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 님의 로맨스 소설>
2005년 동아출판사 출간작입니다.
가지고 싶은 여자의 몸을 얻었지만 마음은 가질 수 없던 남자, 세범.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을 하고 싶었던 여자, 인하.
힘든 병도 이겨낸 어린 사랑, 시형과 지수.
서로를 사랑으로 가둔 네 사람의 이야기.
<작품 속에서>
“대답해. 내 말을 듣겠다고.”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고 허리를 움직이는 남자로 인해 흔들리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한 거부를 하는 인하의 눈앞에 세범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기획사 사장이 보내온 서류를 내밀었다.
“사인을 받아가려면 내 말을 들어.”
“흐흑!”
참아왔던 서러움과 분노가 터졌다. 이런 더러운 경험을 하게 만든 사장을 용서할 수 없었다. 비열하게 옭아매는 세범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유성에게도!
“어렵지 않은 일이야. 내가 부르면 와주기만 하면 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인하의 몸에 또다시 뜨거운 액체를 분출한 후 세범은 서류에 사인을 했다. 이번에 촬영하는 영화에 대한 투자를 약속하는 서류였다. 기분 좋게 서명을 한 세범은 인하에게 분명한 소유욕을 내보였다.
“전화하면 바로 와. 기다리는 시간은 5분이 넘지 않게 해. 그리고 나는 누가 내 것에 손을 대는 건 아주 싫어하니 기억해라.”
마음을 열지 않는, 말을 할 때도 눈을 마주치는 법이 없고 언제나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는 인하. 품에 안을 때에도 신음 한번 흘린 적이 없는 독한 여자. 그녀의 깊은 곳은 언제나 메마른 사막과 같았다. 그래도 그는 집요하게 안았다. 언제나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고 있는 그녀를, 빈껍데기뿐인 그녀라도 안고 싶고 날아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었다. 몇 번 인하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눈이라도 마주치길 바랐지만 한번 감긴 그녀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세범은 벗어두었던 셔츠의 다시 걸치며 침실을 나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침실엔 고요함만이 남았다. 고슴도치처럼 몸을 말고 있던 인하는 한숨을 내쉬며 똑바로 누웠다. 오늘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과 함께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꺼풀이 감기고, 몇 번 뒤척이던 인하는 곧 잠이 들었다.
“제길!”
인하의 아파트를 나온 세범은 거칠게 차문을 닫았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의 눈치를 보며 시동을 거는 김 기사에게 집으로 가라고 소리친 후 눈을 감아버렸다. 그깟 계집, 버리면 그만인 것을! 잊고 찾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도 차갑기 만한 인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열도 꽤 높던데. 혼자 앓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가슴 한쪽에서 꽤 뻐근한 통증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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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쏟아졌다. 막 극장에서 나온 시형과 지수는 소나기가 그치면 가기로 하고 서로의 입에 팝콘을 넣어주며 장난을 쳤다. 그러나 쉽게 그칠 줄 알았던 비는 그들이 팝콘을 다 먹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추위에 지수의 입술이 파래지자 시형은 재킷을 벌려 그녀를 안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크긴 했지만 아직도 작은 여자친구. 그의 재킷 속으로 들어간 지수는 따뜻한 품에 살며시 기대었다.
“웬 비가 이렇게 자주 와. 우리 지수 아직 감기 덜 나았는데.”
“여우비야. 해는 그대로 있잖아. 호랑이 장가가나 봐.”
“히히, 호랑이는 좋겠다.”
거리를 돌아다니던 유성은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차에 탔다. 비가 멈추길 기다리던 그의 눈에 극장 앞에 서있는 두 남녀가 들어왔다.
“서대리, 카메라 줘 봐.”
“네?”
“카메라 달라니까!”
카메라를 받아든 유성은 두 남녀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여우비 사이로 햇살이 따스하게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재킷으로 여자가 비를 맞지 않게 감싸주고 있는 남자와 그의 품속에 있는 여자의 얼굴엔 똑같은 웃음이 빛나고 있었다.
“저 남자, 리얼&블루 청바지 모델이네요.”
“신인이 아니야? 그런데 왜 오디션 프로필에 없어?”
“패션 잡지나 화보만 찍는 모델이에요. 이번에 청바지 광고로 얼굴이 좀 알려지긴 했지만 거의 신인이나 마찬가지죠, 뭐.”
서 대리는 차안에 굴러다니고 있던 잡지를 뒤적여 시형의 광고를 찾아내 유성에게 내밀었다. 간만에 좋은 예감을 주는 신선한 얼굴을 찾은 유성은 명함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날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 못난이. 악!”
시형이 자만심에 빠져 웃고 있는 사이 지수의 강펀치가 날아왔다.
“좀 져 주면 어디가 덧나?”
“아우, 니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내가 왜 져 주냐? 억울하면 얼른 얼른 크셔.”
“야!”
“그래, 그래! 존심은 있어 갖고. 너 예뻐. 아이 예쁘다~. 우리 지수가 젤 예뻐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시형의 손길이 꼭 어린애 다루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늘 어린애처럼 투정부리고 삐치는 건 시형이었고 누나처럼 달래주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키 생각이 나자 속이 상했다. 누군 안 크고 싶어서 안 큰 줄 아나.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튀어나온 지수의 입은 들어갈 줄 몰랐다.
“화났냐?”
작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도 안 하는 그녀가 귀여워 시형은 실실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