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세 김형석 교수의 친필 믿음 유산
“나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백년을 살기도 힘들지만 백년을 변치 않는 신앙으로 살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알려진 대로 저자는 어려서부터 병약했기에 청소년기를 넘기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열네 살에 했던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허락해 주시면, 그때부터는 내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라는 기도대로 104세인 지금까지 한결같이 하나님 일에 쓰임 받고 있다. 그는 신학자나 목회자가 되고 싶었지만 교회 밖에서 교육자, 철학자,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포도밭에서 최선을 다하면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사명감을 갖고 살았다. 저자는 “내 일생은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사회에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의 연속이자 주님과 함께하려는 노력의 연장이었다”고 고백한다. 요즘 영원한 안식으로의 부르심이 더욱 가까이 왔음을 느끼며, 신앙서적으로는 마지막 집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과 함께 살아오면서 체험했던 은총과 깨달음을 귀한 믿음의 유산으로 남겨주고 있다.
본문에서
60이 넘으면서부터는 누구보다도 일을 많이 했다. 오전에 미국에서 돌아온 날 쉬지도 않고 오후 강의에 임하기도 하고 일 년 동안에 한 일의 통계를 보면 나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내 건강의 기준은 같은 나이에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가에 있었다. ‘적당한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건강은 일을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다. 10여 년 전에 일산국립암센터 사람들을 위해 강연을 갔다. 그곳 박재갑 원장이 대장암 전문의였는데, 나에게 대장암 검사를 언제 받았느냐고 물었다. 아직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했더니 놀라는 표정이었다. -13~14쪽
나 자신이 겪어온 일들을 회상할 때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운명인가 하고 자문해본다. 아니다. 그러면 우연한 사건들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 사건들의 의미가 너무 중요하다. 내가 택한 자유의 결과였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다. 섭리는 은총의 체험에서 온다. 자연에는 법칙이 있고 우리 정신계에는 질서가 있듯이 신앙적 체험에는 은총의 질서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적이 아닌 은총의 체험을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17쪽
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보곤 한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는 크리스마스 때였다. 두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나와 함께해 주시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상하게 그때부터 나는 내 인생을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또 한 분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생각을 가졌다. 90년이 가까운 지금까지 그런 삶이 계속되었다. 예수가 내 믿음의 주인이 된 것이다. – 24쪽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던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겠다는 뜻을 단념했다. 평신도의 한 사람으로 철학을 계속하면서 교육자로 교회와 교회 밖의 하늘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새 꿈을 향한 출발이었다. 새로운 신앙의 길과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의 뜻이었다. 지금도 그 길을 계속 가고 있다. 그때의 변화가 새로운 신앙의 태어남이 되었다. – 27쪽
틸리히를 통해서는 더 깊이 있고 체계적인 인간의 철학적 신앙을 배우고 깨닫는 데 도움을 받았다. 니부어를 통해서는 현대 사회와 한국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 역사와 사회적 삶에 동참하지 못하는 신앙은 생명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조직신학의 대표라고 평가받고 있으나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신앙인으로서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 신학자는 모두 기독교가 지녀야 할 철학, 역사, 교리가 뿌리내리는 데 큰 학문적 역할을 담당했고, 나 같은 평신도로서는 막 중한 신앙적 암시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 37쪽
나에게는 오히려 신앙적 우정보다 학문적·사회적 우정을 나눈 친구가 더 많았고 그들이 더 소중했다. 기도로 통하는 빌립과 나다나엘의 우정에는 종교 사회라는 배경에서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염원이 있었다. 그에 비해 내가 친구들과 나눈 우정에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깊은 고민이 있었다. 물론 철학이나 윤리학이 전 인류적·세계적 보편성을 갖는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계와 인류보다 우리 사회와 민족이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찾아 누리는 것이 더 절박한 과제였다. – 41쪽
중요한 것은 기독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진리는 역사에서 희망의 빛을 증대시켜 왔다. 기독교의 종교성은 버림받았을지언정 그리스도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버림받은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휴머니즘을 탄생시켰고 그 근본이 되는 인간애의 정신은 어느 사회에서도 버림받아서는 안 되는 절대 가치이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교리와 교권이 아닌 인간애의 진리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적 가치를 초월한 인간의 가치와 역사의 희망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유대교의 민족 신앙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정의 그리고 인류의 희망을 위한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