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의 아버지.
사랑으로 혼이 빠져버린 어머니.
그 누구도 닮지 않겠다, 굳이 닮아야 한다면 차라리 아버지를 닮겠다.
절대 사랑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는 순간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 싶던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아버렸다.
그녀에게 사랑은 과분했고, 남자는 사치였다.
가족만을 위해 돈을 벌고 돈을 쓰던 그녀에게 삶은 고통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어느순간 곁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이전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본문 첨부]
열차 소리가 철커덕철커덕 빗장을 거는 듯 느껴졌다. 기차는 빠른 속력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한곳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 특별해 보이지 않고 그저 한결같은 풍경이었다.
산이 지나면 산골짜기에 낀 마을이 나오고, 마을이 지나는가 싶으면 말라가는 내[川]가 나왔다. 그러다가 다시 산, 마을, 계곡…… 끊임없이 이어지는 같은 풍경들은 성은의 취향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동대구에 당도했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을 때, 자는 것 같던 재현이 뜬금없이 물었다. 자못 심각한 물음이었는데, 야릇하게도 그녀의 귀에 심각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성은이 시선을 그에게로 서서히 돌렸다.
그의 표정에 동요가 스쳤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순간 어색해진 성은이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썼다.
정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첫눈에 두려움을 느끼다니, 성은은 자신이 이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단 세 번의 만남으로 마치 억겁의 시간에 무언가를 켜켜이 쌓아놓은 관계이기라도 한 듯, 아무리 눌러도, 눌러도 참아지지 않는 무엇이 심장을 뚫고나오게 하는 강렬한 힘을 느끼게 될지도 몰랐다.
열차가 서자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주변은 조용하고 어색한 침묵만 감돌았다.
“저를 무서워하시는군요?”
덜컹, 열차가 요동을 하며 차가 출발하자 몸이 약간 흔들렸다. 그때 재현이 결심한 듯 입을 떼었다. 그의 따스한 눈빛에 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해 보려는 장난스러운 일렁임이 보였다.
“그새 소문을 들었군요.”
재현의 의도를 알아채고 그에 발맞춰 농조로 말하고도, 성은은 평소 안하던 짓을 한지라 괜히 머쓱해졌다. 성은은 매사 심각하기만 하고 익살맞은 사람이 아니었던 터라 말해놓고도 민망했던 것이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의 말에 성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 철렁, 간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가 가슴을 움켜쥐고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는 심각하게 말했다. 그녀는 너무 심각하게 바라보니 정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성은은 왠지 무작정 말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마십시오.”
“…….”
“저, 오늘 무슨 날입니까?”
“네?”
아무런 요점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툭툭 던지는 재현의 말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성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세 시간이나 걸리는 지루했을 열차여행을 저에게 한눈에 반한 여자와 동석하다니, 확실히 오늘 무슨 날인 게 틀림없습니다.”
성은은 재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보일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성은 씬 눈이 참 낮아요, 낮아. 아니 이런 별 볼 일 없는 저에게 그렇게 담뿍 빠지시다니요. 사람 보는 눈이 낮다니까요. 이거 정말 큰일입니다.”
그가 뱉는 말 하나같이 정말 뜬금없었다.
“제가 뭘?”
성은은 기가 막혀 재현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저에게 홀딱 빠진 표정인 거 아십니까?”
부드럽게 휘어져 올라가는 눈매와 입매, 그리고 심장을 파고드는 관능적인 눈빛. 공중에 부유하는 먼지 알갱이들마저 그의 어깨에 떨어지면 반짝이가루가 되는 착시현상과 함께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위가 조여졌다.
“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성은은 멍하니 말을 흘리듯 대꾸했다.
“ditto.”
그가 불쑥 말했다.
“무슨?”
“동감, 요즘 밤이면 밤마다 대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며 로맨틱 영화를 섭렵하는 중입니다. 로맨틱 영화의 클래식이죠. 사랑과 영혼.”
“아!”
성은도 그 영화가 기억이 났다. 영화를 본 뒤 사흘밤낮을 울었던 기억도 있었다.
“거기서 패트릭 스웨이지가 말하더군요.”
그리고는 재현이 껄껄 웃었다.
“언젠가 꼭 써보고 싶었습니다.”
성은은 눈만 깜빡이며 그가 하는 양을 보았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곤 마치 공모하는 사람처럼 은밀한 표정으로 성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말은?”
“저도 홀딱 반했다고.”
이 사람, 지금 날 가지고 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