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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외) 상세페이지

경희(외)작품 소개

<경희(외)> 1. 나혜석이 써서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글 중에서 시와 소설 작품은 미완의 소설 〈규원〉을 제외하고 모두 수록했고 나머지 산문 중에서는 나혜석의 생각과 삶을 잘 알려 줄 수 있는 평론과 수필을 추렸다. 나혜석이 구미여행의 결과로 쓴 기행문 성격의 글은 싣지 않은 반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시 〈중국과 조선의 국경〉과 산문 〈부인문제의 일단〉 〈예술가의 생활〉을 새로 찾아서 실었다.
2. 작품들은 신문 잡지에 발표된 당시의 글을 저본으로 삼았다. 가능하면 원문을 살리되 현대독자들이 읽기에 편하도록 철자법과 띄어쓰기는 현대 표기로 고치고 필요한 한자는 부기하였다. 원문에서 오기나 오식이 분명한 것은 바로잡고 주석난에서 그것을 밝혔으며, 판독이 어려운 부분은 쭕 표시로 남겨 두었다. 문장 부호와 단락 나누기는 원문을 존중하되,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필요한 곳에는 편자가 덧붙이기도 했다.
3. 어려운 한자말에는 주석을 달았고 한시는 ( ) 속에 번역을 해두었다. 일본 인명과 지명은 일본어로 읽고 ( ) 속에 한자를 부기했다. 원문에 일본어로 되어 있는 것은 소리나는 대로 읽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 ) 속에 번역을 부기했다.
4. 발표 연도나 게재지 등의 서지사항은 글 마지막에 밝혀 놓았다.


저자 소개

1896년
4월18일 경기도 수원에서 나주 나씨 나기정羅基貞과 수성 최씨 최시의崔是議의 5남매(稽錫, 弘錫, 景錫, 蕙錫, 芝錫) 중 넷째,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지금의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45번지 일대)이며, 아버지 나기정은 한일합방 전후 군수를 지낸 개명관료였다. 어릴 때 이름은 아기兒只였으며 학교에 들어가서는 명순明順이라 불렀고, 돌림자를 넣어 지은 혜석이란 이름은 일본 도쿄 유학갈 때 얻었다. 언니 계석은 일찍이 시집을 갔고 큰 오빠 홍석은 큰집의 양자로 가서 혜석은 둘째 오빠 경석과 동생 지석과 함께 자라났다. 특히 경석은 늘 혜석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1910년
6월 수원 삼일여학교(현재의 매향여자경영정보고등학교) 졸업.
9월 1일 서울에 있는 진명여학교에 진학했다. 두 살 아래인 동생 지석도 함께 진학하여 자매는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1912년
진명여학교 3학년 때는 7명의 동급생 중 급장이었고 1등을 했다.

1913년
3월 28일 경성 사립 진명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했다.
4월 1일 그 해의 졸업생을 소개하는 《매일신보》의 〈재자재원〉 난에 진명여고보 졸업생으로는 제일 먼저 보도되었다. 4월 15일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 도쿄 ‘사립 여자 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 (4년 과정)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동생인 지석도 일본에 와서 잠시 음악을 공부했으나 곧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하며 얼마 후에 언니보다 먼저 결혼했다.

1914년
2학년(선과 보통과) 여름 방학에 학교 주임 선생의 소개로 일본의 중남부에 있는 호슈(房州)의 선생 친구 집으로 가서 방학을 보내면서 화가 사또(佐藤彌太)를 만나게 되었다. 사또는 무기로 위협하면서까지 자기와 결혼해 줄 것을 애원했으나 혜석은 거절했다. 뒤에 사또는 《백화白樺》지에 나혜석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R자에게〉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여름부터 아버지는 혜석에게 좋은 혼처가 나섰다고 공부를 그만 두고 시집갈 것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이미 근대적 여성 의식에 눈을 떴고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된 데다가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게이오대학생 최승구崔承九와 연애관계에 있었던 혜석으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여성문예동인지 《청탑》을 중심으로 여성해방론과 신여성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나혜석도 그러한 지적 자장 안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같은 지면에 최승구는 〈감정적 생활의 요구〉와 〈남조선의 신부〉를 발표했다.

