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머리말 ㅣ
‘대한민국 산지뚝심’이란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우수산지 지역농가와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어느 대형마트의 광고인데 이런 카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다의 영양을 가득 담은 제철굴 통영생굴 임봉선 생산자, 40여년 장인정신으로 이어가는 충주사과 김택성 농부, 해풍 맞은 김제 황토밭에서 재배한 고구마 최우선 농부, 가족처럼 사랑을 주며 건강하게 키운 지리산 한우 서경배 농부. 어느 여행사의 ‘라르고’란 광고도 눈에 띈다. 라르고는 느리고, 풍성한 연주를 나타내는 음악용어인데 이를 차용하여 여유로운 여행상품을 소개하는 광고콘셉트이다. 스페인 9일, 스페인·포르투갈 9일, 뉴질랜드 9일 등의 상품이 소개되어 있다.
광고는 시대성을 가장 빨리 반영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책을 소개하는 첫 문장에 신문에 난 상업광고를 인용한다. 이런 예에서 과거와 다른 무엇인가를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싼 값의 식품으로 마트의 상품구색을 구성하고 싼 값에 여러 여행지를 둘러보는 ‘가보았다’식의 여행으로 상품을 구성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엇인가 분명 달라졌다. 한 마디로 문화화cultural shift다. 생산자의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문화화이고 여유로운 여행으로 감동의 깊이를 더하는 느린 여행이란 콘셉트가 문화화의 길이다.
모던 시대는 경계가 분명하여 문화와 상품이 다른 영역에 속했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은 아니다. 문화가 곧 상품이고 상품이 곧 문화인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문화화가 중요해진 이유는 문화소비자cultural consumer의 출현 때문이다. 소비를 통해 삶의 행복을 구성하고 소비로 사회문제나 환경문제 해결에 동참하려는 소비자를 말한다. 이전까지 소비를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간주하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소비행위를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 의미소비로 본다. 그 결과 쌀밥 한 그릇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셰프로 불리는 요리사는 좋은 식자재를 찾아 전국을 누벼 문화 코드로 식단을 차리려 하고 이런 식당에는 손님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며 행복해한다.
이처럼 동시대의 소비코드가 된 문화화를 담아내는 그릇이 문화마케팅이다. 영어표현은 ‘cultural shift marketing’으로 엄격히 번역하면 문화화마케팅이지만 일반적 표현에 따라 문화마케팅이라 한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는데 1부는 서론에, 2부와 3부는 이론에, 4부와 5부는 실전에 각각 해당한다. 따라서 목적에 따라 골라서 읽기를 권한다. 굳이 이론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실무자들은 1부, 4부, 5부에 눈길을 주면 되고 문화나 문화마케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1부, 2부, 3부를 눈여겨보면 될 것이다. 다소 드라이하지만 머리말에 해당하는 1부는 책 전반의 흐름을 캐치하는 데 도움되기 때문에 누구든 읽기의 대상에 포함시키면 좋겠다.
읽을 때 한 가지 유념할 점이 있는데 기존 책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개념이 많이 나온다. 비교적 자세히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게 된 배경을 논의하고 정의하였지만 생소하여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개념들이 이 책의 생명력이기 때문에 어려우면 양념처럼 들어가 있는 이미지를 통해 마음에 새겨주길 바랄 뿐이다. 이상으로 간단히 이 책의 중심개념과 구성을 소개하면서 머리말을 시작한다. 다음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세상사 인연으로 이루어진다는 불교철학에 따르면 두 가지 큰 인연이 있어 이 책이 세상에 나왔다. 2008년 3월 봉직하는 대학의 대학원에 문화예술경영학과를 개설한 것이 첫 번째 인연이고 2020년 8월로 예정된 퇴직이 두 번째 계기이다.
