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는 복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망가뜨리고,
그들을 지탱시키는 마음의 기둥을 허물어뜨릴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을 알아버렸다.
제국은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해도,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떠난 여자와 기다리는 남자.
그러나 사랑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은 없다.
[본문 첨부]
“그럼, 이제 아저씨에게 가면 돼요?”
“음?”
“선택하라고 했잖아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잊었어요? 졸업과 동시에 내게 올래, 원서 넣을래?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여리는 초조해져 말을 덧붙였다.
“그랬지.”
그제야 제국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선택했다고요.”
“왜?”
“그래서 제가 아저씨에게 가는 것이 싫다고요?”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버릴 것이다. 그게 물질이라면 물질, 감정이라면 감정. 뭐든 이 세상에 단 하나, 그를 지탱할 수 있는 뭔가를 빼앗아 허물어뜨릴 생각이었다. 그건 황제국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사이의 교집합, 바로 제국의 감정을 말이다.
“싫어요?”
제국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리는 숨을 죽인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렇게까지 용기를 낸 이유는 딱 하나였다.
눈은 열여덟이요, 입술은 스물여덟이라고 말했을 때 자신의 입술에 닿은 민감한 욕망의 잔재가 여전히 입술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였다.
“싫으냐고요.”
“솔직히 말할까?”
제국이 아주 느릿느릿하게 물었다.
“해요.”
이상하게 목이 메어 숨을 쉴 수가 없었지만, 드러나지 않도록 간신히 애쓰며 무겁게 침을 삼켰다.
“정말?”
“뜸들이지 말고 하라니까요.”
“말하면 도망갈 텐데?”
제국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그건 말해 보면 알겠지요.”
“감당하지 못할 건데?”
“어울리지 않게 왜 이래요?”
여리는 급기야 신경질을 부렸다. 아직 감정 조절에 미숙함을 절감한 그녀는 이내 후회하며 혀를 찼다.
제국이 천천히 일어났다. 마치 사자가 활개를 치는 형상이었다. 나른한 잠에서 깨어 한껏 기지개를 켜고는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정찰하는 표정으로 그 긴 몸을 일으켰다.
여리의 멍한 시선이 일어나는 제국을 따라 높아지며 한껏 올려다보게 되었을 때.
“난 지금 너를 안고 싶어 죽을 지경이야.”
제국이 그녀의 귓바퀴에 덤덤한 어조로 찔러 넣었다. 봄바람처럼 아주 나직이.
여리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눈꺼풀을 천천히 내려뜨리다가 확 떴다. 멍했던 동공에 경악이 들어찼다.
“그것 봐.”
제국이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한번 잡은 다음, 정신 차리라고 툭툭 두드리며 그녀를 비켜섰다.
“말했잖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지금!”
여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돌렸다.
“제가 그걸 감당할 수 없다고 했나요?”
“뭐?”
이번엔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제국이 몸을 획 돌렸다.
“제가 왜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죠?”
이런 전개를 바란 것이 아닌지라 당혹스러움을 감추었으나, 얼굴의 열기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쪽이 더 손쉬울 것이다.
여리는 갈비뼈를 바스러뜨릴 듯 두드려대는 심장소리에 먹먹해졌지만 끈질기게 버티고 섰다.
“마치 작정하고 있던 사람처럼 말하는군.”
제국의 몸이 나른하게 되돌아왔다.
“했어요.”
“음?”
“작정하고 있었다고요.”
여리는 벌게진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제국의 완벽한 평면 얼굴에 얼핏 감정이 입체적으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의도가 뭐야?”
그답지 않게 약간 긴장한 것 같기도 하다.
“의도라니요?”
반대로 여리는 마음이 오히려 편해졌다.
그래, 뭐 해볼 만해.
느닷없이 용기가 생겨 여리로선 객기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네가 이러는 의도.”
“남녀가 그렇고 그렇게 동한다 말고는 달리 의도가 있을 턱이 있나요?”
“지금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싶다?”
“뭐, 그렇다고 해두죠.”
“날 가지고 놀 작정이라면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아.”
냉담한 눈동자에 차디찬 기운이 뻗치더니 오싹할 정도로 굳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허를 찔린 여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덤덤했던 그의 표정에 아주 잠깐 드러난 희미한 긴장으로, 그야말로 아주 잠깐 잊었었다.
그는 감정이 없어보였고, 무엇보다도 그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저…….”
섣불리 달려들었다가는 이쪽이 잃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손톱을 깎아주는 자상한 또 다른 일면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수도 있는 사람임을 아주 잠깐 잊었던 것이다.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