1915년
1월, 2학년의 제 3학기인 이 해 1월부터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휴학했다. 아버지의 엉뚱한 결혼 권유에 맞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다.
11월 15일 복학수속을 하면서 고등사범과 1학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는 못함.
12월 10일 아버지 나기정 사망. 이 해 말 최승구는 결핵 병세가 악화되어 조선으로 돌아가 전남 고흥 군수로 있던 형 최승칠의 집에서 요양함.

1916년
4월 1일 서양화 고등사범과 1학년으로 복학. 4월 초 전남 고흥으로 죽기 직전의 최승구를 보러감. 봄 학기가 이미 시작되어 중도에 잠깐 빠져나온 것인데 나혜석이 방문한 다음날 최승구는 23세로 죽어 전남 고흥읍 남계리 오리정 공동 묘지에 묻혔다. 여름 무렵 수원집으로 나경석을 찾아온 김우영이 찾아왔고 이후 오빠의 강력한 권유로 서로 도쿄와 교토를 오가며 만남. 중간에 이광수와도 가까워졌으나 오빠 나경석의 반대로 이광수와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17년
3월 학지광에 〈잡감〉을 발표했다. 유학생 모임인 학우회의 망년회에 참석했던 소감을 쓴 것임. 필명으로 정월晶月이란 호를 사용했다.
4월 1일 사립여자미술학교의 학제변경으로 고등사범과 제3학년이 됨.
7월 《학지광》에 〈잡감―K언니에게 여함〉 발표. 같은 지면에 최승구의 사촌 동생 최승만이 최승구를 추도하는 시 〈소월〉 발표(4. 23. 쓴 것으로 부기) 7월, 도쿄 여자친목회의 기관지인 《여자계》 창간호에 소설을 발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8월 18일 여름 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길에 교토에 들러 약혼자인 김우영을 만나서 김우영의 하숙집에서 며칠간 묵으면서 교토 시내를 관광했고 그 뒤에도 졸업 작품으로 교토의 가모가와(鴨川) 주변을 그리러 다녔다고 한다.

1918년
3월 《여자계》 2호에 단편 소설 〈경희〉 발표. H.S.란 이름으로 시 〈광光〉도 발표. 3월 사립 여자 미술학교 졸업. 졸업작품은 사립미술학교의 화재로 남아 있지 않다. 김우영은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계속 일본에 머무름.
4월 귀국함. 귀국해서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8월 경에 건강이 안 좋아 그만 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9월 《여자계》 3호에 단편 소설 〈회생한 손녀에게〉 발표.

1919년
1월 21일부터 2월 7일까지 《매일신보》에 ‘섣달 대목’이란 주제로 5회, ‘초하룻날’이란 주제로 4회, 모두 9점의 만평을 연재함.
3월 초 서울의 신마실라(이화학당 교사), 박인덕(이화학당 교사), 신준려(이화학당 교사), 황에스터(黃愛施德, 호적명 황애덕,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마리아(정신여학교 출신 동경유학생) 등과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며 3·1운동에 여학생 참가 계획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다.
8월4일 5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경성지방법원의 ‘면소 및 방면’ 결정으로 풀려남. 김우영은 변호사 자격을 얻자마자 8월에 귀국했으나 공판날짜가 지나 약혼자 나혜석을 변호할 기회는 놓쳤다. 풀려 난 뒤 정신여학교 도화(미술) 교사로 재직.
11월 3일 어머니 최시의 사망.

