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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대의작품 소개

<여성의 대의>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페미니스트
지젤 알리미의 대표작 국내 최초 출간

지난 2020년 7월 28일 9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든 지젤 알리미의 대표작 『여성의 대의(La cause des femmes)』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지젤 알리미는 프랑스의 인권 변호사이자 페미니즘 운동가로, 억압받고 소외당한 여성의 권리를 위해 평생 헌신한 인물이다. 낙태는 무거운 죄인데도 성폭행은 죄가 아니던 시절에 온몸으로 맞서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률’과 ‘성폭행 및 사회 도덕을 저해하는 행위에 관한 법률’ 제정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여성의 대의』가 중요한 이유는 페미니즘의 본질을 꿰뚫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에 치우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이고 투쟁이며 혁명이다. 대중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켜 지지를 끌어내고 법과 제도를 만듦으로써 완성해나가는 실천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큰 오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지젤 알리미의 진단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방법론적 문제가 초점을 흐리고 있다.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모두가 사람인 세상’이다. 이것이 지젤 알리미가 일평생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라고 강조한 까닭이다. 『여성의 대의』에는 말 그대로 위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녀의 삶과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페미니스트가 역설하는 진정한 페미니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출판사 서평

나는 정의가 아닌 것을 참을 수 없어요
이것으로 내 일생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_2019년 8월 〈르몽드〉와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이 여성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처음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도록 해줄 것이다. 여성으로서 역할에 갇혀 있는 여성은 자신들의 억압자 역시 남성으로서 역할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함으로써 동시에 남성을 해방한다. 나아가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역사를 만들어낸다. 한 성이 다른 성을 지배하는 관계는 소멸하며, 역할은 서로를 자유롭게 오간다. 이것이 페미니즘 혁명이다. 폭력과 증오가 없는 조용한 혁명이다. 언론에서 슈퍼우먼은 힘들다느니, 페미니스트는 속으로 외롭다느니, 이미 남자들이 여자들 앞에서 기를 못 편다느니 아무리 떠들어도 이 혁명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날 왜 페미니즘일까?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인류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n페미니즘은 이제 막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을 뿐이다. 페미니즘은 20년 후, 50년 후, 100년 후,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다.
_개정판 서문 「오해의 시대」 중에서

─여성 대의의 열정적 수호자

2020년 7월 28일, 20세기 가장 위대한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떠났다. 알제리 독립 전쟁에서 민족해방전선(FLN) 활동가들을 변호하고, 낙태 합법화와 성폭행 범죄화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워온 지젤 알리미가 93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자신의 아흔세 번째 생일 다음 날이었다.

그녀는 반식민지주의 인권 변호사이자 페미니즘 운동의 주역이었다. 프랑스의 법이 낙태를 금지하고 성폭행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지젤 알리미는 법정에서, 특히 1972년 ‘보비니 재판(낙태 합법화)’과 1978년 ‘액상프로방스 재판(성폭행 범죄화)’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녀는 어떻게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됐을까? 그녀는 어떻게 반식민주의 투쟁에서 싸울 무기를 단련할 수 있었을까?

1927년 7월 27일,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튀니지 튀니스의 라굴레트(La Goulette)라는 마을에서 제이자 지젤 엘리즈 타이에브(Zeiza Gisele Elise Taieb)라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부모는 딸의 탄생을 반기지 않았다. 아버지 에두아르(Edouard)는 딸이 태어난 게 너무나 섭섭한 나머지 보름이 지나고서야 지인들에게 딸의 출생을 인정했다.

지젤 알리미는 남아선호사상이 뼛속 깊이 박혀 있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에게 채워진 족쇄를 끊고자 부단히 저항했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딸이 남자 식구들의 시중을 들고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는 의무를 거부했다. 열세 살 때는 단식투쟁 끝에 설거지나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날 그녀는 일기장에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약간의 자유를 쟁취한 날이다”라고 썼다.

열여섯 살 때는 “여자는 최대한 빨리 결혼해야 한다”며 부모가 정한 남자와 혼인하라는 어머니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녀는 딸을 공부시킬 생각도, 돈도 없던 부모에게 한 푼도 의지하지 않은 채 장학금과 무료 도서관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해 학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열일곱 살 때 그녀는 부모의 반대와 회유를 무릅쓰고 꿈에 그리던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교 장학생으로 밤에는 미군 부대 전화교환원 일을 하면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한 뒤 1949년 변호사로 임용됐다.

