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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인문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

소장전자책 정가9,800
판매가9,800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 표지 이미지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작품 소개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사후인 1568년에야 완간된 예언서 [백시선]은 전10부(원래 구상은 12부까지였다고 한다)로 이루어졌으며, 각 부마다 100편(7부는 42편까지만 있다)의 4행시가 수록되어 있다(원제인 프랑스어 Centuries를 영어식으로 읽어서 “(모든) 세기들”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책이 1555년부터 3797년까지의 역사적 사건과 대규모 재난(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등등)을 예언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워낙 모호한 내용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의미를 둘러싸고 해석이 엇갈린다.

[백시선]에 수록된 예언 자체는 모호하지만, 그 서문 격으로 수록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예언시를 쓰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외부적인 힘 (…) 돌발적인 흥분을 통해 천상계의 인과 관계가 나에게 공표된다. 하지만 신성한 영감이 없다면 목적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얻지 못한다. 모든 권위 있는 예언은 먼저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유래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좋은 조건에서, 마지막으로 천성적인 소질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자신의 신비스러운 예언 능력을 어디까지나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영감이라고 설명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는 성서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은 과학적이고 엄밀한 점성학의 연구를 통해 그 비밀을 살짝 엿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밤에 홀로 / 비밀 서재의 청동 제단에 편히 앉아 있노라 / 잔잔한 고독의 불길로부터 /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노라.” (제1부 1편)

노스트라다무스는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심지어 프로방스 사투리까지 뒤섞어서 4행시를 썼으며, 그 순서조차도 뒤섞어 놓았다고 전한다. “공동의 선을 위해 내가 본 대변혁의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글로 적어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나는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글을 서술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평이한 문장이 아닌 난해하고 왜곡시킨 문장을 썼다.” 이런 의도적인 난해성은 아마도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고대로부터 신탁이나 예언은 그 모호성으로 악명이 높았다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침공하기 전에 신탁을 묻고 이런 답변을 얻었다. “너는 강력한 왕국을 멸망시키리라.” 이에 용기백배한 크로이소스는 전쟁을 벌였다가 대패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강력한 왕국, 즉 리디아를 멸망시킨 셈이 되었다. 이처럼 예언은 양면성과 다의성을 지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 즉 예언을 해석하기 어렵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의 교훈이었다.


저자 소개

‘노스트라다무스’라는 라틴어식 이름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의사 겸 점성가의 본명은 ‘미셸 드 노스트르담’이다(이 글에서는 편의상 ‘노스트라다무스’로 통칭했다.) 그는 1503년 12월 14일에 프랑스 남부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유대인 가문(훗날 가톨릭으로 개종)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공증인이었기 때문에 집안은 유복한 편이었으며, 친가와 외가 모두 할아버지가 저명한 의사였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린 시절에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로부터 고전과 역사는 물론이고 의학과 점성학의 기본 지식도 물려받았다고 전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4세 때인 1517년에 아비뇽에 있는 학교에 들어가서 인문 교육을 받았고, 19세 때인 1522년에 몽펠리에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525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의사로 일했고, 1529년에 다시 몽펠리에 의과대학으로 돌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이와는 반대로 대학에서 퇴학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1534년에 그는 마르세유 인근 아장이라는 도시에 정착해서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지만, 1537년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아내와 자녀가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처가에서 사망한 부인의 지참금 반환 소송을 걸고, 심지어 종교재판소까지도 불경죄로 소환 명령을 내리는 등의 악재가 계속되자, 결국 노스트라다무스는 아장을 떠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각지로 떠돌면서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543년에 그는 살롱 드 프로방스라는 도시에 정착하고 재혼했으며, 머지않아 여러 권의 역서(曆書)와 실용서(화장과 식품 제조에 관한 내용)의 저자로 난생 처음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52세 때인 1555년에는 예언서인 [백시선]의 초판본(1-3부)을 간행했다.

이때부터 노스트라다무스는 점성가로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556년 여름에 파리를 방문하여 당시의 국왕 앙리 2세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 부부를 알현했다. 살롱으로 돌아온 노스트라다무스는 [백시선]의 집필을 계속했는데, 1559년에 앙리 2세가 마상시합에서 부상을 입고 뜻하지 않게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급기야 이 사건이 그의 예언서에 나온 4행시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노스트라다무스의 탁월한 예언 능력에 대한 명성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1564년에 노스트라다무스는 새로운 국왕 샤를 9세의 시의 겸 고문으로 임명되어 각종 특권을 누리는 몸이 되었다. 2년 뒤에 노스트라다무스는 국왕의 밀사로 출장을 다녀오다가 통풍을 앓게 되었고, 이 질환이 점차 심해진 끝에 1566년 7월 2일 새벽, 63세를 일기로 살롱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내는 이런 비문을 지었다. “여기 그 유명한 미셸 노스트라담의 유해가 묻혀 있다. 모든 인간의 펜 중에서 오직 그의 성스러운 펜만이 미래에 이루어질 전 세계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영광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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