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돈을 말하다

계약서가 없는 것도, 4대 보험을 들어주지 않는 것도, 팀장을 통해 대표가 약속했던 월급보다 적은 월급을 주는 것도, 참기 싫었지만 참았다. 나는 돈이 필요하고, 남의 돈 벌어 먹고사는 건 더럽게 더럽고 치사한 거니까. 하지만 유리문만은 닦을 수 없었다.

나이 많은 여성들은 일터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남자들도 어느 시점부터는 마찬가지겠지만, 여성의 경우 노동의 자리에서 끌어 내려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느낀다. 결혼을 해야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해서, 아이를 키워야 해서…. 자리에서 끌어 내려진 여성들은 어디에 있을까.

‘노동을 통한 대가가 이리 큰 의미였나?’, ‘여자에게 일이 이런 존재였나?’, ‘평생을 일하고 퇴직하면 이런 기분일까?’ 등등 처음 느껴보는 이 생소한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매일 밤 감정은 밑바닥을 쳤다.

“바쁜 일 있을 때 생계형 아닌 아줌마 데려다 쓰고 내보내.”
다른 사무실 사장이 바쁜 일이 생겼다고 말하자, 내가 일하는 사무실 사장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의 말은 ‘바쁜 일 있을 때 잠시 쓰고 내보낼 소모품’으로 나를 고용했다는 걸 함축하고 있었다.


관계의 끝은 바로 돈 계산이었다. 우리가 10년 가까이 모아 왔던 회비. 계속 모이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의 회비 통장엔 200만 원이 넘는 돈이 있었다. 막내는 그것을 정확히 3 등분하여 각자의 통장으로 쏴줬다. 내 통장에 꽂힌 78만 원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로 10년의 우정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서 생존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의
시간을 먹으며 사는 삶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속 베짱이처럼 즐겁지 않다. 시간 도둑은 타인이 내가 행복하기를 원해서 부양을 해주는데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아이러니와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나는 여전히 돈이 좋고 욕심도 많다. 이런 말을 꺼내면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누군가는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며 나를 가르치고 싶어 한다. 나도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내가 어떻게 다른지, 그러니까 돈이 없을 때 내 마음이 얼마만큼 쪼그라들 수 있는지 아주 잘 안다.

오랜만에 맞이한 가난은 자유롭고도 푸근했다. 슬슬 불안할 때가 됐는데? 의아해서 옆구리를 찔러봐도 무던했다. 일하고 돈 벌면 행복할 줄 알았던 막연한 기대가 무너진 것처럼, 일을 그만두고 돈이 없으면 불행할 거라고 생각한 예측도 빗나갔다.
그렇게 애매한 가난 속으로 다시 스며들었다.

개인의 삶에 주체성이란 것이 빠지면 단언할 수 없지만 생기라는 것이 사라지고 숨만 쉬는 몸뚱이만 남는 거라고 생(生)도 사(死)도 아닌 경계에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돈이 그냥 색색의 종이가 아니라 어떨 때는 인공호흡기로 보이기도 하고 인명구조요원으로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우리는 돈으로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돈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삶의 중요한 질문들을, 감당해야 할 고통을 회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돈이 고통을 완화해주기는 하지만, 고통은 삶의 기본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돈으로 피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건 의미가 있을까?

물건을 산다는 것은 값을 지불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도 사야 한다는 뜻이 있다.

돈을 받고 쓰는 것도 아닌데 봐 주는 사람도 없는 글이라니. 쓰는 재미가 점점 떨어졌다. 왜 내 글은 인기가 없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글이 별로여서 그런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왜 글이 별로인가를 따져보면, 역시 이건 입금이 보장되지 않는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선언은 당당하게. 그것이 사기일지라도.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찬란하리라는 꿈을 안고 꿈에 투자해본다.

점차 나에게 돈을 번다는 행위는 극도의 고통이 있을 뿐 큰 소득은 없는 지옥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동치가 되었고 돈을 벌면 버는 대로 안 벌면 안 버는 대로 내 죄는 크고 깊어져 갔다.


내 돈을 내가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용돈을 받을 때는 ‘빚을 졌다’라고 생각해 돈을 아꼈다. 부모님께 선물을 드릴 때는 ‘빚을 갚아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돈을 드렸다. 정작 나를 위해, 자기 계발을 위해 쓴 돈은 거의 없었다. 나는 ‘자기만의 방’은 있었지만 ‘자기만의 돈’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