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사랑하지 않을 자신 있어?’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 은여경.
“지금도 아파…… 너 없으면 내내 이렇게 아플 것 같아. 나, 어떡하지?”
그녀를 사랑했기에 버림받은 남자 도연준.
“……우리 이제 친구 같은 거 그만두자.”
우정을 선택했지만 누구보다 그녀의 곁에 있어주는 남자 한동우.
한순간 타오르고 꺼지는 불꽃같은 사랑이 전부인줄 알았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우리 연애하는 거야. 하지만 기억해. 절대 사랑은 안 해.
잊지 마. 날 사랑하는 순간 우린 영원히 헤어지는 거야.”
[본문 첨부]
바(bar)에서 술을 마실 땐 몰랐는데 술집 문을 나서려고 보니 어두운 거리에 장맛비가 시원스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여름의 태워 버릴 듯 뜨거운 태양이 한낮 내내 내리쬐어 콘크리트 바닥을 잔뜩 달구어 놓았다. 그 콘크리트 바닥이 갈증을 해소하고도 남을 만큼 쏟아져 내리는 비의 양에 골목길 움푹움푹 파진 자리에는 크고 작은 동심원이 그려지고 있었다.
동우는 흔쾌히 술친구가 되어 주었던 경완 선배를 먼저 보내놓고 혼자서 위스키 한 잔을 더 마시던 중, 지하 1층에 위치한 바(bar)에서 대리기사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바(bar)에서 나서기 전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눈에 보이는 계단을 따라 올라왔는데, 아마도 출입구와 반대로 건물 뒤편으로 이어져 있는 후문으로 잘못 나온 모양이었다. 길치는 아니었지만, 선배와 오랜만에 회포를 푼답시고 마신 술의 양이 제법 많았던 상태에서 홀로 한잔을 더 마신 것이 쥐약이었는지 꽤 오른 취기 때문에 입구를 잘못 찾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밖으로 이어진 낮은 계단 아래 문 옆으로 빈 술병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른 건물들의 문 옆에도 같은 모양의 상자들이 쌓인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불 밝힌 유흥가의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뒷골목쯤 되는 곳인가 보다. 저만치 골목 입구 쪽에 촉수 낮은 외등이 그나마 외롭게 방치되어 있는 골목길을 희미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대리기사 생각을 잠시 잊은 동우는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라이터를 찾아 손에 쥐었다. 입에 문 담배 가까이로 라이터를 가져다 대고 불을 켜기 직전, 빗소리와 범벅이 되어 들려오는 수상쩍은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고 소음의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런…….
멀리서 비추는 외등 때문에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비오는 골목 한쪽에서 부둥켜안은 채 짙고 농밀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남녀 한 쌍의 모습이 보였다.
어지간히 달아올라 있는 모양인지 벽으로 여자를 밀어붙인, 제법 훤칠한 남자의 뒷모습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격정적이었다.
남의 애정행각을 구경하고 있을 정도의 허접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동우는 피우려던 담배를 도로 집어넣으며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쫙!
파열음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몸을 돌리던 동우는 발길을 멈추고 다시 시선을 되돌렸다. 아마도 여자의 손이 남자의 뺨을 강타한 모양인지 제법 큰 키의 호리호리한 남자의 고개가 약간 돌아가 있었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합의하에 이루어졌던 키스가 아니었나? 혹시 여자에게 도움이 필요한 건가?
특별히 정의감을 갖고 있지는 않더라도 눈앞에서 여자가 봉변을 당하고 있다면 모른 척 그대로 등을 돌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취한 상태이긴 하지만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난봉꾼 하나로부터 여자를 빼내올 정도의 능력은 될 것이었다.
동우가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골목길로 발 하나를 들이밀었을 때였다.
“너랑 나, 이제 우린 완전히 끝난 거야.”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들려온 목소리는 마치 사막처럼 건조하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말을 뱉어낸 여자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을 담고 있지 않았다.
돌아갔던 고개를 바로 하며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굳이 반항하지 않는 여자는 힘없이 남자의 품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뭐야…… 그저 그런, 연인들 사이의 작은 다툼이었나 보네.
공연히 끼어들었다가 낭패를 볼 뻔했다는 생각을 했다.
“으흑…….”
남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여자를 안은 채 소리 내어 우는 남자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여름 밤, 어두운 빗속 골목길에서 제대로 영화 한 편을 찍고 있는 두 남녀를 바라보는 동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남자의 구애에 밀당을 하고 있는 여자라……. 희미한 불빛에 잠시 드러났던 여자의 창백한 얼굴도 밀당을 위한 연극이었던가? 참으로 여자란 존재는 이해 불가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는 두 인영으로부터 채 시선을 돌리기 직전, 남자의 목을 휘감으며 아직도 울음이 그치지 않고 있는 남자의 입술을 뜨거운 키스로 공략하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
울고 있는 남자를 키스로 달래는 여자. 참으로 재미있는 광경이 아닌가? 눈을 돌릴 틈을 주지 않는 여자 때문에 본의 아니게 공짜 구경꾼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어느새 남자의 울음소리가 그치고 두 사람의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부르르르…….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핸드폰이 진동을 하는 바람에 퍼뜩 정신이 들어왔다.
참, 대리기사를 잊고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