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빵’을 위한 경제학
“그냥 굶어 죽을 것인가, 아니면 빵을 얻기 위해 공장에서 일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불안한 인간의 실존이 시장 자본주의 경제의 출발점이었다.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에 맞서 “빵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던 프랑스대혁명의 구호에서도 빵은 곧 생명을 뜻했다. 인간은 빵을 먹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빵에서도 의미를 찾아내 기쁨을 향해 나아가는 능동적 존재다. 빵을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가 빵을 앞에 놓고 대화를 하는 ‘관계의 기쁨’을 향유할 수 있어야 진정 부유한 것이다.
현재의 주류 경제학은 빵이 얼마만큼 효용과 만족을 줄 수 있느냐 하는 좁은 시야에 갇혀 있다. 새로운 경제학에서는 빵 속에 내재된 대화의 기능을 유효한 가치로 바꿀 수 있도록 인간의 역량을 기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1998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은, 홍수와 가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빈곤 국가를 분석한 뒤, 빵과 식량이 아무리 많아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독재국가에서는 부정부패와 정치적 혼란으로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빵이 아무리 많아도, 이를 골고루 나누는 민주주의가 서 있지 않으면 ‘빵을 통한 부’는 실현될 수 없다는 말이다.
존 러스킨의 ‘빵’
지금껏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빵을 재화로만 여겨왔다. 빵을 한입 물면 달콤하고 구수한 맛이 느껴지니, 쾌락과 만족의 정도를 나타내는 빵의 한계효용은 높을 수밖에 없다. 거기서 더 먹으면 아무리 맛있는 빵이라도 배가 불러서 한계효용은 줄어든다. 결국 질릴 정도가 되면 한계효용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 즉 비효용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것을 경제학에서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 부른다.
존 러스킨은 빵과 대화의 즐거움을 한 차원 높게 파고든다. 그에 따르면 빵이라는 재화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빵은 영양을 제공하는 기능을 갖는다. 물론 이때도 전제조건이 뒤따른다. 맛을 잘 느끼고 영양을 충분히 흡수하기 위해서는 건강 상태가 좋아야 한다. 둘째, 빵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우리는 식탁 위에 빵을 두고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처럼 빵을 ‘대화의 즐거움과 향유 능력’이라는 질적 차원에서 접근한 러스킨의 경제학 방법론은 독특하다. 빵 속에 간직된 고유가치는 잠재되어 있어서 고유가치를 끄집어내고 수용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가부장에 물든 아버지가 빵을 사와도, 자녀들이 그 빵만 들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상황에서 알 수 있다. 빵의 고유가치를 수용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를 모색하는 소셜 픽션
탐욕과 부패가 만연된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첨예한 가운데, 저자는 ‘빵’으로 상징되는 생명을 화두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역사와 문학, 사상과 철학, 과학까지 아우르며 인류가 거쳐온 경제사상의 다양한 모습을 살핀다. 그 면면은 카뮈나 톨스토이 같은 문학가, 칼 폴라니나 존 러스킨 같은 사상가, 햄릿과 로빈슨 크루소 같은 문학 속 인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 애덤 스미스와 소스타인 베블런, 존 메이너드 케인스, 헨리 조지, 프랑수아 케네, 아마르티아 센, 토마 피케티 같은 경제학자를 넘나든다. 심지어는 양자역학을 통해 호혜와 증여의 경제를 논하기도 한다.
이 모색은 과거의 경제사상을 살피고 오늘날 취해야 할 핵심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넘어, 소셜 픽션을 통해 미래 경제사상의 모습을 그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소셜 픽션은 사회에 대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대로 상상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는 기획 방법이다. 단순한 공상이나 예측과 달리 소셜 픽션에는 의지가 담긴다. 자본주의의 고질병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스템으로 가야 하는 이 시기에, 자본주의적 인간의 내면을 성찰해, 스스로를 윤리적으로 회복하고, 자유분방한 사회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경제체제를 떠올릴 때만이 가능하다. 이 책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염원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사회적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그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기를 권한다.
책속으로 추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제목은 성경의 포도밭 우화에서 따온 것이다. 성경에서 천국으로 비유되는, 포도밭의 하루 일과가 끝나고 주인이 임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오후 늦게부터 일하기 시작한 사람에게도 동일한 임금을 주자,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을 했다. “아니! 저 사람은 아까 해질 무렵에야 겨우 농장에 와서 일한 사람인데 왜 저와 똑같이 1데나리온(로마시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일당으로 주는 겁니까? 일찍 와서 일한 저희가 더 받을 줄 알았는데요?” 그 사람을 향해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이 말은 종교적으로 늦게 예수를 믿거나 임종 전이라도 하나님에 귀의한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해석된다. 사회경제적 차원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기본 생활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일찍 와서 일한 사람이나 해질 무렵에야 겨우 삽을 잡은 사람에게 하루의 품삯을 똑같이 주는 것은 불평등하다. 노동 단위의 생산성에 따라 임금을 지불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러스킨은 더 커다란 부와 풍요를 위해서는‘나중에 온 사람’의 기본 생존권마저 보장해줄 수 있는, ‘가치 배분이 조화로운 사회’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오늘날에 되살아난 ‘생명 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