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짱을 끼고 베갯머리에 앉아 있자니 천장을 보고 누운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죽을 거예요. 여자는 긴 머리채를 베개 위에 풀어두고, 그 속에 부드러운 윤곽의 오이씨 같은 얼굴을 가로누인다. 새하얀 뺨에 따뜻한 혈색이 알맞게 비치고 입술 빛깔은 역시나 붉다. (21쪽)
너는 사무라이다. 사무라이라면 깨닫지 못할 리 없지. 주지승이 말했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걸 보니 너는 사무라이가 아닌 게야. 인간쓰레기로구나. 하하, 화났냐? 하고 웃었다. 억울하면 깨달음을 얻었다는 증거를 가져오너라. 그렇게 말하더니 획 하고 등을 돌렸다. 괘씸하다. (28쪽)
이 말을 듣자마자,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이렇게 어두운 밤, 이 삼나무 밑에서 맹인 한 사람을 죽인 기억이 돌연히 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내가 살인자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순간, 등 뒤의 아이가 돌부처처럼 무거워졌다. (35쪽)
모든 게 정말이지 오래된 일이며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운 나쁘게도 패배했고 생포당하여 적장 앞에 끌려갔다. (43쪽)
그러자 그 이방인이 황소자리가 꼭대기에 있는 북두칠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하여 별도 바다도 모두 신이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내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하늘을 보며 침묵했다. (55쪽)
이런 식으로 어머니가 수많은 밤 애타게 잠 못 이루고 걱정했건만 아버지는 벌써 오래전에 떠돌이 무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64쪽)
떡국을 먹고 서재에 돌아오자 얼마 되지 않아 서너 명이 찾아왔다. 모두 젊은 남자들이다. 그중 하나는 프록코트를 입고 있다. 아직 옷이 몸에 익지 않은 탓인지 멜튼 원단을 조심스러워했다. 나머지 둘은 모두 일본 옷인 데다가 평상복이어서 도무지 설날 같지 않다. 두 친구들이 프록코트를 보면서, ‘여~, 여~’ 하고 한마디씩 한다. 모두 놀랐다는 증거다. 나도 맨 나중에 ‘여어~’ 하고 말했다. (73쪽)
‘도둑이 들었다는 말씀을 들어서요.’ 하며 웃고 있었다. ‘문단속은 잘하셨습니까?’ 하고 물어서 ‘아니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럼 어쩔 수 없었네요. 문단속이 안되면 어디로든 들어옵니다. 일일이 덧문마다 못을 박아두셔야 합니다.’라고 주의를 준다. 나는 ‘예, 예’ 대답을 해두었다. 이 순사를 만나고 난 뒤, 나쁜 것은 도둑이 아니라 문단속을 잘 못한 주인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84쪽)
그때 최근 3개월 정도 잊고 있던 과거의 하숙집 냄새가 좁은 복도 한가운데서 내 후각을 번갯불의 섬광처럼 자극했다. 그 냄새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과 크루거를 닮은 얼굴과 아그네스를 닮은 그의 아들과 아들의 그림자 같은 아그네스와 그들 사이에 뒤얽힌 비밀을 한꺼번에 품고 있었다. 이 냄새를 맡았을 때, 나는 그들의 기분, 동작, 언어, 안색을, 어두운 지옥 안에서 선명하게 보았다. 차마 2층에 올라가서 K를 만날 수 없었다. (109쪽)
아내는 일부러 죽은 모습을 보러 갔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냉담함 대신 갑자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단골 인력거꾼을 부르고 네모난 묘비를 사 가지고 와서는 뭔가 써 달라고 한다. 나는 묘비에 ‘고양이의 무덤’이라고 쓰고 뒷면에는 ‘이곳 아래로 번개가 내리치는 밤이 있으라’고 썼다. 인력거꾼은 그대로 묻어도 좋은지 물었다. ‘설마 화장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고 하녀가 놀렸다. (115쪽)
그러는 사이 겨울이 왔다. 언제나없이 분주한 설을 맞았다. 손님이 오지 않는 틈을 보아 일을 하고 있는데 하녀가 기름종이에 싼 소포를 가지고 왔다. 털썩하고 소리가 나는 둥근 것이었다. 보낸 사람은 잊고 있던 예전의 그 청년이었다. 기름종이를 풀고 신문지를 벗기자 안에서 한 마리의 산새가 나왔다. (138쪽)
불탄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불이 났다고 생각되는 곳엔 깨끗한 삼나무 울타리만 이어져 있고, 그중 한 집에서 희미하게 거문고 소리가 새어 나왔다. (146쪽)
노인은 아무 말도 없이 객실로 들어와 상자 속에서 족자를 꺼내 벽에 걸고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네다섯 집을 돌아다녔지만 낙관이 없다는 둥, 그림이 벗겨졌다는 둥 하면서 족자에 대해 노인이 예상했던 만큼의 존경을 표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153쪽)
나는 이 자기본위라는 말을 손에 쥐고 나서 매우 강인해졌습니다. 저놈들은 뭐야? 라는 기개가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망연자실해 있던 내게, 이 자리에 서서 이 길로 이렇게 가야 한다고 지도해준 것은 정말 이 자기본위라는 네 글자입니다. (216쪽)
그것이 개인주의의 쓸쓸함입니다. 개인주의는 타인을 대한 향배를 정하기 전에 우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거취를 결정하므로 어떤 경우에는 외톨박이가 되어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233쪽)
의무의 자극에 대한 반응인 소극적인 활력절약과 또 도락의 자극에 대한 반응인 적극적인 활력소모가, 서로 나란히 발전하여 뒤섞이며 변화합니다. 그러면서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개화라는 것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250쪽)
그래서 현대 일본의 개화는 앞에서 말씀드린 일반적인 개화와 어디가 다른지의 문제입니다. 만약 한마디로 이 문제를 결론짓게 된다면 저는 이렇게 마치고 싶습니다. − 서양의 개화(즉 일반적인 개화)는 ‘내발적’이며, 일본 현대의 개화는 ‘외발적’이다. (259쪽)
아무튼 제가 해부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일본의 장래를 아무래도 비관하게 됩니다.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에는 후지산이 있다고 말하는 바보는 요즘 별로 없지만, 전쟁 이후 일등국가라는 거만한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립니다. 대단히 낙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괜찮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이 절박한 위기를 빠져나갈 것인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게는 모범답안이 없습니다. 그저 가능한 한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는 정도에서, 내발적으로 변화해 가는 게 좋겠다는 모양 좋은 이야기밖에 할 수 없습니다. (2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