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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동성애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정치/사회

성서와 동성애

혐오와 억측을 넘어, 성서 다시 읽기
소장종이책 정가13,000
전자책 정가30%9,100
판매가9,100

성서와 동성애작품 소개

<성서와 동성애> 성소수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조금씩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찬반’의 문제로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부정적 편견에 개신교가 깊이 개입해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반동성애’ 운동이 가능했던 데는 개신교 우파 목회자들의 혐오주의적 성서 해석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혐오주의적 해석의 설교가 반복되며 집회나 시위 등 신자들의 실질적인 ‘반동성애’ 운동으로 이어졌다.
『성서와 동성애』는 ‘반동성애’의 근거가 되는 성서 구절을 역사적 개연성을 좇으며 정치사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책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성서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해석에 반기를 들며, ‘반동성애’로 해석되는 구절들을 치밀하게 다시 살핀다. 이는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을 논하기 전에, 전제를 의심하는 질문을 건너뛰지 않기 위해서다. ‘성서에서는 정말 동성애를 반대하는가?’ 이 질문은 또한, 종교 여부를 떠나 ‘존재를 반대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으로 향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출판사 서평

성서는 정말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가?
개신교 우파의 혐오주의 해석을 반박하다

‘반동성애’를 외치는 목소리는 성소수자 인권 보장이 외쳐지는 곳곳에서 동시에 들려오곤 한다. 누군가의 성정체성을 반대할 수 있다는 주장 자체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러한 주장이 가장 크게 울려 퍼지는 스피커가 다름 아닌 종교계라는 사실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개신교 우파를 중심으로 ‘반동성애’를 외치는 이들은 몇몇 성서 구절을 근거로 혐오주의를 정당화하고, 급기야는 ‘종교적 신념’으로 존재를 반대하겠다는 칼날을 들이민다. 그러한 칼날이 휘둘러지는 곳에 언제나 ‘하느님’과 ‘천국’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성소수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조금씩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찬반’의 문제로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부정적 편견에 개신교가 깊이 개입해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반동성애’ 운동이 가능했던 데는 개신교 우파 목회자들의 혐오주의적 성서 해석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혐오주의적 해석의 설교가 반복되며 집회나 시위 등 신자들의 실질적인 ‘반동성애’ 운동으로 이어졌다.
2016년 총선을 기점으로 ‘반동성애’를 주요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기독자유당이 창당했다. 극우주의적 담론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동성애 찬반’ 논의를 더욱 열띠게 만들었고, 극우주의적 종교 지도자가 정당 창당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적 인물로 소환되는 과정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각종 미디어와 언론, 또 다른 종교 지도자 등을 통해 계속해서 증폭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성서는 정말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마치 그것은 당연한 전제처럼 가정된 채, 성소수자를 종교적 신념으로 ‘배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라는 기이한 선택지만 남은 듯했다. 이러한 논의는 비종교인, 비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성서에서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주장을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서는 동성애를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성정체성이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아마도 가장 정확한 해석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개신교 우파가 인용하는 성서 구절도 〈레위기〉 20장 13절, 〈사사기〉 19장 22절, 〈로마서〉 1장 26절, 〈고린도전서〉 6장 9절 정도에 국한된다. 겨우 3~4개 텍스트가 전부인 것이다. 이마저도 남성과 남성의 성관계만이 언급되고 있으며, 저자는 이때에도 동성애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본다. 당대의 시대적 상황, 역사적 맥락 등을 고려해 해석한다면 그 구절에는 동성애 비판이 아닌 다른 데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반동성애’를 외치는 개신교 우파가 근거로 삼는 3~4개 성서 구절들을 철저히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여성과 여성의 동성애를 비롯해 다른 성소수자들을 언급하거나 ‘반대’하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으며, 직접적으로 ‘남성과 남성의 성관계’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도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그 비판은 결코 ‘동성애’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남성과 남성이 성관계하는 것을 비판하는 성서의 구절들에 대해 문맥과 사회, 역사적 맥락을 최대한 충실히 고려하여 재해석하는 시도를 하고자 했다. 이런 시도를 성서 비평학에서는 ‘역사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좀 더 세밀하게 말하면 나는 이 텍스트들에 대한 정치사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즉, 성서에서 남자끼리 성관계하는 것에 반대하는 구절들은 각기 다른 정치적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면서 그 본문을 해석하고자 했다.”(13쪽)
『성서와 동성애』는 ‘반동성애’의 근거가 되는 성서 구절을 역사적 개연성을 좇으며 정치사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한 책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성서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해석에 반기를 들며, ‘반동성애’로 해석되는 구절들을 치밀하게 다시 살핀다. 이는 성소수자에 대한 ‘포용’을 논하기 전에, 전제를 의심하는 질문을 건너뛰지 않기 위해서다. ‘성서에서는 정말 동성애를 반대하는가?’ 이 질문은 또한, 종교 여부를 떠나 ‘존재를 반대할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으로 향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혐오와 배제의 정당화에서 폭력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시선으로 다시 출발하기

