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E. 하워드는 야만의 세계와 강력한 영웅을 앞세운 검과 마법의 창시자이자 성공한 작가다. 하워드의 세계관에서 근육질의 알파메일들이 중심축인 건 자연스럽다. 검과 마법의 상징격인 ‘야만인 코난’, 고대 픽트족의 마지막 왕 ‘브랜 맥 몬’, 청교도 전사 ‘솔로몬 케인’, 아틀란티스의 마초 왕 ‘정복자 컬’ 등등 하워드의 작품은 그야말로 테토남들의 전시장이자 각축장이다. 그런데 하워드는 이 남성 중심적 세계관에서 이따금씩 예상치 못한 매혹적인 캐릭터들을 변주해낸다. 그중에 하나가 여전사이고 여걸이다. 이 여전사 캐릭터의 완성도와 강렬함에서 단연 ‘다크 아그네스’가 독보적이다.
다크 아그네스는 하워드의 숨은 걸작이라고 할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국내에선 생소하고 영어권에서도 주목을 받은 지(하워드의 다른 작품, 다른 캐릭터에 비해서) 오래되지 않았다. 비교적 최근에 영어권을 중심으로 특히 페미니즘 시각에서 부각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워드의 걸작으로 더 많은 조명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다크 아그네스’ 연작은 하워드가 장기적 구상으로 캐릭터를 발전시키려고 계획했던 최초의 여전사로 알려져 있다. 구상은 세 편 그나마 세 번째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4년 사이에 집필한 것으로 보이는데, 출판으로 빛을 본 것은 하워드 사후다. 야심찬 구상과는 달리 작가 생전에 출간 기회를 잡지 못했고, 이것이 삼부작으로 끝난 이유였던 것 같다. 하워드가 작품 활동을 펼친 당시의 펄프 잡지들은(물론 사회 분위기 또한) 능력 있는 여자를 반기지 않았다. 얌전히 남자가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야지 위험을 무릅쓰고 오히려 남자를 구하는 여걸은 더더욱 그랬다. 이걸 무마하는 방법은 강인한 여성에게 마법과 초자연성을 주입하고 판타지의 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즉 현실감을 최대한 거세하는 방법이었는데, 그러면 실제로 출간 기회가 더 커졌다.
다크 아그네스는 「검을 든 여인 Sword Woman」, 「프랑스를 위한 칼날 Blades for France」, 「죽음의 정부 Mistress of the Death」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급했듯이 마지막 「죽음의 정부」는 하워드의 미완성 원고를 제럴드 페이지(Gerald W. Page)가 협업 형태로 완성해 출간한 것이다. 3편 모두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 ‘라 페르’ 출신으로 귀족의 피를 물려받았으나 현실의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아그네스가 주인공이다. ‘샤티용의 아그네스’로도 알려진 등장인물이 각성을 거쳐 강인한 여자 검객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검을 든 여인」은 16세기 초 조금 더 구체적으로 1522년 전후의 프랑스가 배경이다. 실제 역사적 사건과 공간을 배경으로 역사와 신화, 허구를 결합하는 하워드의 특징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시작은 역시나 욕설과 주먹질, 칼부림이다. 이게 없으면 하워드의 소설인지 의심스럽고 어색할 정도. 아그네스는 아버지에 의해 강요된 결혼을 거부하고 도망친다. 그냥 도망친 것이 아니라 결혼식에서 신랑을 단검으로 살해한 후다. 그 단검은 언니 이자벨이 자기처럼 또 어머니처럼 억압과 굴레 속에서 비참하게 살지 말고 자결하라며 몰래 건네준 것이다.
물론 피 묻은 단검하나 달랑 들고 찢어진 신부복을 입은 아그네스의 모습처럼 그녀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다.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민 남자, 에티엔은 천하의 사기꾼이다. 아그네스를 사창가에 팔아넘길 꿍꿍이로 호의를 베푼 셈. 다른 남자들도 대부분 찌질한 빌런이거나 자객이다. 그래도 아그네스는 남자보다 더 찰지게 쌍욕을 시전하고 언제든 가차 없이 칼부림 액션을 선보인다. 상대를 죽이는데 자비는 없다. 유명한 용병대장 기스카르 드 클리송을 만났을 때, 용병이 되고자 하는 아그네스에게 돌아온 답변도 한결 같은 희롱과 조롱이다. 아그네스도 한결 같은 분노의 일성을 되돌려준다.
“남자라는 족속들! 언제나 여자는 본분을 알아야한다지. 소젖 짜고 실 잣고 바느질하고 빵 굽고 애 낳아라! 능력 밖의 일에 기웃거리지 말고, 남편과 가장의 명령에 따라라! 흥! 당신들 모조리 침을 뱉어주마! 이 세상에서 무기를 들고 나와 맞붙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남자는 없어. 내가 죽기 전에 그걸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겠어. 여자! 암소! 노예! 울면서 굽실거리는 노예, 때리면 움츠러들고, 복수라고는 제 목숨을 끊는 것뿐인…… 내 언니가 나한테 강제로 권했던 것처럼! 허! 남자들 사이에 내 자리가 없다? 엿 같네, 나는 내 맘대로 살다가 신의 뜻대로 죽을 거야. 하지만 내가 남자의 동료로서 자격이 안 된다면, 최소한 남자의 첩이 되지도 않겠어. 그러니 네놈은 지옥에나 가버려. 기스카르 드 클리송. 그리고 악마가 네놈의 심장을 찢어발기길!”
「검을 든 여인」 중에서
무엇보다 다크 아그네스는 하워드의 작품에서 독립성과 주도력을 지닌 첫 여성 캐릭터다. 물론 하워드 최초의 여전사 타이틀은 다크 아그네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총을 든 ‘헬렌 태브럴’, 코난 시리즈의 ‘벨릿’과 ‘발레리아’, 무엇보다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로가티노의 ‘레드 소냐’가 아그네스 앞에 있다. 그러나 이 여전사들은 사실 남성 캐릭터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다. 단편 「독수리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레드 소냐도 이 한계 안에 안주한다. 이 한계를 깬 하워드의 여전사는 다크 아그네스가 유일하다.
작가의 인지도나 장르에 미친 파급력에 비해 국내에서는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하는 하워드. 어쩌면 그 이유 하나를 알려줄 작품이 다크 아그네스일지 모르겠다. 검과 마법의 화려한 액션과 생생하고 풍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유명세에 비해 썩 내키지 않았던 독자들이 있다면, 다크 아그네스를 통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당연히 매력적이겠지만, 그렇게만 한정하는 건 이 작품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읽는 목적이 분명하든 그저 시간 때울 요량이든 다크 아그네스의 서사와 캐릭터는 흡인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