1920년
4월 《신여자》 제2호에 판화 〈저것이 무엇인고〉 발표. 4월 10일 정동 예배당에서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김우영과 결혼했다. 나혜석과 김우영은 이날의 《동아일보》에 청접장을 내었고 또한 같은 신문에 이들의 사진과 함께 결혼 소식이 보도되었다. 결혼 후 신혼 여행 대신 김우영과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왔다.
6월 28일 경성부 인사동 26번지 김우영과 혼인신고. 숭이동崇二洞에 거처를 마련. 시어머니와 일 년간 동거. 여름, 첫 딸 나열을 임신한 탓인 듯 정신여학교를 그만 두었다. 6월 김우영과의 약혼시대를 회상한 〈4년 전의 일기 중에서〉를 신여자 제4호에 발표(3월 집필). 동지에 〈김일엽 선생의 가정 생활〉을 그린 4장의 목판화를 발표했다. 임신을 했다는 초조감으로 2개월간 일본 생활. 이 시기가 가장 알차게 공부한 보람된 시기라고 회고함.
9월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인 《공제》 창간호에 판화 〈조조早朝〉를 발표했다.

1921년
1월 《폐허》에 시 〈사砂〉〈냇물〉 발표.
2월 《동아일보》에 〈회화와 조선 여자〉 발표.
3월 19~20일 임신 9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경성일보사(조선총독부의 일어판 기관지로 한글판은 매일신보이다)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열었다. 이는 우리나라 서양화 전시회로서는 평양에서 열린 김관호의 전람회 다음인 두 번 째,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유화 개인전이었다. 그림 70여 점이 전시되었고 높은 값에 작품들이 팔렸다. 〈양화 전람에 대하여〉(《매일신보》 3. 17) 발표.
4월 1~3일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協展에도 유화를 출품했다. 《매일신보》가 입센의 희곡을 《인형의 가家》란 제목으로 번역 연재하면서 제일 마지막회에 나혜석에게 가사를 지어줄 것을 청탁하여 4월 3일자 신문에 노래 가사 〈인형의 가〉를 발표했다. 이 가사에는 김영환이 작곡한 악보가 함께 실렸다. 4월 29일 첫 딸을 낳았다.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이란 뜻으로 이름을 김나열金羅悅이라고 지었다.
7월 《신가정》에 소설 〈규원閨怨〉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제2호에 계속 연재될 예정이었으나 《신가정》 제2호가 나오지 못함으로써 미완상태이다. 7월 《개벽》에 판화 〈개척자〉발표.
9월 김일엽의 〈부인 의복 개량에 대하여 한 가지 의견을 드리나이다〉에 반박하는 글 〈김원주 형의 의견에 대하여―부인의복 개량문제〉를 《동아일보》(9. 21~10. 1)에 발표. 9월 일본 외무성의 관리로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 안동현 부영사 사택에서 살기 시작했다. 김우영의 일본 유학 시절 선생이 일본 외무성 안의 친구를 통하여 김우영이 부영사로 가도록 주선했다고 한다.

1922년
3월 안동현에 여자야학 설립을 주도했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 〈봄〉〈농가〉 가 입선했다. 이 분야에는 입상은 없고 입선만 61명이었는데 그중 조선인은 나혜석 외에 고희동과 정규익이 있을 뿐이었다.

1923년
1월 첫딸 나열을 임신해서 낳아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 육체적 변화를 솔직하게 기록하면서 ‘모성’의 신화를 부정한 〈모母 된 감상기〉(《동명》 1923. 1. 1~1. 21)를 발표했다.
3월 백결생이 〈모된 감상기〉를 비판하는 〈관념의 남루를 벗은 비애〉를 발표하자 이에 반박하는 글 〈백결생에게 답함〉(《동명》 1923. 3. 18)을 발표했다. 3월부터 터진 의열단 사건(황옥 경부 사건)에 나혜석 김우영 부부가 도움을 주었다는 회고가 있음.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했다. 이 제2회 조선미전에는 조선인 심사 위원이 빠져 출품거부 소동이 있었다. 6월 부잣집 아들과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기생 강명화의 자살에 대한 시론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 (《동아일보》 1923. 7. 8) 발표.
9월 고려 미술회에 발기 동인으로 참가(정규익, 박영채, 나혜석, 강진구, 백남순).
11월 《신여성》에 〈부처간의 문답〉 발표. 염상섭의 단편소설집 〈견우화〉에 표지 그림 〈견우화〉를 그림.

