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 1804-1864)
나다니엘 호손은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단편작가로, 허먼 멜빌, 월트 휘트먼과 함께 미국 고유의 문학적 정체성을 확립한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알레고리와 상징의 대가였던 그는 『주홍 글자』(1850), 『일곱 박공의 집』(1851) 등의 걸작을 통해 인간 영혼의 어두운 심연을 탐구했으며, 죄와 죄책감, 위선과 속죄라는 보편적 주제를 미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상화했다.
호손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문이 짊어진 무거운 유산을 알아야 한다. 그의 최초의 미국 선조 윌리엄 해손은 17세기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치안판사로서 퀘이커교도 여성에게 공개 채찍형을 선고할 정도로 청교도 정통주의를 엄격하게 수호한 인물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고조부 존 해손이 1692년 세일럼 마녀재판의 세 명의 판사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한 이 암흑의 역사는 호손의 영혼을 평생 짓눌렀고, 그는 성인이 된 후 가문의 이름에 'w'를 추가하여 'Hathorne'을 'Hawthorne'으로 바꾸었다. 이는 피로 얼룩진 선조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자 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1804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태어난 호손은 네 살 때 선장이던 아버지를 황열병으로 잃었다. 홀어머니와 두 누이와 함께 외가에 의탁해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고독과 결핍은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1821년부터 1825년까지 메인주 보든 대학에서 수학하며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피어스,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와 평생의 우정을 쌓았다.
대학 졸업 후 호손은 세일럼의 어머니 집 다락방에서 12년간 은둔하며 글쓰기 수련에 몰두했다. 그는 이 시기를 "유령이 떠도는 방에서 보낸 꿈같은 고립의 세월"이라 회고했다. 이 긴 침잠의 시간 동안 그는 수많은 단편을 쓰고 폐기하며 독특한 문체와 심리적 통찰력을 연마했다. 1828년 자비로 출판한 첫 장편 『팬쇼』는 후에 스스로 회수하여 폐기할 정도로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1837년 단편집 『두 번 들려준 이야기』로 마침내 문단의 인정을 받았다.
1838년 초월주의 화가 소피아 피바디와 약혼했고, 1839년부터 1841년까지 보스턴 세관에서 검량관으로 일했다. 1841년에는 초월주의 실험 공동체인 브룩 팜에 참여했으나 농장 노동의 고단함과 창작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에 실망하여 6개월 만에 떠났다. 이 경험은 후에 『블라이드데일 로맨스』(1852)의 소재가 되었다.
1842년 소피아와 결혼한 호손은 콩코드의 '올드 맨스'에 정착했다. 이곳은 랄프 월도 에머슨의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으로, 에머슨이 『자연』을 집필한 곳이기도 했다. 호손 부부는 이웃인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소로, 브론슨 올콧 등 초월주의자들과 교류했다. 소피아 호손은 남편과 소로, 에머슨이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날을 일기에 기록했다: "소로는 열정적인 디오니소스적 춤과 바쿠스적 도약을 선보였고, 호손은 외투를 두른 채 그리스 조각상처럼 장엄하고 중후하게 미끄러졌으며, 에머슨은 지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허공에 쓰러질 듯 기울어졌다."
1846년 단편집 『오래된 목사관의 이끼』를 출간하고 세일럼 세관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849년 정권 교체로 해고당했다. 같은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호손은 "저주받은 도시"라 부르던 세일럼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시기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역설적으로 그의 걸작 『주홍 글자』를 탄생시켰다. 1850년 출간된 이 소설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영국과 미국의 비평가들은 호손을 "미국 최고의 로맨스 작가"로 칭송했다.
1850년 여름, 버크셔 지역의 레녹스에서 당시 『모비 딕』을 집필 중이던 허먼 멜빌과 조우했다. 멜빌은 호손의 『오래된 목사관의 이끼』에 대한 열정적인 서평을 발표하며 그를 "미국의 셰익스피어"로 칭송했고, 『모비 딕』을 호손에게 헌정했다. 멜빌은 소피아에게 "호손의 육체적 존재가 지적, 영적 존재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최초의 인물"이라 말했다.
1851년 『일곱 박공의 집』을 출간하고, 1852년에는 대학 동창 프랭클린 피어스의 대통령 선거 운동을 위한 전기를 집필했다. 피어스가 미국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호손은 1853년 영국 리버풀 주재 미국 영사로 임명되어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갔다. 1857년 영사직을 사임한 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마지막 장편 『대리석 목신』(1860)을 집필했다.
1860년 콩코드의 '웨이사이드'로 돌아온 호손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아마도 위암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인해 여러 편의 미완성 로맨스를 남긴 채, 1864년 5월 19일 뉴햄프셔주 플리머스에서 옛 친구 프랭클린 피어스와 화이트 마운틴 여행 중 잠들 듯 세상을 떠났다. 향년 59세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롱펠로우, 에머슨, 올콧, 올리버 웬델 홈스 등 당대 미국 문학계의 거장들이 운구를 맡았으며, 콩코드의 슬리피 홀로우 묘지 '작가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롱펠로우는 1866년 호손을 추모하는 시 「린의 종소리」를 발표했다.
호손의 문학은 '어둠의 낭만주의'로 분류된다. 당대의 초월주의자들이 인간 본성의 선함과 자연 속에서의 영적 각성을 노래할 때, 호손은 인간 영혼 깊숙이 도사린 원죄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의 작품들은 죄, 죄책감, 악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임을 경고하는 우화들이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역사를 배경으로 한 그의 이야기들은 역사적 로맨스에 상징주의와 깊은 심리적 주제를 결합하여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독특한 문학 세계를 창조했다.
에드거 앨런 포는 호손의 문체를 "순수 그 자체"라 평했고, 헨리 제임스는 그를 "아름답고 자연스럽고 독창적인 천재"로 묘사하며 "누구도 그처럼 삶을 바라보지 못했고, 누구도 그의 비전을 그토록 성공적으로 표현한 문학적 형식을 갖지 못했다"고 극찬했다. 20세기의 대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헨리 제임스와 윌리엄 포크너만이 호손의 "미국 최고의 소설가"라는 지위에 도전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호손의 영향은 멜빌, 제임스, 포크너를 넘어 H. P. 러브크래프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존 업다이크, 존 어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는 심리적 사실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미국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