『성서와 동성애』는 대표적인 ‘반동성애’ 텍스트로 거론되는 〈사사기〉 19장 22절, 〈로마서〉 1장 26절, 〈레위기〉 20장 13절, 총 3개의 구절을 재해석했다. 〈사사기〉 19장 22~23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낯선 남자 방문객을 묵게 한 노인의 집 앞에 동네 청년들이 몰려들어 “노인의 집에 들어온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집주인 노인은 청년들을 만류하며 “제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마시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반동성애’로 해석하는 이들은 동네의 청년들이 남자 방문객과 ‘관계를 좀 해야겠다’고 말하는 것을 ‘집단 동성 강간’으로 해석하고, 노인이 ‘제발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말라’며 만류하는 것을 ‘동성애는 죄악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 자체로도 의문이 남지만, 이 구절 앞뒤의 이야기까지 모두 살펴보면 결코 타당하지 않은 해석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동네 청년들에게 ‘내놓아진’ 사람은 낯선 남자 방문객이 아닌 그의 아내였을 뿐만 아니라, 동네 청년들이 노인의 집에 달려들어 남자를 끌어내라고 소리 친 이유도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사기〉의 필자, 시대적 상황, 정치적 이해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해석을 시도하며 이 구절에서 소거된 한 사람의 목소리, 바로 낯선 남자 방문객 대신 동네 청년들에게 끌려간 아내에 주목한다. 기 드 모파상의 소설 〈비곗덩어리〉의 시각을 참고하며, 저자는 ‘집단 강간 사건’을 다루는 구절 어디에서도 발화되지 않은 한 여성의 소거된 목소리에 집중한다. ‘반동성애’로 해석되는 구절을 ‘이데올로기의 폭력’으로, 다시 말해 개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도구화하며 공존의 질서를 구상하는 폭력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저자가 〈사사기〉 19장을 읽는 일을 애도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이유다.
〈로마서〉 1장 26절은 ‘영원한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형상으로 대체’한 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죄’의 결과가 ‘부끄러운 정욕’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이때 ‘부끄러운 정욕’이라는 말이 ‘동성애’로 해석되곤 한다.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1장 26~27절의 이러한 내용은 언뜻 보기에 정말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 구절 역시 치밀한 해석을 시도하며 비판의 대상을 다시 찾아낸다. 로마의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 〈로마서〉는 당대의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 다분히 정치적인 텍스트라는 것이다. 즉, 당대 바울의 포용주의와 로마의 분리주의에 대한 이해 없이 이 텍스트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저자의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로마서〉 1장 26절을 통해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닌 ‘권력형 성폭력’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텍스트를 편견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억측일 수 있는지 알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레위기〉 20장 13절은 ‘반동성애’로 해석되는 성서 구절 가운데서도 가장 폭력적인 것으로 읽히는 구절이다. 그 이유는 앞서의 두 구절과 달리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 때문에 개신교 우파의 혐오주의적 해석도 신빙성을 얻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 구절 역시 ‘동성애’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우선, 문자주의적으로 보더라도 여러 성적 관계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말하는 〈레위기〉 20장에서 ‘여자가 같은 여자와 동침’하는 항목은 발견되지 않는 것이 첫 번째다. 그렇다면 ‘남자와 남자의 동침’만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유대왕국의 멸망 이후 옛 유대왕국의 땅으로 귀환한 유대 귀환 공동체 내부의 정치적 갈등, 구체적으로 지방성소와 중앙성소의 제사장 간 갈등에 주목한다.
당시 지방성소에는 ‘히에로스 가모스’라는 예배가 있었다. 제사장들이 신의 역할을 대행해 숭배자들과 만드는 ‘가상 결혼식’이었다. 이 의례는 제사장과 숭배자들이 서로 얽혀 노래하고 춤추며 함께 식사하고, 그 절정에 신부와 신랑이 동침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당대 정치나 종교 지도자 중에서 이미 여성이 사라진 때에, 이 ‘가상 결혼식’ 의례의 대미를 장식하는 ‘동침’은 남성 제사장과 남성 숭배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방성소에서 이뤄지던 ‘히에로스 가모스’를 타락한 우상숭배로 간주하기 위해, 중앙성소의 예배만을 ‘성결’한 것으로 말하기 위해 ‘남자와 남자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는 구절로 “공포의 퍼포먼스를 위한 법적 알리바이”를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해석 위에서 〈레위기〉 20장 13절의 비판이 결코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 구절에는 당대 유대 귀환 공동체 지배 세력의 분리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고 해석한다. 이 같은 순결주의 정치학이 만들어낸 배제와 폭력을 돌아보는 데서 이 구절의 해석을 다시 출발하자고 요청한다.