1924년
6월 제3회 조선미전에 〈추의 정〉 4등, 〈초하의 오전〉이 입선했다.
7월 〈만주의 여름〉(《신여성》 1924. 7) 발표. 〈1년 만에 본 경성의 잡감〉 (《개벽》 1924. 7) 발표. 미전을 위해 오랫만에 서울에 온 감상을 기록한 것임.
8월 〈나를 잊지 않는 행복〉 (《신여성》 1924. 8) 발표. 이해 말엽에 첫 아들 선宣 낳음.

1925년
5월 서울에 옴. 제4회 조선미전에 〈낭랑묘〉 3등 입상.

1926년
1월 자신의 육아 경험을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조선일보》1926. 1. 3)으로 발표 ,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생활 개량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동아일보》 1926. 1. 24~30)을 발표했다.
4월 소설 〈원한〉(《조선문단》 1926. 4) 발표. 여성에 대한 인습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여성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이무렵 화가로서의 재능이나 예술 행위의 목적 등에 대한 회의가 생기고 예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남편에 대한 불만도 쌓이고 있었다.
5월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했다. 유채수채화 분야의 특선은 11명이었는데 조선인으로는 나혜석 외에 손일봉과 강신호가 있었다. 5월 동아일보에 인터뷰 기사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경력과 구심〉 (《동아일보》 1926. 5.18)가 보도됨. 자신의 창작 과정을 쓴 〈미전 출품 제작 중에〉(《조선일보》 1926. 5. 20~23) 발표.
6월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신여성》 1926. 6) 발표. 남편 김우영의 성격을 소개하는 글이다.
12월 19일 둘째 아들 진辰 낳음.

1927년
봄, 만주 안동현의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 동래 시집에서 지내며 구미 여행을 준비함. 일본 외무성에서는 가끔 벽지 근무자에게 위로 여행을 보내주는데 김우영에게도 그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안동현 시절의 그림으로 〈만주 봉천 풍경〉이 남아 있다.
5월 서울 방문,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의 오후〉가 무감사 입선. 무감사 입선이란 전해에 특선한 작가에게 주는 예우이다. 〈경성 온 감상의 일편〉(《동아일보》 1927. 5. 27) 발표.
6월19일 부산을 출발하여 구미 여행길에 오름. 나열, 선, 진의 세 아이는 칠순의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 김우영을 따라 나선 길이다. 서울을 들러 신의주, 하얼빈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다. 중간에 모스크바도 관광하고 부산을 떠난 지 한 달만인 7월 19일 파리 도착했다. 그곳에 유학와 있는 안재학, 최근우, 이종우 등을 만나고 영친왕도 만났다.
7월 바이칼 호반을 지나면서 조선일보의 기자 최은희에게 보낸 엽서 〈아우 추계에게〉(《조선일보》 1927. 7. 28)가 발표됨. 7월 27일 스위스에서 열리는 영, 미, 일간의 군축회의를 참관하러 제네바로 갔다. 제네바에는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우와 그 수행원으로 경무국장인 마루야마가 와 있었고, 다시 영친왕 일행도 만났다.
8월 14일 파리로 돌아옴. 8월 24일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관광함. 헤이그에서 이준열사의 묘를 찾아보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돌아와서 김우영은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고 나혜석은 파리에서 야수파의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했다.
10월 최린이 파리에 와서 한국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처음 나혜석을 만났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천도교 도령道領으로 1926년에 구미 여행길에 나서 미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이었다.
11월 11일 최린과 프랑스인 살레의 집을 방문했다. 살레는 제네바의 군축회의에 맞서 열리는 세계약소민족회의 부회장으로, 최린이 12월 9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약소 민족 대회에 참가하여 연설하는 것을 주선해주었다. 이를 계기로 나혜석은 3개월간 살레의 집에 하숙하면서 최린과 함께 파리 관광을 하였다. 11월 20일 처음으로 최린과 셀렉트 호텔에 묵었다고 한다.
12월 24일 연말을 남편과 함께 보내기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갔다.

