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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상세페이지

종교 기독교(개신교)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마이클 호튼 시리즈 07
소장종이책 정가14,000
전자책 정가10%12,600
판매가12,600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작품 소개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책 소개]

교회는 세상 안 어디에 있는가?
: 기독교 문화관과 기독교인의 역할

이 책이 기독교 세계관을 위한 신학적 기초나 예술, 과학, 철학 등의 본질을 다루는 난해한 해설서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자. 나는 이 책을 평범한 독자들, 특히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충동과 열망을 격려하기보다 오히려 억누르려는 하부 문화와 씨름 중인 기독교인을 위해 저술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목회적인 성격이 있다. 나는 신학자들이 다른 학문 분야에 대해 좀 더 배우기에 앞서, 그리고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기독교인이 자기 믿음을 삶과 “통합”하는 데 힘쓰기에 앞서 먼저 성경에 바탕을 둔 신학에 더 튼튼히 뿌리내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독자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느냐에 상관없이, 복음주의계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는 개념과 여기저기서 생각해야 할 점에 대한 도전은 많을 것이다.
- 마이클 호튼


[머리말]

나는 찬송 때문에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유명한 두 찬송이 완전히 상반되는 것처럼 느껴져 고개를 갸웃거리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그 중 한 곡은 “이 세상은 나그넷길 나는 다만 나그네”였고, 다른 한 곡은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었다. 나는 ‘이 세상이 우리 아버지의 세계’인데 ‘내가 다만 나그네’인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이처럼 더 큰 세계와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인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요소는 비단 찬송만이 아니었다. 기독교인은 살면서 영적으로 유익하거나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느냐를 기준으로 모든 일을 합리화하는 태도를 당연시했다. “현세적인” 교육, 활동, 직업, 일 등은 기껏해야 생계를 꾸리고 십일조를 바치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데 필요한 악에 불과했다. 최악의 경우 세상 활동은 기독교인다운 생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이었다. 현세적인 활동은 의심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을 불신과 침체의 암초로 끌어들이는 사이렌의 노래 같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사업가가 되길 꿈꾸는 사람은 기독교 단체나 기관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교회에 출석하는 젊은 미술가에게서 렘브란트 같은 미술 재능을 조금이라도 발견하면, 우리는 주보를 만드는 일을 그에게 도맡기고 (그가 정말 뛰어나면) 세례식 무대를 장식하게 한다. 우리의 과학자들은 심지어 생명 공학과 인류학을 전공으로 하지 않는 경우에도 창조론을 지지할 만한 근거들을 제출하도록 요구받았다. 음악가들은 찬양대에 참석(혹은 찬양팀을 구성)하거나 여러 지역 교회에서 순회공연을 하도록 요구받았다(물론 교회 규모는 개인의 재능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는 예술가, 연예인, 톱스타들로 구성된 우리만의 “특별 지대”를 만들어 왔는데, 특별 지대가 되어 버린 교회 안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특별히 현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르네상스, 특히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중세 시대의 인생관에 대한 반발이었다. 중세 시대에는 교회가 철학, 미술, 음악, 과학을 종교와 크게 혼동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는 각 영역을 서로 구분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철학은 사실상 철학이 아니었다. 그래서 르네상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중세 시대 교회가 좋아한 철학자들)에 대한 중세 시대 교회의 해석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실제 작품과 얼마나 다른지를 꼬집었다. 당시 미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일자리를 얻으려고 또 한 번 교회를 찾아야 했는데, 미술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과 일생을 전하거나 가르치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1473~1543)와 갈릴레오(1564~1642)가 받은 재판은 성경이 특정 과학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영적 가치 혹은 복음 전도에 얼마나 유용한가에 입각해 예술, 과학, 예능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압력은 결국 창조가 주는 선물과 복음이 주는 선물을 모두 손상하고 만다.

