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고 앙증맞고 깜찍한 오늘의 일본,보고, 먹고, 가볍게 즐기면서 새로운 한일 관계를 구상한다
『일본은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책으로 1990년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는 전여옥이 10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 대한 색다른 목소리를 낸다. 저자는 일본인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조용히 늙어가는 일본을 다시 꼼꼼히 돌아다닌 후 이 책을 집필했다.
밤기차를 타고 여행의 낭만을 즐기기도 하고, 식도락가의 미각으로 맛있기로 유명한 음식점을 뒤지기도 했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일본과 한국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열거해 보거나, 사람들로 가득 찬 백화점에서 일본 상업주의의 치열함에 허망함을 느끼기도 했다. 날선 비판이나 차가운 질타가 아닌, 이제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일본을 바라볼 수 있기에 다시 일본을 이야기한다.
2003년 현재의 일본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 남다르다
일본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감성이 살아 있다. 저자는 맛있는 음식, 멋있는 장소를 다니면서도 그 안에 녹아 있는 일본과 일본인의 특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작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 귀족적인 것을 선망하고 서양의 것을 좋아하면서도 어느 순간 일본인들은 자기중심주의와 자민족주의로 회귀한다는 것이다.저자의 이전 작품들에서는 일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었지만, 이번 원고에서는 편한 마음으로 일본 전체를 천천히 더듬고 있다. 일본의 음식문화, 놀이문화뿐만 아니라 현재 일본의 상태를 문화코드로 거론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저서와 차별성이 있으며, 저자의 시각이 이전과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가뿐한 마음으로 일본을 느낀다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소재는 다양하다. 일본 식당에서는 스시를 어떻게 주문해야 하는지, 여행에서 돌아올 때 가족들을 위한 선물로는 어떤 것이 좋은지부터 시작해서,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 상업주의가 집약된 테마 파크 오다이바, 갈수록 가벼워져만 가는 젊은이들의 성(性) 의식, 서양에 대한 지나친 동경 등등의 다소 무거운 주제도 다루고 있다.
지역을 중심으로 쓴 글도 있고, 소재 중심으로 쓴 글도 있다. 지역으로는 도쿄·삿포로·네무로·고베·후쿠오카·나가사키 등이, 소재로는 스시·맥주·라면·목욕탕·백화점 등을 이야기한다.
증오와 회의는 그만! 이젠 가볍게 즐겨라!
타고난 끼와 넘치는 열정으로 대한민국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저자가 색다른 시각으로 일본을 말한다. 일본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동안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수많은 일들과, ‘축소 지향’의 소박한 일본 사람들을 가볍고 경쾌한 시각으로 풀어나간다. 일본에서 맛본 소소한 즐거움을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귀엽고 앙증맞고 깜찍한, 그러면서도 기력 잃은 할머니처럼 조용히 늙어가는 일본, 일본인. 그들은 잃어버리고 만 지난 10년을 어떻게 기억할까? 저자는 “이제는 즐겨야 할 때”임을 강조한다. 증오와 회의의 시대는 지났다. 가까운 온천에 가서 한 삼 일 쉬었다 온다고 생각하고 일본으로 떠나보자. 그곳에는 역사 왜곡도 독도 분쟁도 북핵 비판도 체감하지 못하는 ‘순수한’ 일본인들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새롭게 쓴 일본 이야기 - <글을 시작하며> 중에서
『일본은 없다』를 쓴 뒤 많은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즐거운 일이 없었나요?”
너무도 많았다. 우에노 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밤을 새며 아오모리까지 간 적도 있었다. 새벽, 역 앞의 토스트 가게에서 맛본 뜨겁고 진한 커피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햇살이 따뜻하게 어깨에 내려앉던 가나자와 거리를 유치원생처럼 세상 걱정 없이 걸었던 순간도 잊지 못한다. 삿포로의 서늘한 바람이 옷 속까지 파고들 때, 얼린 잔에 마셨던 그 맥주의 시원함은 지금도 생생하다.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은 없었다.사적으로 경험한 일본인의 모습을`─.일본에서 맛본 소소한 즐거움을 쓸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본이 달라졌다.오늘 일본은?귀엽고 앙증맞고 깜찍하다.한편으로는 기력을 잃은 할머니처럼 조용히 늙어가고 있다. 내가 살았던 1990년대 초─ 강대국의 야망으로 탐욕을 부풀리기를 포기하지 않던 ‘일본은 없다.’ 지금 일본은 ‘어제의 일본’이 아니다. 그래서 편안하고 가볍게 일본에 대해 쓸 수 있었다.삿포로에서 한 잔의 맥주로 목을 축이던 그 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