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에 대해서
길은 역사입니다. 길에는 삶의 역정들이 배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찾는 산행길에도 삶의 괘적들이 어려 있습니다. 산행길은 인생길입니다. 산은 찾아오는 사람의 신분을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받아줍니다. 인간들은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산 정상에 올라서서 산을 정복했다고 자랑합니다. 정복한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서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집을 나서 산행을 마치고 무탈한 몸으로 집에 도착해야 성공한 산행입니다. 산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불귀객(不歸客)이 되는 경우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가끔 보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명한 전문 산악인들도 산에서 불귀객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지구 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의 경우에도 등반에 나선 여섯 명 중 한 명 꼴로 불귀객이 된다는 보고입니다.
우리나라 산하에 대해 학교에서 교육을 잘 못 시키고 있다는 것과 산경표(山經表)가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도 산행를 하면서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줄기의 족보입니다. 산줄기는 물줄기를 구획하는 경계가 되는데(山自分水嶺), 겹치거나 중복되지 않고, 오직 하나의 선을 따라 끊기지 않고 이어집니다. 전래의 산경표 15개 산줄기의 이름۰순서۰거리는 ①백두대간·1,658.6㎞ ②장백정간·364.2㎞ ③낙남정맥·225.6㎞ ④청북정맥·514.2㎞ ⑤청남정맥·355.6㎞ ⑥해서정맥·462.7㎞ ⑦임진북예성남정맥·158.8㎞ ⑧한북정맥·235.5㎞ ⑨낙동정맥·419㎞ ⑩한남금북정맥·158.1㎞ ⑪한남정맥·178.5㎞ ⑫금북정맥·440.5㎞ ⑬금남호남정맥·70.7㎞ ⑭금남정맥·131.4㎞ ⑮호남정맥·454.5㎞ 입니다. 15개 산줄기를 구획하는 큰 강 10개의 이름·거리는 압록강·803㎞ 두만강·547·8㎞ 한강·481.7㎞ 낙동강·525㎞ 대동강·450.3㎞ 금강·401㎞ 청천강·199㎞ 임진강·272.4㎞ 섬진강·212.3㎞ 예성강·187.4㎞ 입니다. 여기에서 뻗어나가는 지맥(支脈)·기맥(岐脈)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산경표의 기본은 첫째 모든 산줄기 산맥은 큰 강과 내(川) 그리고 골의 분수령으로서 그 하나 하나의 경계선인 분수령입니다. 둘째 산줄기의 시작과 끝남의 지점이 명확합니다. 따라서 정맥의 시작은 특정한 산이고, 그 끝남은 대체로 강 하구의 해안선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셋째 물줄기를 경계한 산맥이므로 지도 상에서 전국토의 지형지세를 보다 쉽게 읽고 활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수계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 형성과 그 생활권역을 그 유역과 함께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골짜기까지의 수계 파악도 용이하게 하여 생활과 직결되게 하였으며, 가장 중요했던 내륙 산골까지의 조운 영역도 쉽게 파악토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산줄기 산맥의 개념은 인간주의를 기본으로 한 자연지리를 바탕에 둔 것으로 그 땅과 더불어 살아 온 그 땅 사람들의 지리관인 지리심성 (地理心性 Geomentality)에 기본한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온 산맥의 이름들은 장백·마천령·함령·낭림·강남·적유령·묘향·언진·멸악·마식령·태백·추가령(구조곡)·광주·차령·소백·노령산맥 등인데 이 산맥들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에 기초를 두고 일본인 지리학자 야스 소에이가 재집필한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이우형의 '우리 땅의 물줄기를 가른 산줄기' 중에서)
간악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산 정상의 정수리에 신주로 만든 못 침을 박아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산줄기 산맥의 혈을 끊어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식당업을 하는 백태흠옹께서 북한산 노적봉의 화강암 정수리 속에 끄트머리가 보일락 말락 한 직경 4센티의 철침을 1년 넘게 주말마다 올라가 바위 손상을 피하기 위해 끌로 철주 주변만 둥글게 파서 무려 140cm나 되는 신주를 끄집어냈습니다. 지리산에 위치한 법계사에는 천왕봉 정상에서 뽑아낸 장정 어깨보다 더 큰 쇠말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남북 공동으로 DMZ지역에서 지뢰 색출 제거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만 쇠말뚝 색출 제거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통한의 흉터를 없애는 일들 우리 전래의 산경표를 제대로 교육시키는 일들이 후대로 넘어가고 있는 현실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어느 사대파 역사 학자의 수제자가 바로 그 스승의 사관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민족 사관을 정립 설파한 사례처럼 자랑스런 후손들이 태어나서 선조들이 못다 이룩한 이 같은 부끄러운 과업들이 부디부디 성취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책을 마치면서 문득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과연 내 걸음걸이로 15개 산줄기 마루금을 전부 밟으려면 몇날 며칠이 걸릴까. 한번 추산을 해보았습니다. 내 나이 65세이던 2018년 4월 20일 백두대간 구간 비재에서 속리산 기슭 도하리까지의 GPS eXplorist 310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당시 기록은 하루 동안 13.9㎞의 마루금을 휴식시간 포함해서 평균 속도 1.5㎞/h로 10시간 37분 동안 걸었습니다. 물론 구간에 따라서는 이동시간이 산행시간보다 더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 기록을 기준으로 했을 경우 백두대간은 120일이 소요됩니다. 장백정간은 27일, 낙남정맥은 17일, 청북정맥은 37일, 청남정맥은 26일, 해서정맥은 34일, 임진북예성남정맥은 12일, 한북정맥은 17일, 낙동정맥은 31일, 한남금북정맥은 12일, 한남정맥은 13일, 금북정맥은 32일, 금남호남정맥은 6일, 금남정맥은 10일, 호남정맥은 33일 소요됩니다. 합쳐보니 15개 산줄기의 추산 소요일이 427일 입니다. 14일 두 주에 한 구간을 주행할 경우 완주하는데 16년 5개월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나에게는 평생 과업이 될 수도 없는 엄청난 기간인 것 같습니다. 요즈음 보도에 의하면 에베레스트 정상 데드존 외길에서 병목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있기에 외줄을 잡고 대기하고 있다가 내려오는 사람들이 다 내려온 후에야 올라갈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말그대로 데드존에서 기력이 소진되어 숨을 거두는 이들도 속출하고 있답니다. 반면 우리 나라 산줄기는 이렇게 붐비지는 않습니다. 마루금에서 인간들을 전혀 마주치지 않은 날들도 많습니다.
산을 찾으면 행복합니다. 산을 찾으면 사랑이 쌓입니다. 굳이 15개 산줄기 마루금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산행길에 나서서 들머리에 들어서게 되면 산자분수령의 이치에 의해 백두산이나 지리산의 정기뿐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산줄기의 정기와 이어지게 됩니다. 산행을 마치고 날머리를 벗어날 때면 입산수도를 마치고 환속하는 마음처럼 아름다운 삶 이어가기를 축원합니다.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