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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나혜석 : 근대문학의 길을 걷다 상세페이지

소설 한국소설

신여성 나혜석 : 근대문학의 길을 걷다

정희,모 된 감상기,이혼 고백서
소장종이책 정가4,500
전자책 정가4,500
판매가4,500
신여성 나혜석 : 근대문학의 길을 걷다 표지 이미지

신여성 나혜석 : 근대문학의 길을 걷다작품 소개

<신여성 나혜석 : 근대문학의 길을 걷다> 신여성이란 일제 강점기에 신식 교육을 받거나 개화 문명에 영향을 받은 여성을 이르던 말로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추구하는 존재로 등장하였다.
아울러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고 기존의 결혼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하였으며 다양하고 뜨거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조선의 가부장제가 결합한 억압된 시대 속에서 신여성들은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였을까?
칼 대신 펜을 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한 여성의 기록 속 그들의 서사를 통해 현재의 나와 우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책을 엮게 되었다.

신여성 시리즈, 근대문학의 길을 걷다.

화가이자 작가,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주의자로 불꽃 같은 인생을 살다 간 <나혜석>.
그의 작품 중, 그의 이야기를 가장 잘 표현하고 사회적 억압에 대항하는 그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소설 「경희」, 산문 「모된 감상기」와 「이혼 고백서」를 엮었다.

그의 삶을 통해, 그의 소설을 통해 과거 일궈놓은 흔적을 쫓아 과거를 새롭게 읽음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글로 기록했다. '글을 읽고 쓰는 욕망을 포기하지 말자.' 그들의 삶과 글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저자 프로필

나혜석

  • 국적 대한민국
  • 출생-사망 1896년 4월 28일 - 1948년 12월 10일
  • 학력 1918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
  • 경력 1923년 고려미술회 설립
    1918년 정신여자중고등학교 미술교사
    1918년 영생중학교 교사
  • 수상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3등

2015.02.10.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기의 관료 나기정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오빠 나기석의 권유로 한국 여성 최초로 도쿄시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하였다.
1914년 19세 때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며 문학계에 등장하였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약혼자였던 애인 최승구마저 결핵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진명여학교에서 잠깐 교편생활을 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조직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5개월 정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인 1920년 25세에 적극적으로 청혼하던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그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1921년 만삭의 몸으로 국내 최초로 경성에서 유화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첫째 딸이 탄생하면서 남편이 중국의 만주(滿洲)로 부임하게 되어 이주하게 되었으나, 1922년에서 1926년까지 계속해서 조선미술 전람회에 그림을 출품하였다. 1923년에는 모성 신화를 부정하는 논설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하고, 1927년 만주에서 돌아와 부산의 시집에서 지내다가 유럽과 미국 시찰을 하러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歐美)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29년 1년 8개월의 구미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35세에 넷째 아이를 낳았지만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돌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이혼하였다.
1931년 나혜석의 그림 「정원」이 조선미술 전람회와 일본의 제국미술 전람회에 연이어 입상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운다. 입상을 계기로 나혜석은 재기한다. 금강산에 머무르며 30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머물던 집에 불이 나 작품 대부분을 잃고 만다.
1934년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여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혼 후 힘들어하던 나혜석을 나 몰라라 하며 떠난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1937년 42세에 충남 예산의 수석사 밑 수덕여관에 기거하다 1944년 수덕사를 떠나 전국의 사찰들을 순례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작품 활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파킨슨병과 관절염, 중풍, 우울증은 계속 악화하였고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안양 양로원을 거쳐 인왕산 근처 청운 양로원에 기거하다 퇴소하고 1945년 안양의 경성기독보육원의 농장으로 옮겨졌다.
1948년 12월 10일, 53세의 나혜석은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보육원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헤매다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병사한 것으로, 죽기 직전 여러 질병으로 대화가 어려웠기에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처리되고 말았다.

목차

작가소개
생애
작품
머리말
경희. 1918
모(母) 된 감상기. 1923
이혼고백서. 1934
1. 이혼 후
2. 어디로 향할까
3. 모성애
4. 금욕생활
5. 이혼 후 소감
6. 조선 사회의 안심
7. 청구 씨에게
주석
맺음말
판권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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