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대학 강의 경력에 정점을 찍는 사건은 수강생들 사이에서 <원춤>이라고 불리는 교양 과목을 맡은 일이 아닐까 한다.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대학생 대상으로 새로운 교양 화학 과목을 개설해야 하는데, 정해진 강의 제목 때문인지 쉽게 강사를 구할 수 없어 한 학기라도 시범적으로 학장이 직접 맡아보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전공으로 화학을 가르치다 보면 전공 지식과 관련된 주변의 인물이나 사건, 당시의 사회상이나 문화에 관심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자 본인이 직접 그런 교양 수업을 맡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던 터라, 강의를 부탁하신 도정일 대학장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 년에 한 번씩 강의를 해온 지 어언 십 년이 넘었다.
<원춤> 과목의 정식 이름은 <원자의 춤>으로, 강의를 맡은 필자도 과목 이름이 너무 튄다고 생각한다. 강의를 처음 맡았던 때부터 지금까지도 매 학기 원자들과 어떤 춤을 추어야 할지 고민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대학에서 이공계 전공기초로 개설하는 <일반화학>, <화학 개론> 같은 구성은 피하라는 것이 대학장님의 주문이었다. 생활 속 여러 화학 현상이나 화합물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생활 속 화학> 수업도 가능하지만, 이미 좋은 교재와 강의가 많이 개설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화학의 역사와 화학자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과학사나 과학자 인물론은 비전공자인 필자에게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 고민 과정에서 비전공자와 일반인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는 화학이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그 내용을 당시 상황과 함께 드라마처럼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교양 화학 강의는 대학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고등학교 특강, 입시 설명회, 유튜브나 팟캐스트에 다양한 수준의 일반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가 꽤 많다. 초롱초롱한 고등학생들에게 <원춤>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꽤 반응이 좋았다. 대학 신입생은 또 어떤가? 입시제도 때문인지 몰라도 화학에 대한 재미나 흥미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청중의 반대편에는 화장품과 의약품을 개발하고, 배터리와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가지고 화학 관련 학과에 진학했다가 막상 대학교 화학과 커리큘럼에 싫증을 내는 신입생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화학의 단편을 보지 말고, 전체를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과목이나 강의가 필요해 보였다.
원자의 양자역학적 불확실성이나 통계역학적 앙상블 개념의 비유로 사용되던 “춤”이라는 단어를, 화학 그 자체를 대표하는 “원자”와 함께 조합하여 만들어진 다소 생경한 강의 이름이 화학의 딱딱함과 거부감을 넘는 열쇠가 될 수 있어 보였다. 화학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화학자도 강의실이나 실험실을 벗어나면 사랑하며 춤추고, 좌절하고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 원자와 관련된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 가슴으로 접근하는 역사와 인물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원자의 춤>은 다른 교양화학 강의와 차이가 있고 그 존재 가치를 찾는다.
여느 강의와 마찬가지로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고 공부할 것이 많아지는 것을 느껴 좌절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강의를 더 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개인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고, 겨우 여기까지 왔다는 기록을 남겨 놓기 위해서라도 모자라는 것이 많지만 교양 강의 내용으로 이 책을 엮는다. 이 책은 2010년 처음 시작한 <원자의 춤> 강의 녹음을 기반으로, 대중 강연이나 고등학교 화학 특강에서 강의한 내용을 더하거나 빼면서 만들었다. 수업 자료나 강의 녹음을 수강생에게 부분적으로 공개한 적은 있었지만, 책 형식으로 정리해서 묶어 낸다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어 보인다.
화학 지식을 나열하기보다는 최소한의 핵심적인 화학 개념에 집중하였고, 화학의 형성과 발전 과정, 거기에 관여했던 화학자들의 삶과 역사적 배경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였다. 원자량에서 시작하여 복잡한 화학 반응식 계수 맞추기를 거쳐 계산 연습 문제를 가르치는 일반적 교양 화학 강의의 체계적 접근은 가능한 한 피했다. 수업 때도 한 주제를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레 관련된 다른 잡담으로 이야기가 넘어가곤 하는데, 원고를 쓰면서도 화수분처럼 퍼지는 생각의 흐름에 즐거워하며 따라가다가 “아차!”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화학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산만한 교수와 매주 다양한 화학 관련 주제로 잡담을 나눈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레 읽어간다면 독자의 충격은 덜할 것이다. 필자의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강의 평가를 보면 강의 스타일 자체가 산만하다고 하니, 이 책이 산만하게 느껴진다면 교양 화학책으로서는 가장 필자 본인답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조엘 레비Joel Levy와 데이비드 브래들리David Bradley가 쓴 ????화학 캠프????(원제 Bed side book of Chemistry, 2010)는 이 책의 스타일을 잡는 데 많은 자극을 주었다. 매 학기 강의에 흥미롭게 따라와 주고, 종강 후에도 참고하라고 직접 찍은 사진이나 자료를 보내주는 수강생들의 관심이 이 책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독자 여러분은 원자와 어떤 춤을 추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