개설 이후 10년 넘게 문화마케팅과 예술마케팅을 대학원에서 강의하면서 어떤 내용을 어떤 깊이로 다뤄야 할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문화나 예술에 중점을 두기도 그렇고 마케팅에 중심을 두고 강의하는 것도 안 되겠기에 해마다 강의 버전을 바꾸다 보니 혼란이 왔다. 그래서 쓰기로 했다. 말하기인 강의는 비교적 얕은 사유로 타인의 견해를 소개하는 것으로 가능하지만 씀은 다르다. 깊고 논리적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쓰기를 할 수가 없다. 실제 책의 원고를 완성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씀을 통해 비로소 사유는 제대로 모습을 갖춘다는 것이었다. 쓰면 정리가 되고 체계가 잡힌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구토’라는 소설에서 쓰기를 권장했는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계기는 마케팅 강의로 생계를 이어온 36년을 마감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낮이 가고 밤이 오듯이 단절과 시작은 시간의 묘미를 살리는 묘책이라 퇴직 6, 7년 전부터 학교생활을 마감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는데 무엇을 하겠다고 딱히 정하지 않고 맨 먼저 한 일이 연구실인 c538을 스튜디오538로 바꾸고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창작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것이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은근히 스트레스가 생겼다. 출근할 때마다 이걸 보니 오늘은 무슨 창의적인 일을 하지, 오늘 내가 한 일은 창의적이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시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시대성을 닦아내는 담론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책의 주제인 문화화와 문화소비자 외에 개념설계, 상상력, 앙트러프러너십 등이 시대성을 반영하는 담론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들 담론을 해마다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게 되어 이번 책은 네 번째 결실이다.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무슨 일이든 혼자서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책 쓰는 일도 예외가 아니라 이론, 사례, 이미지 등 텍스트를 구성하는 내용을 혼자의 힘만으로 만들어내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미완의 콘텐츠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미완인지는 강의를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미완의 콘텐츠를 듣는 청자는 괴로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고마운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필자의 우왕좌왕하는 문화마케팅 강의를 10여년에 걸쳐 수강해준 제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그대들이 등을 돌렸다면 자신감이 없어서 문화마케팅 강의를 지속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졸린 눈 비벼가며 경청해주었고 마음에 드는 내용이 있을 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어 힘을 얻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색채마케팅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이 책에 실린 ‘이미지’를 거의 모두 구해준 엄지윤 박사의 공헌이 큽니다. 또한 문화예술관련 주제로 학위 논문을 작성하여 저자가 공부할 수 있게 해준 제자들의 공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공은 그대로 이 책에 녹여져 있습니다.
또한 이론에 대한 자문에 응해주신 동료들이 있어 이 책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과대학 채수환 교수님, 책 나올 때마다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신 임창희 교수님, 문화이해에 결정적인 조언을 해주신 신병현 교수님이 있어 이 책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포스텍의 양은영 교수님과 박사과정에 있는 문성림 선생님의 비판도 만만치 않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이 분들의 도움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여져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있습니다. 저자에게 문화화의 현장을 소개해주어 눈을 뜨게 해주신 김수진 선생님과 30년 넘게 도반으로 저자가 자신감을 갖게 해주신 존경하는 교수님들이 있습니다. ‘사회를 생각하는 마케팅연구회’란 이름으로 모인 안길상 교수님(전 충북대)을 비롯한 열 분의 성함을 열거하는 것으로 응원에 보답합니다. 오태현 교수님(전 강원대), 이규현 교수님(전 한남대), 이기주 교수님(충북대), 노영성 교수님(강릉대), 오창호 교수님(한신대), 김기찬 교수님(가톨릭대), 이의훈 교수님(카이스트), 박철 교수님(고려대), 위정현 교수님(중앙대)입니다.
원래 이 책은 살림 출판사의 살림총서로 기획되었지만 원고 분량이 문고판에 맞지 않아 단행본으로 학현사에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시장성을 의심하지 않고 흔쾌히 출판을 허락해주신 박세원 사장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책을 깔끔하게 편집해주신 김미영 편집부장님 그리고 표지디자인을 깔끔하게 해주신 심은경 실장님 고맙습니다. 저자의 연구실에 가끔 들려 학현사에서 책을 내게 다리를 놓으신 영업부의 곽태영 대리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무리
혁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기술혁신과 개념혁신이다. 앞은 기술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뒤는 새로운 개념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을 말한다. 기술혁신은 외부요인에 의한 강제된 혁신이라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 사람을 소외되게 하는 문제를 생기게 하지만 개념혁신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으로 자발적이라 소외됨이 없는 혁신이다.
이 책은 문화화와 문화소비자라는 두 핵심개념으로 시민사회의 변화를 의도한다. 개인의 자존감을 높게 하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 의도다. 작은 변화라도 있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책을 다 읽지 않아도 된다.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오직 어떤 대상이 문화화, 즉 문화코드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따져보면서 이를 소비하면 된다. 그리고 작은 행위라도 자신의 삶을 문화코드로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것으로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피곤하고 시원하다. 그리고 새로운 작업의 시작이다.
2019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