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먼 환상문학 단편선 : 남서향 방 · 장미 덤불에 부는 바람 · 벽 그림자 · 길 잃은 유령 · 빈터 · 복도 맨 끝 방
작품 정보
손꼽히는 고딕 작가이자 초기 페미니스트로서 재조명되는 메리 E. 윌킨스 프리먼의 단편 6편을 수록했다.
「남서향 방」 「루엘라 밀러」는 사이킥 뱀파이어, 「장미 덤불에 부는 바람」과 이번에 소개하는 「남서향 방」은 유령 단편이다. 이 단편들은 뛰어난 고딕 소설로 꼽히는데, 프리먼은 집이나 방 같은 특정 공간에 여성을 배치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결합하는 방식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미혼인 소피아와 아만다 자매 그리고 이들의 조카 플로라는 뜻하지 않게 대저택을 상속받는다. 이들은 대저택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숙을 치고, 네 번째 하숙인을 맞이할 준비에 한창이다. 조상대대로 살아온 이 저택은 유서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곳이다. 새로 하숙을 놓은 남서향 방은 최근에 자매의 이모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이 저택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방이다. 그런데 이 남서향 방에 하숙인을 들이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장미 덤불에 부는 바람」 영어권 앤솔로지에 자주 실리는 고딕 유령 단편이다. 레베카 플린트는 조카를 데려가기 위하여 먼 길을 찾아온다. 죽은 언니의 딸 아그네스는 열여섯 살 소녀로 아버지 존 덴트마저 여의고 의붓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레베카는 언니가 죽고 얼마 뒤 재혼한 형부마저 세상을 떠났지만 그동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조카를 보러오지 못했다. 그런데 마을에 도착해보니 레베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묘한 분위기다. 모두가 알고 레베카만 모르는 비밀. 그 비밀을 끝까지 은폐하려는 존 덴트 부인 즉 아그네스의 계모. 그 비밀을 알려주려는 초자연적인 장미 덤불의 바람…….
「벽 그림자」 프리먼이 대표적인 고딕 작가지만 부드러움과 밋밋함의 경계에서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다. 고딕소설이 피 튀기는 호러와는 거리가 있지만(또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지만) 이런 점을 감안해도 프리먼의 유령들은 퍽 온건하다. 이번에 소개하는 「벽 그림자」는 프리먼의 유순한 유령 중에서는 공포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간 그림자(들)를 보여준다. 글린 가의 2남 3녀 형제 중에서 막내 에드워드가 갑자기 죽는다. 남자형제 즉 헨리와 에드워드가 격한 말다툼을 주고받은 직후에 생긴 일. 세 자매는 에드워드의 죽음에 헨리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헨리가 과연 어디까지 관여되어 있는지 가늠해보면서 공포감에 휩싸인다. 이 공포감은 벽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로 극대화된다.
「길 잃은 유령」 호러 장르에 들어온 유령이 공포가 아닌 다른 감정을 더 돋운다면? 프리먼의 유령들은 슬픔, 난처함 같은 감정을 더 강하게 일으킨다. 이번에 소개하는 「길 잃은 유령」에선 슬픔이 주된 감정이다. 아동 학대의 피해가 의심되는 여자아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 어린 유령은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안쓰러운 행색과 목소리로 엄마를 찾는다. 집과 방이라는 공간, 사회적 약자인 등장인물(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과 힘없는 아이), 등장인물들이 모이는 방식인 하숙 그리고 초자연적 현상. 프리먼 특유의 요소들이 잘 짜여있는 단편이다.
「빈터」 뉴잉글랜드의 색채를 생생한 필치로 전달하는 프리먼답게 이번에도 타운센드 집안을 중심으로 기묘하고도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고딕 소설의 분위기에 녹여낸다. 타운센드 가족은 이상하리만큼 좋은 조건으로 보스턴에서 저택을 구입한 후 그곳으로 이주한다.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벌어지는 특정 공간으로 프리먼이 이번에 선택한 곳은 빈터다. 고딕 소설의 분위기를 잘 살린 반면, 사건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backstory)는 다소 갑작스럽고 작위적이어서 아쉽다.
「복도 맨 끝 방」 프리먼의 단편 중에서 최근에 가장 많이 재조명되는 작품 중에 하나. 화자의 심리에서 억압을 읽어내는 페미니즘 시각이 그 일례다. 초자연성에 심리 묘사를 효과적으로 입혔다는 평을 받는다. 월세나 하숙비가 가장 저렴한 복도 맨 끝 방에서 살아오면서 스스로 실패자라고 푸념하는 화자. 이번에는 건강을 위해 광천수가 나는 마을에 하숙을 구하지만 역시나 (더구나) 3층의 복도 맨 끝 방이다. 이곳에서 화자는 밤마다 기이한 경험을 하다가 감쪽같이 실종된다. 화자에게 하루에 하나의 감각만 허용되는 과정은 감각을 차단하거나 방해하는 최근의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버드 박스」 등을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