1928년
1월 1일 베를린에서 새해를 맞이했고 4일 파리로 돌아왔다. 1월 10일 최린은 파리를 떠나 동유럽과 시베리아를 거쳐 조선으로 돌아갔다.
3월 김우영과 이탈리아를 관광했다.
7월 영국에 있는 김우영에게 가서 영국을 관광하고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가했던 여성으로부터 영어를 배우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8월 15일 김우영과 함께 파리로 돌아옴. 스페인 관광.
9월 17일 미국을 향해 파리를 떠났다. 파리의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나혜석의 그림은 야수파의 영향를 받게 되었다. 유럽 여행 중의 소산으로 〈스페인 국경〉 〈스페인 해수욕장〉〈무희〉〈파리 풍경〉〈나부〉 등의 유화가 남아 있다. 9월 23일 미국의 뉴욕항에 도착했다. 이곳에 머물면서 미국의 동부 지방을 여행했고 김마리아, 서재필 등을 만났다.
12월 말 뉴욕의 재미 조선인 송년 파티에서 김우영이 친일파로 몰려 피습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1929년
1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새해를 맞이 했다. 1월 12일 뉴욕 출발, 미국 대륙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2월 1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17일 만인 3월 3일에 요코하마항 도착. 1주일 정도 도쿄에 머무른 뒤 3월 12일 부산에 도착함. 동래 시댁에서 살게 되었다. 김우영은 무직자로 변호사 개업준비를 하느라고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6월 20일 셋째 아들 건健을 낳았다. 혁명와 건설의 도시 파리의 산물임을 기념하여 이름을 ‘건’으로 지었다고 한다.
8월 《별건곤》에 기자 차상찬이 쓴 탐방 기사 〈구미를 만유하고 온 여류화가 나혜석 씨와의 문답기〉가 실렸다.
9월 23~24일 이틀간 수원성 내 남수리 불교 포교당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구미 여행 중 그린 그림과 수집한 그림(복제품)을 함께 전시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수원 지국 주최, 중외일보 수원지국 후원.

1930년
1월 아기가 아파서 병간호에 정신이 없다는 말을 〈애아 병간호〉(《삼천리》 1930. 1)에 씀. 이때 김우영은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곤궁했고 파리에서 있었던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조선 사교계에 퍼져 나가면서 나혜석과 김우영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3월 말 구미 여행담을 쓴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동아일보》 3. 28~4. 2)발표, 이후 수 차례 나혜석은 구미 여행기를 쓴다.
4월 〈구미시찰기〉(《동아일보》 1930. 4. 3~4. 10) 발표.
5월 제9회 조선 미전 출품 준비와 김우영과의 가정 문제 때문에 서울에 옴. 5월 《매일신보》에 〈미전을 앞두고 아뜨리에를 찾아서〉(5. 13)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6월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딸 나열이 갓난 아들 건을 업은 그림 〈아이들〉과 파리의 풍경을 그린 〈화가촌〉이 입선했다. 6월 인터뷰 〈우애결혼, 시험결혼〉(《삼천리》 1930. 6)에서 이혼의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 시험결혼이 필요하며, 시험결혼기간 동안에는 산아제한이 필요하다는 조선의 인습을 뛰어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같은 지면에 삼천리사에서 주최한 〈만혼 타개 좌담회〉에 참석했다. 《매일신보》(6. 6)에 〈살림과 육아〉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7월 〈파리에서 본 것, 느낀 것〉 (〈대조〉 1930. 6,7 합병호) 발표.
9월 〈젊은 부부〉 (《대조》 1930. 9) 발표. 이 무렵 김우영은 서울에서 이미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고 나혜석에게 이혼을 해주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나혜석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 뒤 나혜석은 만주 봉천에서 살고 있는 오빠 나경석에게 가서 잠시 머물렀다.
11월 20일 김우영은 이혼신고서를 부청에 제출, 이혼이 성립되었다.