튀니지로 돌아온 그녀는 1953년, 이후 ‘모크닌 재판’으로 불린 정치 재판에서 튀니지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했다. 알제리 독립 전쟁(1954~1962) 때는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등 프랑스 지식인들과 함께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고, 재판에 회부된 민족해방전선 활동가들을 변호했다. 이때 자밀라 부파차(Djamila Boupacha)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자밀라 부파차를 위하여

1960년 2월 10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일원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던 스물두 살 여성 자밀라 부파차가 알제(Algiers)의 한 식당에 폭탄을 설치한 혐의로 체포된다(1959년 9월 27일에 그녀가 설치한 폭탄은 프랑스군이 발견해 뇌관을 제거함으로써 폭발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체포됐고, 정식 수감시설이 아닌 프랑스군 막사로 끌려가 한 달 동안 군인들에게 모진 고문과 성폭행을 당한다.

1960년 3월 어느 날, 부파차의 오빠가 지젤 알리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녀는 즉시 이 사건의 변호를 맡는다. 1960년 5월 17일, 지젤 알리미와의 면회에서 자밀라 부파차는 이렇게 진술했다.
“그들이 제 질 속에 칫솔 손잡이를 집어넣고 맥주병을 밀어 넣었어요.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어요. 저를 이상한 자세로 묶은 뒤 병의 목 부분을 집어넣은 거예요. 저는 이틀 동안 울부짖다가 의식을 잃었어요.”

지젤 알리미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60년 6월 2일자 〈르몽드(Le Monde)〉 칼럼 “자밀라 부파차를 위하여(Pour Djamila Boupacha)”를 통해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군인들은 그녀의 가슴, 다리, 사타구니, 성기, 얼굴에 테이프로 전극을 붙였다. 이들은 전기고문을 가하면서 주먹질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담뱃불로 지졌다. 그런 뒤 욕조 위에 거꾸로 매달아 물고문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전역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지식인이 나서서 ‘자밀라 부파차 지원위원회’를 결성해 여론을 결집하자 1960년 12월 알제 법원은 사건을 프랑스로 이첩했다. 지젤 알리미는 프랑스 국방부 장관과 알제리 주재 프랑스군 총사령관을 직권 남용 혐의로 고소했다.

1961년 6월 28일, 자밀라 부파차는 지젤 알리미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962년 3월 18일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는 에비앙(Evian)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4월 21일 석방됐다. 이때부터 지젤 알리미는 여성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고 법정에서 변론을 펼치는 페미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나도 낙태했다!” _343 선언

1971년 4월 5일, ‘낙태죄’라는 억압에 맞서 수많은 여성이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요구하고자 대규모 행동을 개시했다. 자신들도 낙태한 경험이 있다고 시인하며 피임과 낙태의 적법한 권리를 요구한 당대 여성 저명인사 343인의 공동 선언문이 〈르누벨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에 실렸고, 지젤 알리미도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343 선언(Manifeste des 343)’이다. 그해 지젤 알리미는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여성의 대의를 선택하다(Choisir la cause des femmes)〉 협회를 설립해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수많은 여성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면서 페미니즘 투쟁을 본격화했다. 협회의 슬로건은 “임신은 나의 선택이다!”, “피임은 나의 자유다!”, “낙태는 나의 최후 수단이다!”였다. 그녀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낙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십자군이 아니다. 어머니가 되는 일이 여성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가 되도록 싸우는 것이다.”

─“죄가 있는 것은 재판장님의 그 법입니다!” _보비니 재판

지젤 알리미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보비니(Bobigny) 재판’이다. 1972년 10월과 11월에 파리 근교의 보비니라는 도시에서 열린 이 재판은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프랑스에서 자발적 임신중단(낙태)이 형사 처분을 받지 않도록 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재판에서 지젤 알리미가 변호한 피고인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같은 학교 남학생의 성폭행으로 임신해 어쩔 수 없이 낙태 수술을 받은 열여섯 살 고등학생 마리-클레르(Marie-Claire), 그리고 딸이 낙태 수술을 받도록 한 어머니 미셸 슈발리에(Michele Chevalier)와 그녀를 도운 세 사람의 여성이 이들이었다. 미성년자인 마리-클레르는 불법 낙태 혐의로, 네 명의 여성은 불법 낙태 공모 및 시술 혐의로 기소됐다.

