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쇼팽과 그녀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삶에 여전히 중요한 화두를 던지는 케이트 쇼팽의 단편소설 다섯 편과 각 소설을 옮긴 번역가가 쓴 에세이 다섯 편을 엮은 책이다. 책은 어릴 적부터 지녀온 오랜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 단계 성장하는 흑인 노예의 이야기를 담은 「바이유 너머」로 시작되어,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의문을 던지고 개인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결심하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뜻밖의 사건」, 여성과 흑인을 향한 이유 없는 편견을 놀라운 반전으로 재치 있게 풀어낸 「데지레의 아기」, 엄마로서의 역할과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소비라는 행위로 나타나는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이미 결혼했으나 다른 남자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품위 있는 여인」으로 이어진다. 각 소설 뒤에는 5인의 번역가가 각자의 삶과 고민을 솔직하고 개성 있게 풀어낸 에세이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케이트 쇼팽은 여성의 감정과 욕망이 존중받지 못했던 19세기 후반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욕구를 대담하게 드러내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소설을 끊임없이 집필하였다. 그녀가 소설에서 보여준 당대 여성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쑥 고개를 드는 욕망을 따를지 말지 갈등한다. 케이트 쇼팽의 소설과 번역가 5인의 에세이는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와 고민이 결국 시간이 흐르더라도 비슷한 지점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모두가 같은 길을 가야 할 필요가 없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 책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는 위로가, 가야 할 길을 알면서도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작은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
책 속 한 구절
라 폴은 망치로 때리는 것처럼 쿵쿵대며 뛰는 가슴 가까이 소년을 껴안았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더니 바이유의 얕은 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해 반대편 기슭에 다다를 때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 p.11 「바이유 너머」 중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모든 아픔이 저절로 치유되지는 않는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선을 넘어갈 용기. 트라우마를 마주할 용기. 내게 아픔을 준 사람들을 용서할 용기. 그리고 울고 있는 과거의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줄 용기 말이다.
--- p.22 「선을 넘을 용기」 중에서
도러시아는 두려움보다는 놀라움과 의심을 자아내는 기이한 유령을 보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두 달 전 도러시아를 떠나갔던, 그녀가 사랑했고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 p.29 「뜻밖의 사건」 중에서
비도덕적이거나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와 그 선택을 존중받고 비난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 p.38 「뜻대로 하세요」 중에서
아기가 태어난 지 백 일쯤 된 어느 날, 눈을 뜬 데지레는 뭔가가 자신의 평화를 짓밟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눈치채길 힘들 정도로 너무 사소한 변화였다.
--- p.46 「데지레의 아기」 중에서
데지레를 사랑하고 버렸던 모든 선택에 대가가 남았을 뿐이다.
--- p.57 「마음의 소리는 사양하겠습니다」 중에서
사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힘들고 고된 엄마의 역할에서 벗어나 책임감을 내려놓고 쉬면서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본능적인 욕구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 p.65 「실크 스타킹 한 켤레」 중에서
몇 천 원짜리 스타킹, 화이트 와인 한 잔, 마치 내 옷인 양 과감하고 튀는 옷을 마음껏 걸쳐볼 수 있는 피팅룸, 영화 티켓 한 장.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소비하는 그런 작은 것들은 마침내 나를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만든다.
--- p.73 「나의 노란 스타킹」 중에서
그녀는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자신의 섬세한 손끝으로 그의 얼굴이나 입술을 더듬고 싶었다. 그에게 다가가 뺨에 대고 뭐든 속삭이고 싶었다. 품위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p.82 「품위 있는 여인」 중에서
그런데 삼사일째 되던 밤에 ‘내가 여기서 혼자 뭘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더니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깊은 외로움이 몰려왔다. 집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사회적 고립감을 그 아름다운 캠프장에서 실감하다니 아이러니했다.
--- p.87 「이제는 고립되지 않으렵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