1931년
2월 김우영은 변호사 일이 잘 되지 않아 일본인 친구(宇桓 총독의 비서관이라고 함)의 도움으로 다시 일제의 관료로 들어갔다. 전라남도 이사관이 되어 전남 광주로 갔다. 이후 1940년까지 김우영은 광주에서 살면서 산업부의 산업과장, 상공과장, 수산과장, 농촌진흥과장을 지냈다.
3월 김우영은 신정숙과 혼인 신고했다. 김우영의 결혼 소식을 들은 나혜석은 동래로 가 네 아이와 함께 자살할 생각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결국 짐을 싸서 동래집과 아이들을 떠났다.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과 일정한 거처와 수입이 없는 불안정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5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이 특선, 〈작약〉과 〈나부〉가 입선했다. 〈정원〉 특선 소식은 이혼 후의 나혜석에게 큰 기쁨과 힘이 되었다.
6월, 〈특선작 〈정원〉은 구주여행의 산물〉(《동아일보》 1931. 6.3)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여름, 선전 특선에 용기를 얻어 일본 문부성이 주최하는 ‘제국미술원전람회’에 도전할 생각으로 여름 1달 동안 금강산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여기서 매일신보의 사장을 지낸 아베요시에(阿部充家)와 박희도를 만나 이들과 함께 압록강 상류 일주 여행을 했다. 나경석이 있던 봉천에 가서 전람회를 열었다. 가을, 제전 준비를 위해 일본에 가서 도쿄 역에서 우연히 최린을 마주치기도 했다.
10월 일본 제12회 제전帝展에 〈금강산 삼선암〉〈정원〉을 출품, 〈정원〉이 입선했다.
11월, 도쿄에 있으면서 제전 입선 후의 소감인 〈나를 잊지 않는 행복〉 (《삼천리》 1931. 11)을 발표했다. 이미 한번 발표했던 글이나, 이혼 후 전업화가로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덧붙이고 있다.

1932년
1월,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삼천리》 1932. 1) 발표.
4월 일본에서 돌아와 잠시 중앙보육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함. 〈파리의 모델과 화가 생활〉 발표 (《삼천리》 1932. 3~4).
6월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소녀〉〈금강산 만상정〉〈창가에서〉가 무감사 입선되었다. 그러나 이미 조선 미전 특선, 제전 입선의 경력을 가진 나혜석으로서는 그리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었고 나혜석의 그림에 대한 평도 그리 좋지 못했다. 나혜석 또한 조선 미전 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썼다.
7월,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총평〉(《삼천리》 1932. 7), 〈앙데팡당 식이다―혼미 저조의 조선미술전람회를 비판함〉 (《동광》 1932. 7)을 발표했다. 여름, 다시 금강산 해금강에서 가을의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3,40점 그렸는데 머무르고 있던 집에 불이나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해 애통해하고 이때의 충격으로 몸도 아프게 되었다.
11월, 〈이혼 1주년―양화가 나혜석 씨〉(《신동아》 1932. 9)라는 대담 기사가 실렸다.
12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삼천리》지에 9번에 걸쳐 구미 여행의 기행문 〈구미 유기〉를 연재했다.

1933년
1월, 분주했던 결혼 생활을 회상한 〈화가로 어머니로 나의 10년간 생활〉 (《신동아》 1933.1) 발표. 구미 여행시 베를린에서 맞았던 정월 풍속을 소개하는 글 〈베를린의 그 새벽〉(《신가정》 1933. 1) 발표.
2월 4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146의 15호에 ‘여자미술학사’를 열었다. 이혼과 화재의 심적 타격으로 수전증이 생겨 왼팔의 부자유를 느끼면서도 미술 개인 지도를 하는 한편 주문을 받아 초상화를 그려는 일을 했다. 〈모델〉(《조선일보》 1933. 2. 28)을 발표.
4월, 죽은 지 17년이 된 애인 최승구를 추모하는 글 〈원망스런 봄밤〉 (《신동아》 1933. 4)을 발표.
5월, 〈파리의 어머니날〉 (《신가정》 1933. 5) 발표. 탐방 기사 〈서화 협전·조선 미전에 출품하는 여류 화가들〉(《신가정》 1933. 5)이 실렸다. 5월의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2점 출품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출품을 않았는지 입선하지 못했는지 입선자 명단에 나혜석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후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나혜석의 그림을 볼 수 없게 된다. 대신 선전에 대한 평인 〈미전의 인상〉(《매일신보》 1933. 5. 16~5. 21)을 썼다.
10월, 〈연필로 쓴 편지〉( 《신동아》 1933. 10)를 발표. 도쿄 유학 시절 일본인 화가 사또(佐藤)가 자기를 연모하면서 일어났던 사건을 회상하여 쓴 것임.
12월, 자전적 장편소설 《김명애》를 써서 이광수에게 보이고 발표를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하나 발표되지는 않은 것 같다. 개성 〈선죽교〉를 그림.

