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크래프트 서클”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군의 작가와 그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려는 시도입니다. 『황의를 입은 왕』의 「가면」은 앞선 「명예 수선공」의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면서 자칫 독립된 에피소드가 줄 수 있는 괴리감을 줄여주죠. 천재 조각가 보리스 이뱅이 바로 이 연결고리가 되기도 합니다. 보리스는 살아있는 생물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석화시키는 특이한 용액을 발견합니다. 체임버스는 이 SF의 경계에서 멈춰 서서 로맨스와 호러의 두루마리를 펼쳐놓는데요. 작가의 한계를 벗어난, 번잡하거나 시시한 전개를 차단하려는 시도 같습니다. 이로써 체임버스는 잔잔해 보일 정도로 자연스러운 로맨스의 파도에 위태로운 광기(이 작품에선 환각이 더 어울릴 듯한)의 공포를 띄웁니다. 그것도 언제 난파될지 모르는 (그러나 등장인물도 독자도 로맨스에 취해 그 취약성을 깨닫지 못하는) 연약한 종이배에 실어서 말이죠. 체임버스가 호러를 향해가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운명의 여신상 연작을 조각해온 천재 조각가 보리스…… 보리스의 때 이른 자살 때문인지 아니면 운명의 속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읽고 나서도 말이죠. <책 속에서> 나는 화학에 문외한이긴 하나 그래도 넋을 잃고 들었다. 그는 주느비에브가 그날 아침 노트르담에서 사온 부활절 장식용 백합을 대야에 떨어뜨렸다. 그 즉시 액체는 투명하고 맑은 특징을 잃어버렸다. 잠시 동안 백합은 유백색 거품에 뒤덮여 있었는데, 이 거품은 유동적인 유백광을 남겨놓고 사라져버렸다. 표면에 오렌지색과 심홍색으로 변하는 색조가 나타난데 이어서 백합이 놓여 있는 바닥으로부터 햇빛의 광선 같은 것이 솟구쳤다. 그 순간 그는 대야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꽃을 빼냈다. “위험하지 않아.” 그는 설명했다. “적절한 순간을 선택하기만 하면 말이지. 그 황금빛 광선이 신호야.” 그는 백합을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돌 그러니까 순수한 대리석으로 변해 있었다. “봐.” 그는 말했다. “흠 하나 없이 완벽하잖아. 어떤 조각가가 그렇게 재현해낼 수 있겠어?” 지은이 로버트 W. 체임버스 미국의 작가.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체임버스는 명문가의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고, 훗날 동생인 월터 체임버스(Walter Boughton Chambers) 또한 유명한 건축가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브루클린 공과대학을 거쳐 스무 살 무렵 예술학생연맹(The Art Students' League)에 입학했다. 계속해서 1886년부터 1893년까지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와 아카데미 줄리앙(Academie Julian)에서 공부하고 작품을 전시했다. 1893년에 뉴욕으로 돌아온 뒤, 《라이프》, 《보그》 등의 잡지에 삽화를 팔기 시작했다. 체임버스는 1894년에 파리의 카르티에 라탱(라틴지구)을 무대로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라탱지구에서』라는 멜로물을 익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의 성공에 힘입어 1895년에 매우 독특하고도 강렬한 호러 단편집 『황의를 입은 왕』을 출간했다. 『황의를 입은 왕』은 체임버스가 그림을 포기하고 작가의 길을 걷게 만든 일대 전환점이었다. 이후 체임버스는 판타지와 역사 소설 그리고 로맨스를 넘나들면서 작품들을 양산해냈다. 『붉은 공화국』(1895), 『문 메이커The Maker of Moons』(1896), 역시 단편집 『선택의 미스터리』(1897), 『제국의 유해』(1898), 『카디건Cardigan』(1901)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함께 그림을 공부했던 친구 깁슨(일명 ‘깁슨 걸’의 창시자로 알려진 찰스 데이나 깁슨Charles Dana Gibson)이 체임버스의 작품에 삽화를 그리면서 ‘보는 재미’까지 곁들여졌고, 체임버스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드는데 톡톡히 한몫했다. 글쓰기와 여가 생활 그리고 사교계 활동까지 안락하고 분주한 삶을 살며 체임버스는 역사와 로맨스에서 종종 호러로 회귀하는데, 미스터리와 액션을 혼합한 『미지를 찾아서』(1904)와 『영혼의 살해자』(1920)가 대표적이다. 전자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희귀 동물을 찾아 나선 동물학자의 이야기고, 후자는 오컬트 스릴러다. 1924년 이후에도 체임버스는 역사적인 주제에 집중하지만, 이미 변화된 독서시장에서 그의 독자층 상당수가 이탈한 후였다. 1933년 복부 수술을 받은 뒤 사망할 때까지 “쉽고 유능하지만 평단에서는 시시하게 평가하는, 그래도 여전히 많은 잡지들이 높은 고료를 주고 사려는” 글을 계속 집필하였다. 체임버스의 작품은 작가 생전에 14편이 영화화되었다. 특히 화가와 그림 모델 간의 사랑을 주제로 결혼 문제를 다룬 『불문율The Common Law』(1911)은 세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옮긴이 정진영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상상에서는 고딕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잿빛의 종말론적 색채를 좋아하나 현실에서는 하루하루 장밋빛 꿈을 꾸면서 살고 있다. 고전 문학 특히 장르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기획과 번역을 통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도 소개하려고 노력 중이다. 스티븐 킹의 『그것』, 『러브크래프트 전집』, 『좀비 연대기』, 『잭 더 리퍼 연대기』, 『코난 도일 호러 걸작선』, 『죽이는 로맨스』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