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자신을 사랑해줄 거라 맹세했던 그였다.
그러나 따듯한 품과 환한 미소는 한순간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 까맣게 타버린 심장의 상처뿐.
그녀는 그가 아니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거라 믿었다.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해주던 그녀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배신과 죽음의 공포는
자신의 삶의 이유를 ‘복수’라는 단어로 단정짓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가 사랑을 말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떠나간 남자와 기다리는 여자.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본문 맛보기]
날 죽이진 않을 거야.
어스름한 어둠이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했을 때, 영광은 놈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영광은 전신을 난타하는 통증으로 정신이 멍해져있었다. 코가 일그러졌는지 심하게 아팠고 그보다 더 눈이 아팠다. 영광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부풀어 올랐는지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지럽기까지 했다. 구토도 났다. 또한 입안이 터졌는지 찝찔했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뜨겁고 걸쭉하게 느껴지는 무엇이 흘러내렸는데 달빛이 지나치게 밝은 검은 하늘에 비가 내릴 리 없으니 그건 피일 확률이 농후했다.
다시 돼지 같은 놈이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뼈와 근육, 그리고 살로 구성된 어느 부위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 우리의 처음, 거기서 만나요.
그 모든 것은 휴대전화의 메시지로 시작된 일이었다.
이별에도 매너가 필요하다고 영광은 언제나 생각했다. 이별의 매너란 적어도 문자 메시지는 아니었다.
빌어먹을 휴대전화 메시지로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한 연인 아니 연인이었던 수정을 만나러 ○○저수지로 한달음에 달려간 영광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돼지같이 뒤룩뒤룩 살찐 거구 다섯이었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영광이 이곳까지 온 것은 수정과 처음 사랑을 나눈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처음이라는 두 단어가 말해주듯 두 사람의 처음이었던 그날 수정이 고집을 부려 그의 사색의 장소에 따라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몰입했다.
○○저수지에 도착한 영광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검은 승용차 두 대가 있었다. 아마도 낚시를 하러 온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하며 초조하게 수정을 찾고 있는 그에게 그 거구들이 다가 왔던 것이다.
“그짝이 조영광이여?”
가래 끓는 소리가 나는 음성으로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물었다. 더 짙어지는 잿빛에 묻혀 그 사내가 슈트 안에 받쳐 입은 하얀 셔츠만이 도드라졌다.
“누구십니까?”
영광은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모든 신경이 수정의 생각으로 몰려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영광은 처음부터 그들을 경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광은 이미 이성이 멀찍이 달아난 상태였다.
“그짝이 조영광인지 아닌지만 말하쇼.”
아주 무례한 어조였다.
“그렇습니다만?”
그제야 영광은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바람처럼 쓱 다가온 사내에게 멱살을 잡혔다.
“뭐, 뭡니까?”
어찌나 재빠른지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없었다.
“날 원망하지 말라고.”
사내에게서 지독한 구취가 난다고 느낀 순간 영광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의 어깨에서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났다.
“윽!”
이어 극심한 고통이 어깨를 난타했다. 사내가 상체를 숙였다. 놈이 척 하니 두 팔을 뻗었다. 영광이 방어태세를 채 갖추기도 전에 다시 멱살이 잡혔다.
극심한 분노를 느낀 영광은 놈의 코에 정통으로 이마를 박아버렸다. 윽, 비명을 지르더니 사내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저 시부랄 놈이!”
벌떡 일어난 사내가 코를 움켜지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저 시부랄 새끼 잡어!”
방어 자세를 잡은 영광은 사방을 돌아보았다.
“예, 형님!”
그때까지 방관자의 자세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던 나머지 사내들이 목을 꺾어 뿌드득 소리를 내며 영광에게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야구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영광은 육군 수색대 출신이었다. 군에서 특공무술을 배웠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다. 더군다나 첫 번째의 피습으로 어깨가 나가버려 한쪽 팔을 쓸 수조차 없었다.
사내란 모름지기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법이다. 영광은 재빨리 퇴로를 확인해 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젠 해 보는 데까지 해봐야만 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다리가 상대적으로 짧은 사내가 영광에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놈이 휘두를 때마다 방망이에서 휙휙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났다.
영광은 바람소리를 내는 야구방망이를 날렵하게 피하고는 놈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이어 시간차로 다가온 다른 한 놈의 턱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몇 번의 발길 질 이후 뒤통수에 강한 타격을 입고는 앞으로 꼬꾸라지듯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개노무새끼, 넌 뒤졌어.”
영광이 정통으로 코를 들이받은 사내가 씩씩 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멱살을 쥐더니 차량 보닛위에 던져버렸다.
둔한 통증이 내장을 온통 휘젓는 것만 같았다. 영광은 이를 악물었다. 코피를 줄줄 흘리던 사내가 주머니에서 철권 링을 꺼내 손가락에 꼈다.
피는 영광이 놈보다 더 흘리고 있었다.
어둠은 점점 더 짙어졌다. 어둠에 잠겨 검은 슈트를 입은 사내들의 와이셔츠만 점점 더 싸늘한 빛을 뿜어냈다. 그들을 한 대 때리면 거구 다섯 명에게 다섯 대를 맞았다.
결국 달빛이 서서히 내릴 무렵, 영광의 운동신경은 서서히 둔해졌다.
“죽여 버려.”
축 늘어져 코피를 흘리는 사내가 하는 말을 멍하니 들었다. 적어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애초에 했던 생각은 순진했다. 영광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마지막까지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돼지 같은 놈들은 머릿수로 그를 단숨에 휴지처럼 구겨버렸다. 그랬다. 영광은 정확히 휴지처럼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형님, 죽이라는 말은…….”
떡 벌어진 상체보다 다리가 상대적으로 짧은 사내가 난색을 표했다.
“뭔 잔말이 많아? 시부랄 피는 왜 안 멎어?”
“허지만…….”
“염병할 색꺄 던지라면 던져. 그래야 공 사장에게 받을 것이 많아질 테니까.”
공 사장? 공덕수?
영광은 흐려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으려 애를 썼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대단하십니다. 형님!”
곧 닥칠 죽음을 감지하면서도 영광은 어떠한 반항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운동신경은 이미 말살 되어버린 것이다.
영광은 짐짝처럼 두 대의 차 중 뒤차에 태워졌다. 이미 그의 사고는 정지 되어 있었다. 아니, 현실감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았다.
차가 달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모든 것이 무감각했다. 차가 섰다. 거구 두 명의 손에 차에서 끌어내려진 영광은 어디론가 질질 끌려갔다.
퉁퉁 부어 오른 영광의 눈에 아가리처럼 벌리고 있는 까마득한 절벽이 보였다.
아래에는 검은 저수지가 있었다. 낚시광이 아니고는 발길이 드문 음산한 곳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전까지 그가 즐겨 찾던 스케치하기에, 그리고 고민에 기꺼이 잠기기에 아주 적당한 장소였다.
놈들이 영광을 아래로 던져버렸다.
영광은 무감각했다. 깊은 어둠으로 떨어져 내리며 영광은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지극히 사랑했던 얼굴.
공수정 그리고.
- 우리의 처음, 거기서 만나요.
거기, 그에게 지옥이 된 바로 이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