종교개혁 덕분에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의 유용성을 교회나 선교 단체에 해명할 필요 없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소중히 여기면서 세상에서 위엄 있고 소중하게 추구할 자유를 얻게 되었다. 소명은 창조에서 비롯된 선물이었다. 불신자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창조의 거룩한 소명을 받았다.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자신의 일을 탁월하게 추구하도록 작정하셨다. 신자는 하나님을 이처럼 탁월성의 창조자와 목표로 인정하는 반면, 불신자는 하나님을 탁월하신 창조주로 인정하길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종교개혁은 수도원의 세계관에 반대하고 세상을 포용하는 신학을 옹호했다. 과학을 발생시키고 네덜란드 미술과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 문학에 “황금시대” 를 가져오고, 교회를 정치에서 해방시키고 문맹을 퇴치하고, 공교육을 보급하고 널리 퍼져 있는 전제 정치에 맞서 시민적 자유를 요청하게 된 주원인이 바로 종교개혁이 옹호한 세상을 포용하는 신학이었다.
물론 완전한 운동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우리처럼 깊숙이 개입된 사람은 수없이 많다! 종교개혁도 죄로 물든 사람들의 실책과 오점 을 동반했다는 점에서는 전혀 예외가 아니다. 그래도 종교개혁이 다시 발견한 성경적 주제들 덕분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에 자신이 한동안 속해 있다는 인식(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의 ‘소유’는 아니라는 인식)을 다시금 회복했다.
영적 가치 혹은 복음 전도에 얼마나 유용한가에 입각해 예술, 과학, 예능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압력은 창조가 주는 선물을 평가절하하게 하며, 그런 와중에 복음이 주는 선물도 왜곡해 결국 양쪽을 모두 손상하게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 음악”이라는 말은 기독교 하부 문화에서 성공을 꿈꾸는 이류 예술가를 위한 핑계일 때가 종종 있는데, 기독교 하부 문화는 고유한 시상식 환경과 톱스타를 포함한 일반 연예계의 현란함과 화려함을 모방한다. 물론 기독교 음악이 현대 기독교 음악에 공헌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수많은 예술가의 의도는 아니더라도, 기독교 음악 산업은 대중음악을 창의성 없이 천박하게 반복 모방하는 작품을 양산하는 형태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소비자 중심 문화의 무감각한 기호에 순응해 음악을 창작하는 일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라디오 광고나 텔레비전 광고를 제작할 의도가 아니라면, 상업 예술을 ‘본뜨는’ 것은 자기 재능을 허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비판은 모든 기독교 예술가를 비난하려는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지하게 이해한 성경 메시지를 창조적인 음악 양식과 통합할 만큼 음악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대단히 세련된 예술가도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대중문화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말이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혼동하는 속물이 된다는 뜻도 아니다. 결국 “진리”는 건축의 측면에서 보면 대중음악에 해당되는 “지하철 내벽에 기록되어 있다.”라는 말이 사실일 때가 많다. 내가 가끔씩 대중음악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대중음악이 지난 시절에 대한 기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음악은 예술적 표현과 관련해 더 고차원적인 기준에 반발하는, 상업 지향적인(다시 말해, 금전 지향적인) 하급 예술 형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다시 말해, 창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확실히 “기독교적인”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런 중압감은 창조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창조를 불완전하게 보는 전제는 기독교 모든 분야에서 복음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흔히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앞으로 우리는 창조를 불확실하게 이해하는 전제에 숨겨진 입장을 살펴볼 것이다.
이 책이 기독교 세계관을 위한 신학적 기초나 예술, 과학, 철학 등의 본질을 다루는 난해한 해설서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자. 나는 이 책을 일반 독자들, 특히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충동과 열망을 격려하기보다 오히려 억누르려는 하부 문화와 씨름 중인 기독교인을 위해 저술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목회적인 성격이 있다. 나는 신학자들이 다른 학문 분야에 대해 좀 더 배우기에 앞서, 그리고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기독교인이 자기 믿음을 삶과 ‘통합’하는 데 힘쓰기에 앞서 성경에 바탕을 둔 신학에 더 튼튼히 뿌리내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독자들의 처지와 상관없이(박식한 학자든 하버드에 다니는 자녀가 괜찮은지를 알고 싶어 하는 부모든 상관없이), 복음주의계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는 개념과 여기저기서 생각해야 할 점에 대한 도전은 많을 것이다.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용어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폭넓은 의미로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문화는 대중문화(스포츠, 정치 운동, 공교육, 대중음악, 연예 등)와 고급문화(원예학, 학술, 고전 음악, 오페라, 문학, 과학 등)를 모두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의 논의에서 이처럼 편리하게 포괄적으로 정의한 ‘문화’를 사회의 이익, 오락, 풍요를 위해 의도된 인간 활동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나는 종교개혁에서 선포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성례를 적절히 시행하는” 제도적 교회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정치, 예술, 과학 등의 분야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신자 개인이 이런 분야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를 결코 함축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로) ‘제도로서의’ 교회가 하나님께 부여받은 자기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런 제도적 교회는 모든 세대와 장소를 통해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몸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제도적 교회는 말씀 선포와 제자 양성을 고유한 임무로 부여받았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사용하는 ‘교회’라는 용어는 비단 신자 개개인이 모인 집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의 인격적 사역을 위임받은 살아 있는 유기체를 가리킨다.


저자 소개

[지은이] 마이클 호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바이올라 대학교를 마치고 프랑스에 있는 국제 인권문제연구소와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했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위클리프 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마이클 호튼의 저서로는『복음이란 무엇인가』,『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교 핵심』,『십계명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 『주기도문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세상의 포로된 교회』,『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개혁신학의 뼈대를 세워주는 언약 신학』등이 있다.

목차

[목차]

■ 머리말

1장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 하나님의 주권
삶의 전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 │ 종교 개혁자들의 사례 │ 현대의 사례

2장 기독교와 문화: 영역 주권에 대한 바른 이해
그리스도와 문화 │ 성경과 문화

3장 기독교와 학문: 일반 은혜의 가치와 한계
창조의 가치 │ 모든 생각 사로잡기 │ 변증학 │ 두 가지 위험 피하기

4장 기독교와 예술1: 기독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예술의 척도 │ 기독교 예술 │ 기독교 소설 │ 범속함과 거룩함

5장 기독교와 예술2: 신자의 삶에서의 예술
예술 이해하기 │ 소설 읽기 │ MTV 끄기 │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

6장 기독교와 과학: 서로 가까워질 수 없을까
과학이라는 종교 │ 하나님의 두 책 │ 정신 │ 상식실재론 │ 증거주의 │ 답변할
준비 갖추기 │ 영성 회복

7장 기독교와 직업: 일과 휴식
경건주의의 문제 │ 소명에 대한 성경적 기초 │ 주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가정 문제 │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8장 기독교와 현대 세계: 미쳐 버린 세계
현대성: 시기적으로 어느 때를 말하는가 │ 현대성: 그것은 무엇인가 │ 현대성
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 이런 상황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어디에 있
었을까

결론: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성경의 창조 교리: 세상 안에 있다 │ 성경의 구속 교리: 하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창조와 구속의 교리가 기독교 세계관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 기
초를 새롭게 하기

■ 인명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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