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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상세페이지

소설 한국소설

감자

소장전자책 정가3,000
판매가3,000
감자 표지 이미지

감자작품 소개

<감자> 개설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1월호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작품 중 환경적 요인이 인간 내면의 도덕적 본질을 타락시킨다는 자연주의적인 색채가 가장 잘 드러난 대표작이다.

내용
복녀는 가난하기는 해도 정직한 농가에서 바르게 자라난 처녀였다. 그러나 돈에 팔려서 만난 게으른 남편 때문에 극빈에 시달리고, 결국 빈민층이 사는 칠성문 밖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거지행각과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갔으나 그것도 한계점에 달한다. 어느날 평양부에서 실시한 송충이 잡는 일에 참여했다가 감독의 유혹에 빠져 일 안 하고 돈버는 법을 알게 된다.
그 뒤 복녀는 동네거지를 상대로 적극적인 매춘을 하고, 마침내 감자를 훔치다가 들켜서 감자주인인 중국인 왕서방과 공공연한 매음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왕서방이 다른 처녀와 혼인하게 되자 복녀는 질투심 때문에 낫을 들고 쳐들어갔다가 오히려 왕서방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의의와 평가
이 이야기는 환경에 의해 타락해가는 복녀의 일생을 시종 냉엄한 객관자의 시점으로 조명하고 있다. 특히 결말부분에서 복녀의 시체를 놓고 왕서방과 한의사와 복녀의 남편 사이의 금전거래 장면을 냉철하게 부각함으로써 비정한 인심을 객관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작자가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냉철한 문체, 간결하고 직선적인 짜임, 장면묘사 및 대화의 적절한 삽입 등 단편으로서 완벽한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나라 근대 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룩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식민지사회의 빈궁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빈궁의 원인을 남편 개인의 천성적 게으름으로 파악한 것이라든가, 도덕의식의 변모에 결정적 계기가 된 송충이잡이 감독과의 매음에서 복녀의 갈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점 등 현실인식의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고, 인물·행위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지는 한계이다.


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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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프로필

김동인

  • 국적 대한민국
  • 출생-사망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
  • 학력 가와바타 미술학교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
  • 경력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조선일보 학예부장
    1919년 동인지 '창조' 창간
  • 데뷔 1919년 소설 `약한 자의 슬픔`

2016.10.21.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출생 연도: 1900년 10월 2일사망 연도: 1951년 1월 5일본관: 전주(全州)출생지: 평안남도 평양1912년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를 졸업했고, 같은 해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했으나 1913년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학원[東京學院]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어 1915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부친상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같은 해 9월 가와바타화숙[川端畵塾]에 입학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인 『창조(創造)』를 자비로 간행했다. 창간호에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발표했다. 같은 달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朝鮮留學生學友會)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해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동생 김동평(金東平)의 부탁으로 격문을 기초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6월 26일 풀려났다. 1923년에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판하고, 1924년 8월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靈臺)』를 간행해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 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사 학예부에 근무했고,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월간 『야담(野談)』지를 발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광화사(狂畵師)」를 발표했다.1938년 2월 4일자 『매일신보』에 산문 「국기」를 쓰며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부터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1939년 4월부터 5월까지 ‘북지(北支) 황군(皇軍) 위문 문단 사절’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1월 23일자 『매일신보』에「감격과 긴장」을 통해 태평양전쟁을 지지했으나, 같은 해 일본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호칭했다가 7월 불경죄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43년 4월 출범한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輔國會)에 참가해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병의 입영이 시작되자 같은 해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반도 민중의 황민화」를 연재했다. 1945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매일신보』에 「전시생활 수감」을 게재했다. 이 밖에 잡지 『조광(朝光)』, 『신시대』 등에 친일소설 및 산문을 여러 편 남겼다.광복 이후 1946년 1월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을 주선했고, 1947년 3월 『백민』에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문단 30년의 자취」 등을 게재했다. 1949년 7월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 하왕십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작품 「배따라기」(1921)로 확고한 문명(文名)을 얻었고,「감자」(1925)·「광염(狂炎)소나타」(1929)·「발가락이 닮았다」(1932)·「붉은 산」(1932)·「김연실전(金姸實傳)」(1939) 등 수많은 단편을 발표해 한국 근대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했다. 대표적인 역사소설로는 「젊은 그들」(1929)·「운현궁(雲峴宮)의 봄」(1933)·「대수양(大首陽)」(1941) 등이 있다. 평론으로는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評者的價値)」를 비롯해 「조선근대소설고(朝鮮近代小說考)」(1929)·「춘원연구(春園硏究)」(1934·1935) 등이 있다. 그 밖에 「목숨」(1921)·「정희」·「시골 황서방」(1925)·「송동이」(1929)·「반역자(反逆者)」(1946) 등의 단편과 「여인(女人)」(1930)·「왕부(王府)의 낙조(落照)」(1935)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1955년 『사상계』가 동인문학상을 제정해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으며,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다. 사후 1964년 『동인전집』 전 10권과 1976년 『김동인전집』 전 7권 간행되었다.

목차

저자소개
작품소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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