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머리말 ㅣ
소비자의 감정, 정서, 기분 등은 오랫동안 소비자행동 영역 내에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강조되는 인지적 접근의 마케팅 기조가 오랫동안 주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기업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및 브랜딩 전략에 스토리텔링, 체험, 공감, 배려, 문화 등이 접목되는 사례가 많아짐에 따라 정서는 소비자행동의 이해에, 그리고 마케팅 전략수립에 필수적인 주제가 되고 있다.
정서에 대한 큰 관심은 행동경제학적 접근이라는 마케팅 및 소비자행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한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프린스턴 대학 카너먼(Kahneman) 교수는 이미 작고해 함께 수상하지 못한 트버스키(Tversky) 교수와 평생을 함께 연구한 심리학자이다. 이들은 휴리스틱(heuristics), 편견(biases)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의 비합리적 의사결정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였다. 인간의 의사결정과 판단에 감성을 동반하는 비합리적 요인을 다룬 심리학적 연구결과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것은 소비자 마케팅 분야에 아주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소비자의 감정(emotion)이 주축인 비합리적 의사결정과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왜 우리가 경기, 수요예측 등 거시적 미래를 파악하는 데 종종 실패하는지를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15년이 지난 2017년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자 세일러(Thaler)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으며 동기, 정서와 같은 소비자의 비합리적 정보처리과정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지게 되었다. 그는 전통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합리적 의사결정은 실제로 시장에서 아주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연구한 공로로 수상을 하였다. 소위 넛지(Nudge)와 같이 감성을 살짝 건드려주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중요한 의사결정 및 행동을 변화시키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들 연구는 무엇보다 소비자의 마음을 얻고 오래 가져가는 방법이 반드시 복잡하고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정보가 넘쳐나고 제품도 다양해져 소비자들은 지구 구석구석을 뒤져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넛지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스스로를 결정 장애자라고 하는 사람들 또한 많아지고 있다. 주어진 대안들은 넘쳐나고 오히려 그래서 그들의 선택과 판단이 점점 힘들어짐을 보여준다. 합리적인 비교분석과 평가보다는 오히려 신속한 판단과 결정이 많아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소비자 정서가 큰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 책의 1장에서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전반에 걸쳐 강조하고 있는 소비자 판단과 행동에서 정서의 중요성은 인간이 ‘자신의 생존가치’에 최우선 순위를 두며 이 과정에서 정서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제한된 시간 내에 가장 효율적인 의사결정방법은 신속하게 내편과 아닌 편으로 나누고 곧바로 ‘좋다’와 ‘싫다’를 결정하는 것이다. 얼핏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빠른 감정적 판단은 오랜 동안 진화과정에서 습득된 선택과 집중 전략이며 이 전략을 실행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바로 ‘감정(emotion)’이다.
이 책의 2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정서 또는 감성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무의식을 인간심리의 99%로 본 프로이트 학파는 인간의 알 수 없는 판단이나 행동을 모두 무의식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포함시켰고, 주로 충동, 동기, 욕구 등이 행동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60년대에 시작된 ‘행동주의’는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생각을 지배한다는 관점으로 정서적 측면이 과소평가되었다. 그러나 파블로프(Pavlov)와 반두라(Bandura)로 대표되는 이들의 주장은 놀랍게도 세일러 교수 등이 주장하는 ‘넛지’와 닮은꼴이다. 그 후 70년대 사르트르나 프롬과 같은 ‘실존주의’ 학파들은 인간이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달성하며 사는 존재라고 정의함으로써 인간에게 있어 ‘생존가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매슬로우와 같은 심리학자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인생 단계 단계마다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지며, 그를 위해 다른 종류의 동기(motivation)와 감정(emotion)을 가진다고 보았다.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서 정서의 역할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소홀하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70년 중반부터 시작한 ‘인지적’ 접근 때문이다. 인지적 접근은 인간의 판단과 행동을 단순한 자극-반응으로 인식하는 데 대한 반감으로 시작되었다. 인지적 접근의 연구자들은 인간의 뇌를 컴퓨터와 유사한 정보처리과정을 가진 시스템으로 보았다.
그러나 인간이 감성적이고 순간적인 기분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의심하는 학자는 없다. 특히 소비자행동 및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많은 최근 연구들이 감성적인 소비자와 감각적인 브랜드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우리브랜드에 대한 ‘선호(preference)’만을 추구하던 마케팅에 다른 시각을 던져준다. 우리가 피하고 싶은 부정정서 또는 사소하게 생각했던 오감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등도 브랜드 정서와 애착에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은 결국 신체적 감각, 지각, 촉수 등 작은 단서들로부터 시작하며 그 감각경험이 소비자 의사결정 또는 행동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3장에서는 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나아가 정서는 빅데이터 등을 이용한 인공지능, 로봇개발 등에서 주요 주제가 되고 있다. 상상할 수 없이 복잡한 계산을 순식간 해내는 인공지능 시스템이 왜 7개월도 안 된 아기가 1초 만에 주저 없이 구별할 수 있는 ‘멍멍이’와 ‘야옹이’를 잘 구별하지 못할까?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인공지능과는 달리, 아기는 대다수의 상세 정보를 다 생략해 버리는 ‘단순무식한?’ 방법으로 몇 가지 특징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빠른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건 바로 인간이 수억 년 발전시켜온 ‘감정(emotion)’이라는 도구이다. 실제로 하루 수천만 개 이상의 데이터 분석을 하는 실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사이트(insight)를 주는 것은 빅데이터 그 자체가 아닌 그 많은 데이터를 어떤 방향으로 분석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정서’와 같은 스몰 데이터(small data)이다. 이 책의 4장에서는 이러한 이슈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최근 SNS 매체에서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branded entertainment)’가 성행하고 있다. 이제 스타가 아니더라도 유튜브, 인스타그램, 트위터에 콘텐츠를 올리는 엔터테이너들이 양산되고 있으며, 그들은 대다수 감성적 전달에 의존한다. 이제 정서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기업의 마케팅 활동들이 자칫 헛된 노력이 되기 쉽다. 마지막 5장에서는 최근 마케팅 활동에서 소비자 정서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으며 그 효과는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정서의 중심에는 항상 ‘나(self)'의 생존이 자리 잡고 있다. 정서는 자극이 나에게 또는 우리에게 유리한가에 대한 휴리스틱 판단이 자동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착한 기업은 ‘우리 혹은 내’편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선호된다. 많은 기업이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나 공익 캠페인에 동참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의외로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진정성을 파악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서는 고객의 브랜드 애착을 형성하고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업은 경쟁자보다 우수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전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고객과의 장기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기쁨, 재미, 생동감, 감각적 즐거움, 희망, 자부심과 같은 정서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서를 마케팅/경영 도구로 사용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정서가 무엇이며, 왜 그리고 어떤 경우에 특정의 정서가 발생되는지,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 경험이 소비자 판단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본서는 소비자의 정서가 그들의 판단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심도 있게 다루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책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안광호 교수는 2011년 정서지배 소비자행동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저술한 적이 있다. 개정판을 내야겠다고 고민하던 차에 부경희 교수와 공동작업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물로 새로운 구성의 단행본을 출간하게 되었다. 본서는 소비자행동에서 정서가 갖는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다양한 정서이론들과 실증연구들을 정리하고, 디지털 시대에서 이들의 마케팅 전략적 시사점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이 최근 마케팅이나 소비자행동 연구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공감, 배려, 행복과 같은 정서, 그리고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데 있어 주요 단서로서의 정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를 마케팅/경영 의사결정에 적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19년 8월
안광호, 부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