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리 앨린 루이스(Leslie Allin Lewis).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국내 초역으로 소개하는 루이스의 단편들은 독창적이고 강렬한 공포의 세계를 보여준다. 루이스는 천재, 광기, 불운 외에 다른 수식어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 작가다. 그의 유일한 작품집 『그로테스크, 불안한 이야기들 Tales of the Grotesque; A Collection of Uneasy Tales』에 수록된 11편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그로테스크’라는 제목과도 잘 어울린다.
루이스는 조울증 상태에서 그동안 써온 원고들을 모두 폐기했다고 알려져 있다. 단편 11편만 남은 이유인데, 작가의 작품을 더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1935년에 출간된 『그로테스크, 불안한 이야기들』은 당대는 물론 현재의 기준에서도 공포의 충격파가 상당하지만 루이스의 생애는 오랫동안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왔다. 루이스의 작품과 생애를 복원하고 재조명한 사람은 유령 소설의 저명한 기획자이자 편집자인 리처드 달비(Richard Dalby)다. 달비의 말처럼 루이스는 영국이 배출한 초자연 소설의 가장 뛰어난 작가이자 숨은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하다.
초자연, 마카브르(macabre)라는 확실한 장르와 위어드 픽션까지 사정권에 두는 루이스의 작품 세계는 100년이 지나서도 색다른 감흥을 준다. 다만 미국의 펄프 잡지와 러브크래프트라는 거장을 토대로 전성기를 맞은 위어드 픽션과 루이스의 작품은 결이 다르다. 위어드 픽션 자체를 정의할 때 러브크래프트는 ‘코스믹 호러’를 위어드 픽션의 필수적이고 가장 확실한 특징으로 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루이스의 공포와 크리처가 현실 세계와 다른 차원에서 오지만 그것이 코스믹 호러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루이스에게는 위어드 픽션의 확실한 배양지인 펄프 잡지들이 없었다. 당대 영국은 미국과 달리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 단행본 출간 아니면 신문과 라디오 방송 같은 레거시 미디어의 기획판 시리즈가 장르 문학의 출구였다.
「잃어버린 성채」는 차원 이동을 이용해 자행되는 인간의 극한 탐욕과 가공할 범죄의 기록이다. 초라한 하숙집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피터 헌트. 어느 날 고모의 사망 소식과 함께 그에게 남겼다는 유품을 전달받는다. 이 모형 성채는 그에게 마법의 성이 된다. 이 마법은 재물과 성적 욕망을 채우고 완전범죄로 무수한 살인을 부른다.
이 단편은 앞서 언급한 작가의 초자연, 마카브르, 위어드 픽션의 특징을 골고루 보여준다. 어느 요소가 상대적으로 튀지 않는 반면, 루이스의 전반적인 특징을 접할 수 있는 매혹적인 단편이다.
「하이브리드」는 한 인간에 깃든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루이스의 특징 중 하나인 오컬트 색채가 짙게 투영되어 있다. 화자인 의사 ‘콜’은 우연히 학창 시절의 친구를 만난다. 사실 학창 시절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평범하고 존재감이 없었던 그 ‘챌머스’라는 친구는 그나마 콜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긴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도 변해버린 챌머스는 예전에도 콜에게 어린 시절부터 늘 시달려온 악몽과 자신 가까이에 도사린 정체불명의 괴물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반은 인간 반은 조류인 잡종 괴물이 자신의 육체를 끊임없이 노리고 있다는 것. 챌머스는 결혼도 하고 정상적인 삶을 꾸려가는 듯 했지만, 괴물이 전면에 등장하는 비극의 정점과 맞닥뜨린다. 역시나 루이스는 자칫 지리멸렬하고 느슨해질 소재에 특유의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유명하지 않은 작가 루이스의 작품 중에서 그나마 알려진 것이 「모압의 탑」. 작가의 대표작으로 인식돼서 그런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다른 단편들에 비해 인지도 차이가 크게 체감되진 않는다.
외판원인 화자는 출장을 갔다가 독특한 구조물을 보고 단번에 매료된다. 번화가 한복판에 탑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데, 주위에 수소문한 결과 백 년 전쯤 어느 종파가 바벨탑을 모델삼아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려고 했다는 것. 중간에 자금이 바닥이나 60미터 상공에서 공사가 중단돼 지역의 흉물처럼 변했다는 말도 들려온다.
