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몰라』: 역사의 풍경 속에서 피어나는 한 여인의 영혼
때로는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를 더 선명하게 비춘다. 15세기 피렌체의 먼지 묻은 거리를 걷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생생한 질문을 던지는 까닭이다. 조지 엘리엇의 『로몰라』는 언뜻 보면 역사 소설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 본성의 보편적 드라마가 숨겨져 있다.
이 소설은 신뢰와 배신, 이상과 현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여성의 내면 여정을 그린다. 맹인 학자 바르도의 딸 로몰라는 아버지의 서재에 갇힌 삶을 살다가 매력적인 외국인 티토 멜레마를 만나 결혼한다. 하지만 점차 그의 이중성과 배신을 깨달으면서, 자신만의 도덕적 나침반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당신은 배신자예요!" 로몰라의 이 한마디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그녀 삶의 전환점이다. 티토가 그녀 아버지의 소중한 도서관을 몰래 팔아넘긴 순간, 로몰라는 불완전한 사랑과 완벽한 의무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갈등은 단순한 부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도덕적 선택에 관한 문제다.
엘리엇의 위대함은 이 개인적 드라마를 르네상스 피렌체라는 역동적 시대 배경과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데 있다. 메디치 가문의 몰락과 사보나롤라의 종교 개혁, 프랑스군의 침공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선택과 운명을 좌우하는 강력한 조류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사적 결정이 정치적 격변, 기술의 변화, 기후 위기 같은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티토는 이 소설의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불온한 인물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다. "실질적인 선"을 말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상황에 맞게 얼굴을 바꾸는 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로몰라에게 피렌체를 떠나자고 설득하는 장면은 감정 조작의 교과서적 사례다.
반면 로몰라는 단순한 피해자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로 성장한다. 이것이 바로 150년 전에 쓰인 이 소설이 놀랍도록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 소설의 전형을 깨고, 엘리엇은 상처와 배신을 통해 더 강해지는 여성의 초상을 그린다. 그녀의 성장은 오늘날 페미니즘 문학의 원형을 보여준다.
『로몰라』의 진정한 매력은 심리적 리얼리즘에 있다. 엘리엇은 인물들의 내면 풍경을 그려내는 데 탁월하다. 티토가 점점 양심의 가책 없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해가는 과정, 로몰라가 충격과 분노를 거쳐 도덕적 결단에 이르는 여정이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된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재현을 넘어 인간 심리의 보편적 진실을 포착한다.
"그는 자신답게 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심장은 불안으로 쿵쾅거렸다."
이런 문장들은 인물의 이중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저 빅토리아 시대의 장중한 문체가 아니라, 날카로운 심리적 통찰이 담긴 현대적 감각의 문장이다. 엘리엇은 인물들이 느끼는 모순, 갈등, 두려움을 생생하게 포착함으로써 시대를 초월한 인간 본성의 진실을 그려낸다.
또한 『로몰라』는 상징과 이미지의 풍요로움을 자랑한다. 티토가 입는 사슬 갑옷은 그의 내적 공포와 죄의식의 표상이며, 아버지 바르도의 초상화는 로몰라의 과거와 의무를 상징한다. 맹인 학자의 딸이 점차 '볼 수 있게' 되는 아이러니한 여정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빛과 어둠의 모티프로 강화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소설의 깊이를 더하며,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 층위를 발견하게 한다.
이 새롭게 번역된 『로몰라』는 원작의 풍부한 문체와 심리적 깊이를 현대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옮겨냈다. 무거울 수 있는 역사적 배경과 철학적 주제를 읽기 쉽게 풀어내면서도, 원작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았다. 특히 인물들의 내면 묘사와 도덕적 갈등을 다루는 장면에서 번역의 섬세함이 빛난다.
『로몰라』는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라 도덕적 미로와 같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이 미로를 다른 방식으로 통과한다. 미로의 벽은 개인의 양심, 사회적 기대, 역사적 격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티토는 항상 가장 쉬운 길을 찾아 미로를 빠져나가려 하지만, 결국 그 쉬운 길은 함정임이 드러난다. 반면 로몰라는 더 험난하지만 진실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미로의 중심에 도달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들을 던진다. 개인적 행복과 도덕적 의무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사회적 격변기에 개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배신당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15세기 피렌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급변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하다.
『로몰라』를 읽는 것은 단순한 독서 경험이 아니라, 도덕적 풍경 속을 걷는 여정이다. 티토의 나선형 하강과 로몰라의 고통스러운 각성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자신의 선택과 책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매 장마다 펼쳐지는 인간 심리의 미묘한 변화와 그것이 역사의 대격변과 만나는 방식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는 거울이다. 티토의 매끄러운 언변과 로몰라의 강직한 도덕성,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시대를 초월한다. 소설은 배신의 심리학뿐 아니라, 배신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 정신의 회복력까지 그려낸다.
조지 엘리엇의 『로몰라』는 문학사에서 다소 간과되어 왔지만, 사실 그녀의 작품 세계의 핵심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미들마치』나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의 애독자라면, 이 작품에서 그녀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엇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이 작품이 19세기 영국 문학의 위대함을 경험하는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이다.
인간의 약점과 강점, 배신과 성장, 역사의 격변과 개인의 내면을 그린 이 작품은, 고전임에도 불구하고—아니, 고전이기 때문에—오늘의 독자에게 더욱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인간의 가능성 또한 반복해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 이 책은 수익금의 일부를 어린이재단에 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