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소냐’는 야만인 코난과 함께 국내에도 꽤 알려진 로버트 E. 하워드의 캐릭터다. 다시 말해 하워드의 여전사 캐릭터 중에서 그나마 국내에 알려져 있다. 레드 소냐가 등장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은 중편 「독수리의 그림자 The Shadow of the Vulture」다. 모험 소설에 특화된 《더 매직 카펫 매거진 The Magic Carpet Magazine》을 통해 1934년 1월에 발표했다. 이 펄프 잡지는《위어트 테일스》의 자매지이기도 했지만 단명하여 「독수리의 그림자」가 실린 것이 얄궂게도 마지막 호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레드 소냐는 「독수리의 그림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블 코믹스와 영화 「코난」 시리즈를 통해서일 확률이 크다. 「독수리의 그림자」에 영감을 받은 마블 코믹스의 레드 소냐는 하워드의 원본에 비해 스펠링 하나(Sonya-Sonja), 옷 한 벌(비키니 한 장) 차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캐릭터의 본질을 바꿀 정도로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고 어디서 본 듯한 레드 소냐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우람한 아놀드 슈워제네거(코난) 옆에 비키니 갑옷을 입고 서 있는 글래머 브리짓 닐슨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최근 영화 「레드 소냐」(2025)가 있지만, 마틸다 루츠가 브리짓 닐슨을 대체할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마블 코믹스 이후 여전사들은 전투에서의 방어를 위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몸을 노출하기 위해서 비키니 갑옷을 입는 비효율적인 전통을 잇는다.
하워드의 레드 소냐는 통이 넓은 긴 바지를 입고 긴 부츠를 신는다. 망토 속에 겉옷 그 속에 사슬 갑옷을 받쳐 입는다. 하지만 「독수리의 그림자」에서 이런 복장으로 빨강머리를 휘날리는 좌충우돌 ‘로가티노의 레드 소냐’를 만나기 위해선 의외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하워드가 처음부터 공을 들이는 것은 모하치 전투(1526)에서 빈 공방전(1529)까지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펼쳐 놓는가이다.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가독성이 떨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약간 과장해서 하이보리아의 코난보다, 청교도적 음산한 오지의 솔로몬 케인보다 더 박진감이 넘친다. 역사와 신화, 팩트와 허구를 작가 하워드만의 방식으로 잘 버무렸을 때 거둘 수 있는 가장 성공적인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이 「독수리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오스만제국의 위세처럼 휘몰아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나 이제 술탄 술레이만의 유럽 진출을 위한 마지막 교두보로 반드시 함락해야하는 빈 성에 도착한다. 이 작품의 본격적인 무대, 1529년 빈 공방전이다.
사실상 주인공은 독일인 고트프리트 폰 칼름바흐다. 그는 모하치 전투에 성요한 기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오스만제국 황제의 귀하디귀하신 옥체에 상처를 입히는 바람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술탄 술레이만의 분노는 어떡해서든 칼름바흐의 머리를 가져오라는 명령으로 하달된다. 이 명령을 수행하는 아킨지 부대의 대장, 미칼 오글루 일명 ‘독수리의 그림자’다. 칼름바흐는 빈 성으로 피신한다. 반면에 레드 소냐는 술레이만이 가장 아끼는 후궁, 록셀라나의 여동생이다. 두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오스만제국의 술탄 술레이만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이 작품에서 빛나는 부분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인물들의 그늘이다. 만약에 칼름바흐가 술주정뱅이에다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힘든 일은 요리조리 피해 다니려는 뺀질이 기질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레드 소냐가 남자들과 욕 배틀을 벌이면서 칼름바흐 못지않게 술을 퍼마시고 분노조절장애로 천방지축 덤비다가 나가떨어지는 허당 끼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지금처럼 재밌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인에 가까운 압도적인 피지컬에 최고의 전사다운 무훈을 세운 칼름바흐, 월등한 전투력과 역시 길쭉하고 균형 잡힌 몸매로 섹시미를 뿜는 레드 소냐. 이들에게 막힌 혈을 뚫듯 인간적 결함을 주고 캐릭터의 역동성을 가져온 건 하워드의 성공한 전략이다. 전우애로 맺어진 이인조 빈 수비대의 허술함은 술탄 술레이만과 미칼 오글루의 시종일관 모질고 음산한 분위기와 대비된다. 다만 여전히 전사는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역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워드는 디테일에서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도 있지만 역사적 토대를 빌드업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떻게 그 주변 인물들을 창조했는지 그 만만찮은 과정을 H. P. 러브크래프트에게 서신으로 설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워드와 러브크래프트가 공유한 인종차별적 시각은 「독수리의 그림자」에도 또 하나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워드 평균치보다는 엷고 얇지만 이 작품에서도 특유의 인종차별은 변함이 없다. 이 또한 현대 (한국) 독자들이 하워드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일지 모르겠다. 다만 하워드의 검과 마법에 큰 기대를 가지고 접근했다가 실망한 독자들에게 「독수리의 그림자」의 레드 소냐는 우회적이지만 흥미로운 접근 방법이 될 것이다. 레드 소냐에게 만족했다면, 한 단계 더 진화한 여전사, 다크 아그네스도 만나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