개신교 독자정당의 명분이 된 ‘반동성애’와
과장된 포용의 제스처를 취하는 ‘계몽적 보수주의’의 등장
한국 사회 극우주의와 대형교회 사이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돌아보다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성서 해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반동성애’를 종교적 신념으로 내세우며 타인의 존재를 ‘반대’하는 폭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동성애’를 외치는 목소리는 동성애자를 구금하거나 치료해야 하며, 심지어 실형에 처해야 한다는 등의 점점 더 극단적인 주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과연 성서에 대한 오해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한 해석을 반박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2016년 4.13총선과 반동성애 혐오동맹 출현의 종교정치학을 살피는 ‘더하는 글’은 한국 사회 극우주의와 대형교회를 가로지르는 자리에서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살피는 글이다. 2016년 총선을 기점으로 창당한 기독자유당과 함께 혐오주의의 부상으로 떠오른 ‘반동성애’ 논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내세우는 어젠다 가운데 가장 확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2017년 4월 25일 대선후보 초청 4차 토론회 당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하여금 ‘동성애에 반대한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게끔 유도한 것은 ‘동성애’ 문제가 정치에서 여전히 중도층을 보수와 접맥시키는 요소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반동성애’는 개신교 독자정당이 기존의 극우주의 정당과 연합하지 않고 독자정당 노선을 고수하는 명분으로 기능한다.
저자의 논의는 개신교 우파의 정치적 의도와 ‘반동성애’의 연결 고리를 분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개신교 우파의 ‘반동성애’ 운동과 평행하는, ‘계몽적 보수주의자’들의 등장과 정치적 ‘신상품’으로서 기능하는 성소수자 인권의 대두다. 계몽적 보수주의자들은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목사들의 “논리가 막무가내로 퍼부어대는 비난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것이 ‘관용’의 태도와 충돌한다는 것을 인식한 이들이다.
“대체로 요즈음 급성장하고 있는 대형교회들에선 전광훈과 기독자유당, 그리고 한기총 유의 반동성애 혐오주의적 담론에 공공연히 동조하는 분위기를 거의 엿볼 수 없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전작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에서 정의하고 분석했던 ‘웰빙보수주의’(품격 있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성찰, 웰빙적 문화 실천이 대형교회의 보수주의적 정치성과 결합함으로써 나타난 태도)가 정치적 영역으로 확산된 것을 ‘계몽적 보수주의’로 정의한다. ‘계몽적 보수주의’는 대형교회의 엘리트 신자들이 중심이 되며,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모더니즘을 원전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진단하는데, 이에 따라 “섹슈얼리티에 대한 실제 인식은 보수적이지만 대외적 행동은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과장되게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동성애 반대 주장을 펴는 목사들의 비논리와 시대착오적 독선이 그것을 알아챈 이들의 계몽적 자의식을 부추겼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강남권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사회적, 경제적 자본을 가진 이들의 ‘계몽적 보수주의’는 ‘관용’의 가치를 더 많이 적용시키는 방향으로 성소수자 인권 향상에 기여하기도 할 것이다. 동시에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관용’이나 ‘포용’의 흐름이 자본주의가 말하는 ‘상품 가치’와 만나고 있다. 이미 광고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성소수자는 꽤 잘 ‘팔리는’ 소재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그 시장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품화의 이면에는 누가 있는가? 최근 소비자본주의가 성소수자를 상품화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문화적 자본을 가진 계몽적 보수주의자들의 영향력과 과연 무관한가? “동성애는 기괴한 것이 아니라 멋진 것, 진보적인 것이라는 의미 코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진단을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이유다.
“소비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성소수자의 인권이 잘 존중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도, 그것은 상품 가치를 인정받은 일부의 성소수자들에 대한 선별적 존중이다.”(185쪽)
저자는 ‘포용’의 원리와 소비자본주의의 영향이 공존하는 현재의 상황을 우려하며, 결국 그 때문에 포용이냐 배제냐 하는 분리주의적 질문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성다수자 대 성소수자라는 이분법을 넘어, 우리 사회에 작동하는 무수한 편견과 차별의 메커니즘 자체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넘어 퀴어 문제로 나아가기
“그리하여 퀴어한 존재는 혐오스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 대한 신의 축복이다“

