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트 앤솔러지는 작가별 또는 주제별 작품집 형태를 추려서 꾸린 시리즈입니다. 기존에 출간한 단편선들을 포함하여 지속적으로 고전 장르의 지형을 탐색하려고 합니다. 출판 브랜드 '바톤핑크, 아라한, 지구라트'의 조합어인 '바라트'는 산스크리트어로 '빛을 찾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앞서 출간한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의 화성 연작 세 편을 묶었습니다. 보통 화성 삼부작으로 알려진 「요봄비스의 지하묘」, 「심연의 거주자」, 「불숨」은 크툴루 세계관을 공유하는 스미스 특유의 SF 호러입니다.
「요봄비스의 지하묘」는 화성을 배경으로 SF와 호러를 결합한 작품인데요. 작품마다 기발한 제목을 선호했던 스미스가 원래 구상했던 작품명은 「아보미의 지하묘The Vaults of Abomi」였고, 배경이나 등장인물도 화성과는 관련이 없는 “멸망해가는 세계”와 “미지의 종족”이었다죠. 나중에 「화성의 실생 식물Seedling of Mars」을 집필하면서 화성에 대한 관심과 자극이 생겨서 「요봄비스의 지하묘」 배경도 화성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작품은 SF, 호러, 판타지를 혼합하여 스미스 특유의 장르로 재탄생시키는 좋은 예에 속합니다. 또한 스미스가 보여주는 공포의 백미이자 최고봉으로도 꼽히는데요. 린 카터(Linwood Vrooman Carter)는 나중에 출간된 스미스의 작품집 『지카프』의 서문에서 이 작품에 대해 “스미스식 독특한 장르의 이상적인 전범”, 도널드 시드니프라이어(Donal Sidney-Fryer)는 “스미스 작품 중에서 가장 완벽한 호러”라고 평했습니다. 아울러, 스미스의 문체와 주제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여러모로 최적의 작품일 듯 합니다.
지구인 원정대가 화성의 폐허 도시 ‘요봄비스’를 탐사하는 과정을 다룹니다. 현 화성인인 ‘아이하이’ 족은 자신들의 조상인 ‘요리’ 족의 멸종과 요봄비스의 지하에 대해 극도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데요. 화성인 가이드들도 도망친 상황에서 지구인들끼리 영겁의 지하묘지로 들어갑니다. 지구인들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세번’이 그 공포의 현장을 전하지만 그 역시도 이미 요봄비스 기생체의 숙주가 된 상태입니다.
애초에 「요봄비스의 지하묘」를 비롯한 스미스의 화성 연작들은 크툴루 신화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적었는데요. 동료 작가들이 화성인 아이하이 족, 요리 족, (머리에 들러붙는) 거머리 기생체 등을 크툴루 유니버스에 차용하면서 관련을 맺게 되고, 크툴루 롤플레잉 게임에도 포함됩니다.
「심연의 거주자」는 아이하이 족의 화성을 무대로 황금과 대박을 쫓는 세 지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지구인 보물 사냥꾼들은 탐험 중에 ‘차우르’라는 폐허 지역에서 모래폭풍을 만나 어느 동굴로 피신합니다. 지구인들은 모래폭풍이 지나가는 동안 시간을 때울 겸 그 동굴을 한 번 탐사해보기로 하는데요. 생각보다 깊은 지하로 향해지던 동굴이 낭떠러지로 바뀌고, 절벽 길을 따라 끝없는 심연이 이어집니다. 이따금씩 불가사의한 소리가 정체모를 음산한 공포를 전하다가 느닷없이 득시글거리는 눈먼 흰색 괴생명체들이 나타납니다. 화성인 아이하이 족과는 다른 동굴 화성인들인데요. 문제는 이들이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심연의 거주자’입니다.
이 심연의 거주자는 크툴루 신화의 그레이트 올드원 계열에 속하는데요. 화성의 깊숙한 지하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생김새는 눈이 없는 거대 거북이와 아르마딜로를 연상시키는데 생명체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무기력과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마취제를 발산합니다.
'불숨'은 그레이트 올드원 또는 외계 신(아우터 갓)으로도 분류되는데, 크툴루 신화에서 이런 분류의 혼란은 빈번합니다. 크툴루 신화 체계가 지닌 태생적 한계로 분류의 기준뿐 아니라 족보까지 꼬이는 건 예사인데요. 스미스의 창조물인 불숨은 화성인 사이에서 회자되는 전설적인 악마 신입니다. 화성 원주민은 아니고 미지의 다른 행성에서 화성으로 망명한 존재인데요. 생김새는 주홍빛 꽃을 연상시키고, 완벽한 대칭미를 지닌 요정까지 신체의 일부를 형성하는 등 가공할 능력과 잠재된 포악성을 감안하면 의외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물론 이것이 실물이라기보다는 대리자의 이미지에 가깝긴 합니다만.
불숨은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지하세계, ‘라보르모스 Ravormos’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합니다. 불멸에 가까운 수명으로 천년 주기 다시 말해 천년을 잠들고 천년을 깨어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데요. 화성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된 불숨은 또 다른 행성 즉 지구로의 이주를 꾀합니다. 화성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지구 도착 전에 미리 이미지 관리도 하고 우호적인 지지 세력을 구축하려고 하는데요. 이런 사전 작업을 해줄 지구인들이 필요한데, 화성에서 미아 신세로 방황하던 두 지구인, 헤인스와 챈러가 불숨의 예비 사절단으로 포섭됩니다.
「요봄비스의 지하묘」, 「심연의 거주자」를 잇는 스미스의 화성 삼부작 마지막이 「불숨」인데요. 화성 연작은 총 4편, 이중에서 「화성의 실생식물 Seedling of Mars」(「행성 존재」로도 출간된)을 제외하고 크툴루 신화와 관련된 세 편을 보통 스미스의 화성 삼부작이라고도 한다죠. 화성 삼부작의 전작들처럼 화성의 지하세계가 배경입니다. 불숨이 마취성 향기를 발산하여 상대를 제압하고 포섭하는 것도 「심연의 거주자」와 유사합니다. 다만 전작인 「요봄비스의 지하묘」, 「심연의 거주자」와 비슷한 것을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불숨」에서 각각의 요소들은 스미스 특유의 시적인 상상력이 빚은 매력적인 부분들이지만, 이것을 한데 작품 속에 녹이는 과정은 어딘지 전작들에 비해 느슨한 느낌이 듭니다. 정적인 묘사의 비중이 더 큰 것도 이유겠으나, 독자들에 따라 여러모로 호불호가 갈릴 듯 합니다.
「요봄비스의 지하묘」에 이어 화성 연작에 속하는 이 단편은 스미스가 마음고생을 가장 많이 한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잡지사에서 스미스가 원치 않는 수정을 가한 것이 발단이었다고 합니다. 스미스는 대체로 출판사의 수정 요청에 유연하게 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완강한 태도로 때론 편집자들과 충돌했던 러브크래프트와는 다른 면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런 스미스가 수정 문제로 격분했던 작품이 이 「심연의 거주자」라고 합니다. 매체 특성상 SF 요소를 부각하려는 휴고 건스백의 《원더 스토리즈》와 호러 요소를 강조하고 싶었던 스미스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였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