화자는 지리멸렬한 외판원 일도 그만둔 채 술에 취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그 모압의 탑을 관찰한다. 그러다가 깨달은 충격적인 사실. 그 탑은 현실계에서는 미완의 흉물이지만 아스트랄계에서는 이미 완공이 됐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데, 그중에 화자가 포함된 것. 이제 모압의 탑 주변으로 차원의 문을 빠져나온 온갖 초자연적 존재들과 유령들이 넘쳐난다. 강렬한 환상성이 돋보이는 이 단편은 작가의 깊은 신지학적 관심과도 맞닿아있다.
「아이」는 루이스식 공포의 질감과 색감을 잘 드러내는 단편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 삼아 멀리 사는 친구를 찾아가던 일인칭화자는 어느 고풍스러운 마을의 풍경에 흥미를 느낀다. 그런데 그 마을 숲속 사냥터 관리인의 오두막에 기괴한 유령이 출몰한다는 여관 주인의 말을 듣고 더더욱 마음이 끌린다. 그 오두막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연이어 살해한 혐의로 정신병원에서 치료감호 중인 여성이 수년전에 탈출해 그 숲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됐다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서늘한 여운이 감돈다. 여관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그 오두막을 찾아간 화자는 과연 무엇을 마주할 것인가?
「단검」은 범죄와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다. 루이스는 이번에도 인간의 탐욕과 광기를 특유의 필체로 펼쳐 놓는다.
트랜터는 상속 재산을 노리고 형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조작한 알리바이로 용케 용의선상에 벗어나고, 형에게 상속된 시골의 대저택과 현금 자산을 차지하게 된 것. 그런데 범행 현장인 저택의 서재에서 장밋빛 미래를 그려보던 트랜터는 불현듯 거울에 비친 단검을 보게 된다. 형을 살해한 범행도구인 그 단검은 당연히 경찰서 증거물 보관실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단검이 거울에만 그것도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 위치에 아무 것도 없다.
「카오스의 화음」에서 루이스가 공포를 담은 그릇은 음악이다. 참전했다가 종전 후 집으로 돌아온 두 청년. 이들은 영적인 음악에 매료된다. 전장의 생존자로서 치유가 필요했을 이들의 영혼에 천상의 음악은 당연히 매혹적이다. 문제는 이 음악이 치유를 넘어섰다는 것. 이들에게 피아노 연주로 극한 천상의 음악을 선사한 이는 웨스턴행어. 이 천재 연주가가 인간의 본성을 뒤흔드는 음악의 본질은 흑마법에 기댄 파괴와 종말이다. 루이스는 전생과 환생의 순환 주기 안에 초자연성을 설득력 있게 담아 현실 세계의 살인 사건으로 연결한다.
「해포석 파이프」의 일인칭화자는 시골의 대저택과 사유지를 헐값에 사들이고 목가적인 삶을 꿈꾼다. 그 저택의 전주인은 엽기적인 시신훼손으로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마. 여성들만 골라 범행을 저질렀는데, “가장 역겨운 부분은 날카로운 손도끼로 피살자들의 신원 확인이 가능하도록 머리와 팔다리를 잘라 현장에 남겨두고, 몸통은 자신의 집 안 어느 방에 꾸며놓았다는 일종의 ‘박물관’에 추가하기 위해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이 극악한 살인마는 치료감호 중에 정신병원에서 사망했고, 흉흉한 소문과 오명 때문에 저택이 싸게 나온 것. 그런데 화자는 집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해포석 파이프담배 때문에 곤경에 처한다. 묘한 유혹에 이 파이프로 담배를 피운 화자가 살인 행각을 벌이는 악몽을 꾸기 시작한다. 루이스는 어느 작품 하나 흔하거나 전형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단편에서도 역시 자주 접하는 악령의 빙의로만 끝나지 않고 모방살인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천공의 괴이」는 조종사로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단편.
