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조지 엘리엇의 '테오프라스투스 수크의 인상'
소설가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조지 엘리엇은 '미들마치',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과 같은 위대한 소설들로 명성을 쌓은 작가지만, 그녀의 마지막 작품 '테오프라스투스 수크의 인상'은 형식도, 내용도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마치 평생 소설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말하던 작가가 마지막에는 가면을 벗고 직접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테오프라스투스 수크'라는 가상의 화자를 내세우지만, 이 화자는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보다 훨씬 더 작가 자신에 가깝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한 불완전한 지식인이 자신과 세상을 관찰하며 남긴 생각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테오프라스투스 수크라는 가상의 화자는 독신 중년 남성으로, 실패한 작가이자 날카로운 관찰자다. 그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결점과 한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성찰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총 18개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은 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인간 표본집 같다. 자신의 박식함을 과시하지만 실은 앵무새처럼 남의 의견을 반복하는 '미칙키', 평범한 사고방식을 숭배하는 '펠리시아 브라운 부인', 책을 수집하나 절대 읽지 않는 '토우니', 그리고 특별한 의견이 전혀 없는 것을 중립과 관용이라 착각하는 '무색, 무취, 무미한 사람들'까지. 이런 인물 유형들은 1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SNS에서 남의 생각을 무분별하게 공유하는 사람들, "나는 양쪽 입장 다 이해해"라며 책임 있는 판단을 회피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식을 소비재처럼 수집하기만 하는 사람들. 엘리엇이 그린 인간 유형은 시대를 초월한다.
하지만 이 책의 압권은 마지막 장 '현대의 헵! 헵! 헵!'이다. 여기서 엘리엇은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헵! 헵! 헵!'은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을 박해할 때 외치던 구호였다. 엘리엇은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킬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놀라운 것은 이 글이 오늘날 민족주의와 세계화의 충돌, 이민자 문제, 다문화주의에 관한 현대적 논쟁에 얼마나 적확한 통찰을 제공하는지다. 그녀가 140년 전에 던진 질문 "우리는 어떻게 민족적 특수성과 보편적 인간성 사이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중심 질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계속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은 정말 많이 알고 있다." 엘리엇의 지식은 고전문학, 역사, 철학, 성경학, 과학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이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다. 그녀에게 지식은 단순한 전시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도구다. 그녀가 테오프라스투스의 입을 빌려 말하듯, "지식은 누군가의 거실에 전시된 희귀 도자기처럼 소유만 하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책의 또 다른 독특한 매력은 문체에 있다. 엘리엇은 때로는 깊은 연민으로, 때로는 신랄한 비판으로, 그리고 때로는 세련된 유머로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그려낸다. 그녀의 문장은 빅토리아 시대의 복잡한 구문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통찰로 가득하다. "미덕을 자랑하는 것은 미덕 자체를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이런 문장을 읽을 때마다 책을 덮고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누군가는 물을 수 있다. "왜 140년 전의 에세이를 읽어야 하나?"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이 다루는 문제들이 여전히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책임, 지적 정직함과 도덕적 공감 사이의 균형, 자기 성찰의 어려움, 사회적 편견의 심리, 민족적 정체성과 보편적 인간성... 이런 문제들은 특정 시대나 문화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 조건의 근본적 질문들이다.
더 나아가,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 엘리엇이 19세기에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전환기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산업혁명, 다윈의 진화론, 성경 비평학의 출현으로 전통적 세계관이 흔들리던 때였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 기후 위기, 포스트 진실의 도전 앞에 서 있다. 두 시대 모두 기존의 확실성이 무너지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때다. 그녀가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를 어떻게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대응했는지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한국어 번역본의 특별한 가치는 엘리엇의 복잡한 문체와 풍부한 문화적 참조를 오늘날의 독자들이 접근하기 쉽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번역자는 원문의 의미와 뉘앙스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구성했다. 19세기 영국의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그 배경을 자연스럽게 설명하여 독자들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이 책에는 상세한 '작품 해설'과 '옮긴이의 말'이 포함되어 있어, 엘리엇의 사상과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옮긴이의 말'은 이 작품이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엘리엇의 마지막 작품 '테오프라스투스 수크의 인상'은 어쩌면 그녀의 모든 작품 중 가장 현대적인 책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 책에서 모든 장르적 제약을 벗어던지고,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그 결과물은 소설도, 전통적인 에세이도, 철학 논문도 아닌, 그녀만의 독특한 형식을 가진 텍스트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이런 장르 혼합과 실험에 더 익숙하며, 오히려 이런 자유로운 형식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은 위대한 작가의 지적, 정신적 여정의 정점을 목격하는 경험이다. 우리는 엘리엇이 평생 탐구해온 문제들에 대한 그녀의 최종적 견해를 만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가장 정직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테오프라스투스 수크와 함께하는 이 지적 여행은 단순한 독서 경험을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세상을 성찰하는 거울을 제공한다. 우리는 테오프라스투스의 눈을 통해 우리 주변의 인물들을 새롭게 보게 되고, 그의 고민을 통해 우리 자신의 지적, 도덕적 태도를 재검토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테오프라스투스 수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이 140년 된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값진 선물일 것이다.
* 이 책은 수익금의 일부를 어린이재단에 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