1934년
1월 4일 《조선중앙일보》 현상 공모 ‘우스운 이야기’ 부문에 〈떡먹은 이야기〉가 당선되었다. 상금은 2원이었다.
2월, 〈밤거리의 축하식―외국의 정월〉(《중앙》 1934. 2)를 발표, 〈베를린의 그 새벽〉과 유사한 내용이다.
3월,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구미 부인의 가정 생활〉(《중앙》 1934. 3)을 발표. 하숙집 주인이었던 살레 부인의 생활을 소개했다.
5월, 〈날아간 청조〉(《중앙》 1934. 5) 발표. 수원에서 삼일 여학교를 다니던 시절 삼일학교를 다녔던 남학생에 얽힌 추억담이다.
7월, 〈여인 독거기〉(《삼천리》 1934. 7) 발표.
8월, 1932년 여름 총석정 해변에서 만난 구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총석정 해변〉(《월간 매신》 1934. 8)을 발표했다. 8~9월,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 8~9)을 발표했다. 김우영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쓰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9월19일 변호사 소완규를 통해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12,000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이 사실이 9월 20일자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최린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의 기사는 삭제되었고, 나혜석은 소송 취하조건으로 최린으로부터 수천 원을 받았다고 한다.
11~12월, 〈이탈리아 미술관〉(《삼천리》) 발표.

1935년
1월, 〈그 뒤에 이야기하는 제 여사의 이동 좌담회〉 (《중앙》 1935. 1).
2월,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 2)를 발표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조선을 떠나 미래를 향해 다시 파리로 가고 싶다는 희망과 의지를 담은 글이며, 이혼 후 자신이 겪은 조선 사회의 인심을 비판하면서 인습에 얽매인 정조관념의 해체라는 한 시대를 앞선 주장을 했다.
3월, 시 〈아껴 무엇하리 청춘을〉 발표(《삼천리》 1935. 3).이해 봄, 수원 서호 근처(臺?面 池里 557)에 집을 마련하고 약을 먹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파리에 가고 싶다고 하던 나혜석이 파리에 가지 못하고 수원에 거처를 마련한 이유는 경제 사정 등 여건의 불비함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몇 년 간 아이들을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어서였다.
6월, 《삼천리》에 〈구미 여성을 보고 반도 여성에게〉와 〈이성간의 우정론―아름다운 남매의 기〉 발표.
7월, 〈나의 여교원 시대〉 발표.
9월, 전남 광주에 살고 있던 김우영과 신정숙 사이에서는 아들 무武가 태어났다고 한다.
10월, 〈독신여성의 정조론〉(《삼천리》 1935. 10) 발표. 10월 24일 서울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의 조선관 전시장에서 ‘소품전’을 개최, 200여 점을 전시했으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첫 아들 선, 폐렴으로 열 두 살의 나이로 요절.
11월, 희곡 〈파리의 그 여자〉(《삼천리》 1935. 11) 발표. 구미 여행 당시 있었던 일과 조선에 와서 다시 최린을 만났던 일을 소재로 한 희곡이다.

1936년
1월,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삼천리》 1936. 1) 발표.
4월, 〈런던 구세군 탁아소를 심방하고〉(《삼천리》 1936. 4) 발표.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삼천리》 1936. 4) 발표.
12월, 소설 〈현숙〉 발표. 이혼 후 이 무렵까지 그린 것으로 〈수원 서호〉 〈인천 풍경〉〈별장〉〈화녕전 작약〉 등의 그림이 남아 있다.

