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의 단편이다. 유령 선집 등 지금까지 영어권 호러 앤솔로지에 빈번하게 수록되고 있다. 상당히 위협적인 유령 남매(수녀인 여동생이 치명적인)가 등장하는데 비해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책 속에서>
“잭, 어디로 가는지 말 안했잖아.”
“아, 웨스턴셔에 가서 헨더슨과 지낼까 해. 그 친구가 꿩 사냥하기에 그만인 집 한 채를 일 년간 임대했대. 일곱 명이 갈 거야. 모두 미혼이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해. 하루 종일 사냥하고 밤에는 잡담이나 하면서 보내려고. 친구, 베네딕(셰익스피어의 『헛소동』에 등장하는 인물로 오랜 독신주의를 버리고 결혼한 남자—옮긴이)이 되는 바람에 네가 무엇을 잃었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야!”
“웨스턴셔?” 내가 물었다. “웨스턴셔 어딘데? 마을이랑 집 주인 이름이 뭐야? 내가 바로 웨스턴셔 출신이니까 그 지역은 훤히 꿰고 있어.”
“가만, 무너져가는 낡은 집이라던데, 아마.” 잭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밖에는 박공이랑 구부러진 굴뚝이 있고, 안에는 다리가 가늘고 긴, 왜 있잖아, 불편한 가구들 그런 게 있다는 군. 하지만 핸더슨 말이 사냥에는 최적이래. 그래서 우리는 불편한 걸 견디기로 한 거야. 핸더슨이 프랑스인 요리사를 데려올 거고 술도 많다니까 굶어죽을 염려는 없잖아.”
“그러니까 거기 이름이 뭐냐고?”
내가 점점 호기심이 동해서 끈질기게 물었다.
“가만 있자.”
잭이 호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아, 여기 있네. 발리 그랜지.”
“발리 그랜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 말을 되뇌었다.
“허허, 거긴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는데.”
“그럴 거야.” 잭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사냥터를 따로 세 놓나봐. 하지만 핸더슨은 그 집에 환상을 품고 있어. 그곳의 가구나 뭐 그런 게 다 자기랑 맞을 거라나 뭐라나. 프레드,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날 보는 거냐?”
“잭, 부탁인데 거기 가지 마라.”
내가 잭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가지 말라니! 허, 프레드, 너 미친 게로군! 대체 왜 가지 말라는 건데?”
“여러 얘기가 있어. 그 집에 관한 거북한 일들.” 나는 더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령 들린 곳이야.”
나는 그를 못 가게 하려는 나 자신이 참 나약하고 유치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나는 발리 그랜지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옮긴이 정진영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상상에서는 고딕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잿빛의 종말론적 색채를 좋아하나 현실에서는 하루하루 장밋빛 꿈을 꾸면서 살고 있다. 고전 문학 특히 장르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기획과 번역을 통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도 소개하려고 노력 중이다. 스티븐 킹의 『그것』, 『러브크래프트 전집』, 『검은 수녀들』, 『잭 더 리퍼 연대기』, 『광기를 비추는 등대 라이트하우스』, 『코난 도일 호러 걸작선』, 『죽이는 로맨스』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