민간 비행기를 모는 ‘카’는 지나치게 신중하고 겁이 많다는 평을 받는다. 날씨가 좋을 때만 비행을 한다는 비아냥까지 듣는데, 그런 그가 국회의원 승객을 태우고 비행에 나섰다가 추락사한다. 승객이 국회의원이라 떠들썩해지는데, 카의 친구인 베셋이 카와 승객의 죽음은 단순 사고가 아니라는 놀라운 얘기를 들려준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원인미상의 비행사고 상당수가 ‘그것’에 의한 것이라고까지 암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서 목격된다는 괴생명체……
「철돼지」는 「천공의 괴이」처럼 비행을 다룬 단편이다. 이 단편들은 조종사로 참전했던 작가의 경험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천공의 괴이」가 공중에 존재하는 괴생명체를 선보이는 반면, 「철돼지」는 비행기 자체에 깃든 사악한 생령이 중심이다. 두 작품 모두 비행 클럽의 회원인 ‘베켓’이 괴사건의 진상을 전해주는 방식을 취한다. 베켓은 기체의 외형부터 특성까지 사악한 돼지를 떠올리게 하는 전금속제(전체를 금속으로 만든) 단엽기를 조종하게 된다. 문제는 이 비행기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조종사를 어떻게든 죽이려는 살기를 보이고, 기어이 실행에 옮긴다는 것. 그렇게 이 비행기를 소유하고 조종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그때마다 사고사로 처리되는 것도 ‘철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비행기의 상상을 초월하는 교활함 때문.
「죽음 안에서 살다」는 죽었으나 살아있는 고통을 다룬다. 진부한 소재일 수 있지만 루이스는 역시나 평범하게 접근하지 않는다.
프리랜서 작가이자 아마추어 심령연구가인 아이스턴. 그는 신축한 선상가옥에서 낚시여행을 즐기자는 친구 캐리의 초대를 받는다. 그런데 캐리의 속셈은 따로 있다. 그는 평생 로망이었던 선상가옥을 손에 넣었지만, 그곳에서 기괴하고 소름끼치는 꿈을 반복해서 꾼다. 너무도 생생해서 괴로웠던 터라 오컬트에 조예가 있는 친구 아이스턴의 조언과 도움을 바랐던 것.
루이스는 생전에 보트 낚시를 무척 즐겼는데, 이 단편은 영국 노퍽의 브로드(Broad)라는 특이한 지형에서 실제 낚시를 즐긴 후에 썼다고 알려져 있다. 뱃놀이를 하던 한 여자가 실종된 것이 이야기의 발단이다.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철저한 수색작업에도 시신을 찾지 못한다. 그 여자가 엽기적인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캐리의 꿈에 나타난 것. 루이스는 오컬트 요소를 과하지 않게 활용하면서 차원이동을 중점에 둔다. 여기에 적절한 타이밍에 포착하는 강렬하고 충격적인 이미지는 투입 대비 높은 산출에 한몫한다. 실종된 여자가 ‘시공간의 왜곡’ 지점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다는 것. 한편 이를 간파한 아이스턴은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초자연성에 직면한 인간의 미약함을 보여준다.
1934년 초판 『그로테스크, 불안한 이야기들』에는 10편이 수록되었다. 리처드 달비가 1994년에 펴낸 같은 작품집엔 11편이다. 달비가 1935년 다른 선집에 수록되어 있던 「작가 이야기 The Author's Tale」를 찾아내 추가한 것이다. 작가의 정보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 의미심장한 제목의 단편은 작가 루이스의 마지막 퍼즐과도 같다. 이 단편은 한 작가가 들려주는 유령 이야기다. 한 모임에서 돌아가면서 실제로 경험한 유령 이야기를 해보자는 제안에 따른 것이다. 모임에 속한 유명 작가는 자신의 지인인 ‘레스터’(가명)의 경험담을 소개한다.
이혼과 결혼을 반복하던 레스터는 매번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하자 가장 악랄한 세 번째 아내에게 결국 폭발한다. 그는 아내를 비밀 장소에 납치해 고문 틀에 묶고 복수를 하려고 한다. 고문 장치를 제작하는 등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막바지 준비 작업을 하던 레스터는 그 음침한 비밀 장소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그런데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계획대로 아내에게 복수한다. 다만 자기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에 능숙한 ‘그 존재들’에게 맡기는 방식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서두에 ‘내가 아니라 아는 사람의 이야기인데…….’라는 단서가 달릴 때다. 대개 이런 경우엔 자기 이야기다.
이 단편은 단순한 유령 이야기의 느낌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한대로 실제 경험담이라는 섬뜩한 인상을 던진다.
2026년의 기록적인 무더위를 지나며
미스터고딕 정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