1937년
4월 〈애정에 우노라〉를 《삼천리》에 썼다고 하나 아직 해당잡지를 찾지 못했다.
5월, 〈나의 도쿄 여자 미술학교 시대〉(《삼천리》 1937. 5)를 발표.
10월, 소설 〈어머니와 딸〉(《삼천리》)을 발표했다. 이혼 후 하숙하고 있던 집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숙집 주인 여자가 딸을 시집보내려 하나 신식 공부한 딸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나는 갈등을 그린 소설이다. 이해 언젠가 시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동래로 달려 갔으나 김우영의 완강한 거부로 상청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이해 말, 김일엽을 찾아서 수덕사 견성암으로 갔다. 1943년까지 주로 수덕사 밑의 수덕 여관에 몸붙여 있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또 해인사, 다솔사 등 여기저기 절집 들을 돌아다녔으며, 지인을 찾아 서울을 오고 가기도 했다.
12월 자신의 연애관을 담은 〈영이냐, 육이냐, 영육이냐〉를 《삼천리》에 발표했다.

1938년
5월, 나혜석의 글 〈영이냐, 육이냐, 영육이냐〉에 대한 비판인 안덕근의 〈모윤숙 나혜석 씨의 연애관 비판〉이라는 글이 《삼천리》에 실림.
8월, 〈해인사의 풍광〉(《삼천리》) 발표. 해인사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지낸 기록이며 나혜석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글이다.

1939년
1월, 김우영은 전해 7월 신정숙과 이혼한 뒤 기독교 여성운동가인 양한나(양귀념)와 다시 결혼했다. 겨울 수덕여관에 머무르고 있는 나혜석에게 충남 홍성 출신의 젊은 화가 고암 이응노가 찾아와서 동료 화가로서 교분을 나누었다.

1940년
9월 김우영은 총독부 참여관參與官으로 승진하여 충청남도 산업부장이 되어 1943년까지 대전에서 살게 되었다. 김우영과 아이들이 대전에 사는 동안 나혜석은 종종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찾아가서 아이들을 만나 보았는데 이 사실을 안 김우영은 경찰을 시켜 나혜석이 다시 아이들을 만나러 대전에 오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1년
화가 이승만을 찾아가서 구미 여행 시에 사왔던 그림들을 맡겨두었던 것을 찾아간 적이 있다. 오빠 나경석이 만주 봉천의 살림을 정리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1943년
9월 김우영은 충남 산업부장직을 그만 두고 총독부의 농지 개발 영단의 이사, 중추원 참의가 되어 양한나와 서울 돈암동에서 살게 되었다. 나혜석은 아이들이 보고 싶어 돈암동으로 찾아가곤 했다.

1944년
수덕사를 떠난 나혜석은 아이들이 있는 서울에 나혜석은 더 자주 나타났다. 여학교를 마치고 개성에서 학교 선생을 하는 딸 나열에게 얼마간 의탁하기도 했고 서울의 오빠 집에 갔다가 오빠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10월 21일 오빠 나경석의 주선으로 서울 인왕산 청운 양로원에 맡겨졌다. 심영덕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갔다가 나고근으로 고쳤다고 한다. 나혜석은 양로원에서 생활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틈만 있으면 빠져 나와 서울의 친지들을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하는 행동을 되풀이 했다.

1946년
봄, 서울의 돈암동 김우영의 집으로 나혜석의 편지가 왔다고 한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는 것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해방 후 김우영은 부산에서 다시 변호사업을 시작했다.

1947년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이 안양의 경성보육원에서 나혜석을 만났고 나혜석이 자서전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을 청서해 주기도 했다.

1948년
12월 10일 원효로 시립 자제원(지금의 용산 경찰서 자리)에서 사망했다.

1949년
1월부터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반민법’ 해당자들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기 시작함.
1월 13일 최린 검거됨. 1월 23일 김우영 검거됨.
2월 7일 이광수 검거됨.
3월 14일자 《관보》에 나혜석 사망 사실이 공고되었다.

목차

판권소개
차례
◎ 발간사
일러두기

소설
희곡
수필
평론
작품 해설 | 나혜석의 삶과 문학활동
작가 연보
연구 논문
책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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