 놈한테 차인 직후였지만 그렇게 무자비하게 덤벼들 줄은 몰랐어. 난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했었지. 흔히들 말하는 희생양이 되어 버렸던 거야. 이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10년 전! 10년 전에도 규철을 잡고 그런 짓을 했다니, 영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미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이렇게 망연자실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치명적인 충격이긴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야지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송규철에게 이렇게 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치자. 오래 전 일이고 내가 기억도 못하는 일을 가지고 날더러 대체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 기억 못한다고 잡아떼는 것만이 능수는 아니지. 네 그 대단한 자존심을 위해 입 다무는 대가는 있어야 할 거 아냐?”
“대가? 미쳤구나, 송규철?”
“미쳐가고 있는 중이야. 그런 의미에서 너한테 요구할 게 있어.”
“요구? 송규철이 오영미한테? 야야, 지나가던 똥개가 담배 피며 할배요, 하고 비웃겠다.”
태연자약하게 보이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슬쩍 치켜 올라간 규철의 눈썹으로 보아 쉬이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 바싹바싹 애간장이 탔다.
“그렇게 넉살 좋게 남의 이야기 하듯 말할 입장이 아닐 텐데? 잘 모르는 모양인데, 다시 한 번 말해 줘? 우린 10년 전 그날을 기점으로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을 잤어. 물론 넌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자고. 유감천만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우리의 적대적인 감정과는 달리 너와 내 몸은 궁합이 착착 맞더군. 아주 뜨거웠어. 난 그 일들이 아주 맘에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