‘반공’에 집중했던 증오의 정치는 이제 ‘반동성애’라는 새로운 혐오를 내세우고 있다. 극우주의 개신교 정치 세력이 기존의 극우정당과 연합하지 않을 수 있는 주요한 명분이자, 종교적 신념으로 자기기만이 가능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반동성애’는 개신교 우파의 정치 세력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성소수자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가 없었다면, ‘반동성애’ 또한 정치 세력화의 수단으로 선택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찰과 반박 이후는 무엇일까. 저자는 동성애 문제를 넘어 퀴어 문제로 나아가는, 퀴어적 사유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괴한’ ‘비정상적인’이라는 혐오와 배제의 뜻이 담긴 원래의 의미를 전복해 정체성의 용어로 사용되는 ‘퀴어’.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가르는 편견과 차별의 메커니즘을 사유하고, 여기에 중점을 둔 실천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부조리를 교정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 ‘퀴어를 위한’ 시각이라면, 부조리한 세계 너머의 세계를 꿈꾸게 하는 것은 ‘퀴어의’ 시각이다.
“퀴어, 곧 ‘기괴한’ 존재는 친숙한 것에 매몰된 문화가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낯선 존재에 대한 편견과 폭력을 돌아보게 하고, 증오와 전쟁의 위기에 빠져 있는 세계를 변화시킬 하나의 동력이다. 그리하여 퀴어한 존재는 혐오스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 대한 신의 축복이다.”
동성애 혐오주의에 반기를 드는 것을 넘어 성다수자 대 성소수자라는 이분법을 벗어나는 것, 포용도 관용도 아닌 편견과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질문하는 것. 혐오의 무기가 된 성서를 다시 읽는 출발점도, 반박과 분석 이후를 고민하는 출발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퀴어한 존재가 신의 축복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저자 프로필

김진호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경력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
    계간 《당대비평》 편집주간

2014.12.22.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 : 김진호
서강대 수학과를 졸업했으며,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민중 신학자 안병무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연구원, '당대비평' 편집주간을 거쳐, 안병무 선생이 설립한 '한백교회'의 담임 목사를 지냈다. 현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다. 민중신학자로서 한국 교회와 사회에 대한 신학적, 문화적 비평의 글을 써 왔으며, 인권연대가 수여하는 “올해의 종교인권상”(2011)을 수상했다.
2004년 2월 '당대비평'이 펴내는 단행본 시리즈 '당비생각' 첫번째 권인 『우리 안의 이분법』에 '낯설음에 대한 은폐된 폭력'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바 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김선일씨의 죽음을 출발점으로 테러리즘과 평화에 대한 성찰들을 담아낸 '당대비평' 특별호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에 '테러리즘, 복수의 정치학, 그리고 거래되는 고통'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간한 『함께 읽는 구약성서(공저)』와 『함께 읽는 신약성서』, 『실천적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예수 르네상스 : 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 『예수 역사학 : 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 『반신학의 미소』,『리부팅 바울』등이 있다.

목차

들어가며

1부 “제발 이런 수치스런 일은 마시오.” ―집단 강간 사건의 소거된 목소리

2부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셨소.”
―‘부끄러운 정욕’의 진짜 의미

3부 “남자가 남자와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
―‘여자와 여자’의 동침은 언급하지 않은 이유

더하는 글 동성애 문제에서 퀴어 문제로
―2016년 4.13총선과 반동성애 혐오동맹 출현의 종교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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