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누런 벽지」와 논픽션 『여성과 경제』로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된 여성운동의 초기 이론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보다는 휴머니스트로 규정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다는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이다. 그런데 「누런 벽지」는 그 강렬함 때문에 오히려 작가의 다른 단편들이 가려지고 저평가되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길먼의 고딕 고설 단편선에는 대표작 「누런 벽지」를 포함하여 그 그늘에 가려졌지만 고딕 작가로도 손색이 없는 단편 4편을 수록한다. 「누런 벽지」 페미니스트를 위한 선언문, 정신의학자와 심리학자를 위한 흥미로운 관찰일지, 독자를 위한 서프라이즈 선물. 다양한 시각과 해석으로 읽어내다가도 한길로 도달하는 감정의 강렬한 촉발. 「누런 벽지」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재조명되면서 작가에게 1970~80년대 컬트적 지위를 선사한 단편이다. 일인칭 화자 “나”에겐 막 출산한 사랑스러운 아이와 다정다감한 남편이 있다. 의사인 남편은 우울장애를 겪는 내게 전문적인 치료와 보살핌을 주고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게 할 정도로 지극정성이다. 오로지 나 하나를 위해서 여름 동안 휴양차 시골 저택을 빌릴 정도. 그런데 이 저택에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혐오스러운 누런 벽지의 방이 있다. 나는 남편의 보호과 처방 아래 서서히 이 방에 고립되고 정신적으로 붕괴되어 간다. 실제로 심각한 산후우울증을 겪었다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녹인 작품. <책 속에서> 존과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여름을 지내겠다고 대물림된 저택을 얻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식민지 풍의 대저택, 세습지. 나는 유령이 출몰하는 으스스한 집이겠거니, 낭만적인 행복의 절정을 맛보겠거니 했지만 그런 운을 바라는 건 내게 너무 과하지! 그래도 나는 그 저택 주변에 기이한 것이 있다고 자랑스레 말하련다. 그게 아니라면 왜 그리도 싸게 세를 놓았을까? 게다가 왜 그리도 오랫동안 집이 비어있었을까? 물론 존은 나를 비웃지만, 그건 결혼 생활에서 으레 있는 일이다. 존은 지극히 실용적인 사람이다. 신앙이니 미신에 대한 강한 공포니 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 않고 숫자화 되지 않는 것들을 얘기하면 대놓고 비아냥거린다. 존은 의사다. 어쩌면, (나는 물론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겠지만, 이것은 죽은 종이이니 적잖이 안도가 된다), 어쩌면 그게 내가 빨리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지 싶다. 그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니까!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 지체 높은 의사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 일시적인 신경쇠약―경미한 히스테리성 신경쇠약―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친구와 친척들에게 장담한다면, 무슨 도리가 있겠나? 역시나 지체 높은 의사인 내 오빠도 남편과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인산염 혹은 아인산염―그게 무엇이든 무슨 상관인가?―강장제를 먹고 여행을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운동을 하고 있다.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일’은 절대 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