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에 의해 잿더미로 변한 아메리칸 드림
폭력의 근저에 흐르는 인종적 딜레마의 본질을 꿰뚫는 책
*LA 타임스 도서상 수상*
월 스트리트 저널·시카고 트리뷴·릿허브 선정 올해의 책
한국계 미스터리 작가 스테프 차의 LA 타임스 도서상 수상작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가 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1992년의 ‘LA 폭동’과 그로부터 1년 전에 일어난 이른바 ‘두순자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로, 한인과 흑인 두 가정을 중심으로 현재 시점에서 벌어진 한 총격과 ‘LA 폭동’을 촉발한 사건들을 균형 있는 관점에서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스테프 차가 5년여의 작업 끝에 완성한 이 장편소설은 민감한 인종 갈등의 현실을 탁월하게 그려 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월 스트리트 저널》, 《시카고 트리뷴》 등 유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고, 이듬해 LA 타임스 도서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실화에 기반한 이 소설을 통해 인종 관련 이슈에 있어서 소외되었던 한인들의 삶을 조명한 저자는 최근 애틀랜타 총격과 관련한 《LA 타임스》 기고 글로 아시아인을 상대로 한 편견과 범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두순자 사건
1991년 3월, 코리아타운 인근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한국인 두순자가 오렌지주스를 사려던 열다섯 살의 흑인 소녀 라타샤를 강도로 오인하여 실랑이를 벌인 끝에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 ‘두순자 사건’으로 불리는 이것은 2주 앞서 벌어진 로드니 킹 사건(네 명의 백인 경찰이 검문 중이던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사건)에 이어 언론에 집중보도되면서 흑인 커뮤니티의 분노를 더욱 고조시켰다.
두 시대, 두 인종, 두 가족
한 발의 총성으로 깨어나는 도시의 암울한 역사
“로스앤젤레스, 여기가 그곳이어야 했다. 서부의 끝, 태양의 땅, 약속받은 곳. 이민자, 난민, 도망자, 개척자의 종착지.”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한인 여성 그레이스 박과 흑인 남성 숀 매슈스를 중심으로, 한 총격 사건에 얽힌 비극적 진실을 드러내면서 인종, 가족, 폭력, 용서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저자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로 2014년 경찰의 총격으로 18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사망한 사건과 이로 인해 벌어진 퍼거슨 소요 사태가 영향을 끼쳤음을 밝히기도 했다. 로드니 킹 사건 직후의 불안한 거리 풍경에 이어,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흑인 소년의 추모식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도입부는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인종 문제가 90년대 초 LA에서 벌어진 사건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렬하게 암시한다.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는 제목은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힙합 가수 토디 티(Toddy Tee)의 「Batterram」(1985) 가사에서 인용한 구절로, 이 노래는 당시 레이건 정부가 추진한 ‘마약과의 전쟁’에서 흑인과 라틴계 커뮤니티를 난폭하게 진압하던 공권력에 대한 비판이 담긴 곡이다. 작가는 모티브로 삼은 ‘두순자 사건’의 골자를 최대한 그대로 두되, 서로 갈등하는 흑인과 한인 커뮤니티에 속한 허구의 인물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을 생생하게 보여 줌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솜씨 있게 잇고, 인종 갈등을 부추기는 구조적 문제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남긴 깊은 상처를 선명하게 그려 냈다.
영원한 이방인, 한국계 이민 가정의 초상
비교적 최근까지도 미국의 인종 담론은 주로 흑백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90년대 초의 LA는 드물게도 한인들이 인종 문제의 중심에 서 있던 곳이었다. 스테프 차는 LA에서 성장했기에 흑인과 한인 커뮤니티 사이의 긴장을 어렴풋이 느끼기는 하였지만, ‘LA 폭동’ 전후에 벌어진 사건의 맥락에 대해서는 성인이 되어서야 알고 깊이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에는 그간 매체와 대중문화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거나 잘못 그려져 왔던 한국인 이민자의 삶이 세심하게 담겨 있다.
“그레이스와 부모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은 잡종 언어로, 가끔은 한 문장에서 여러 번 이 언어 저 언어로 바꿔 가며 말했지만, 그중 누구도 이중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진 못했다. 한국어는 그레이스의 모국어였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곧 잊어버렸다.”
“그레이스는 부모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임을 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갖기 전에도(그레이스에겐 늘 어렴풋하고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함께 일했고, 이본이 딸들을 키우는 동안 폴은 모든 시간을 다 투입해 돈을 벌었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이본은 어머니로서 열과 성을 다해 양육했다. 다른 분야라면 상도 여럿 탔을 것이다. 이제 그레이스가 약국 운영을 도우며 이민 1세대의 근로 윤리를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폴의 학위는 여기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이본에겐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본은 겨우 열아홉에 열 살 많은 폴과 결혼했다. 그가 바다 건너 타국으로 데려왔을 때 이본은 스물하나였고, 그 결정에 이본의 의견은 별로 영향이 없었을 거라고 그레이스는 추측했다.”
부모 세대와의 갈등, 장래에 대한 고민,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애착 등, 2세대 한인 여성인 그레이스 박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가족과 사회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으로 국내 독자의 시선을 끌어들이며 먼 나라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미국 미스터리계를 이끄는 소수의 아시아계 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 문화적 유산과 현재의 목소리를 작품 속에 담아 왔던 저자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줄거리
자기 집 마당에서 경찰의 의해 사망한 10대 흑인 소년 알폰소 쿠리얼을 기리는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는 LA. 한인 마켓에서 약사로 일하는 그레이스 박은 2년 전 돌연히 부모님과 연락을 두절한 언니 미리엄의 생일날,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쿠리얼에 대한 후속 보도를 지켜보며 기묘한 반응을 보이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여긴다. 한편, 한때 갱단에 소속되어 방황하였으나 개심하여 이삿짐센터에서 근무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던 숀은 강도 사건으로 수감된 사촌 레이를 대신해 남은 가족들을 돌보며 할러웨이 일가를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0년의 복역 끝에 출소한 레이는 다시 범죄에 손을 댈 것 같은 기미를 보이며 숀을 불안케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인 마켓에서 벌어진 한 피격 사건이 도시 전체를 공포에 몰아갔던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