파리지하철공사 말단 노동자로 힘겹게 세 딸을 키우던 미혼모 미셸 슈발리에는 마리-클레르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딸아이가 출산을 원치 않는다고 하자 산부인과를 찾아간다. 하지만 의사가 불법으로 낙태 시술을 해주는 대신 그 대가로 그녀의 석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수술비를 요구하자 미셸 슈발리에는 직장동료인 뤼세트 뒤부세(Lucette Duboucheix)와 르네 소세(Renee Sausset)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다. 이들의 주선으로 마리-클레르는 낙태 시술을 할 줄 아는 일반인 미슐랭 방뷔크(Michelin Bambuk)에게 불법 낙태 수술을 받는다. 그러나 출혈이 심해져 사경을 헤매게 됐고, 결국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한다.

그런데 얼마 후 마리-클레르를 성폭행한 남학생이 자동차 절도 혐의로 체포됐고, 그 과정에서 마리-클레르의 불법 낙태를 경찰에 밀고한다. 그렇게 마리-클레르와 네 사람은 기소된다. 이들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선택〉 협회에 도움을 구했다. 지젤 알리미는 자신들을 변호해달라는 이들의 요청을 즉시 받아들였다.

지젤 알리미와 〈선택〉 협회는 이 어려운 재판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소된 여성들의 동의를 얻어 낙태 재판을 정치 재판으로 변모시킨다. 1920년의 낙태금지법 자체를 문제 삼아 그 부당성을 부각하는 전략이었다. 당시 부유한 프랑스 여성들은 낙태가 합법인 스위스나 영국으로 건너가 좋은 환경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고 범죄자도 되지 않았지만, 빈곤 여성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형사 처분을 감수하며 불법으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지젤 알리미는 사회 저명인사들을 찾아 법정 증언을 부탁하며 착실히 재판을 준비했고, 이와 더불어 여론전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선택〉 협회는 조직적으로 시위를 주도하면서 시민들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시위 확산을 우려한 정부가 강경 진압을 지시하자 시위대가 경찰에게 폭행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습을 취재한 주요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로써 보비니 재판은 사회적 사건으로 확장됐다.

1972년 10월 11일 먼저 열린 재판에서 마리-클레르는 자발적 낙태가 아니라는 판결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지젤 알리미는 “판례의 관점에서 보면 새롭고 용기 있는 판결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모호한 판결”이라면서, “마리-클레르는 자발적으로 낙태를 한 것”이며 “자발적 낙태에 무죄가 선고돼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마리-클레르는 법정에서 당당히 이렇게 증언했었다.
“저는 고등학생이에요. 제 나이 때는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네 사람의 여성에 대한 재판은 1972년 11월 8일에 열렸다. 법정에는 과학자 장 로스탕(Jean Rostand), 자크 모노(Jacques Monod),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 영화배우 델핀 세이리그(Delphine Seyrig), 프랑수아즈 파비앙(Francoise Fabian), 정치인 미셸 로카르(Michel Rocard), 작가이자 정치인 에메 세제르(Aime Cesaire)와 문필가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같은 수많은 저명인사가 참석해 지젤 알리미와 피고인들에게 힘을 보탰다.

증인으로 나선 의사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폴 밀리에즈(Paul Milliez) 교수는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을 것”이라며, “가톨릭 신자들이 왜 모든 프랑스 국민에게 우리의 도덕성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을 장려하는 목적은 여성을 가정에 붙잡아두고 집안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고인 증언대에 오른 미셸 슈발리에는 판사 앞에서 당당히 외쳤다.

“재판장님, 저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있는 것은 재판장님의 그 법입니다!”

재판 결과 미셀 슈발리에는 500프랑 벌금형에 집행유예 선고받았으나, 피고측의 항소에 검찰이 항소심 설정을 하지 않아 시효 만료로 집행되지 않았다. 사실상 무죄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뤼세트 뒤부세와 르네 소세는 “마리-클레르와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범이 아니라는 명목으로 석방됐으며, 미슐랭 방뷔크는 안타깝게도 낙태 시술 당사자라는 이유로 징역 1년을 받았지만 집행유예 1년이 적용돼 수감되지는 않았다.

보비니 재판은 이후 보건부 장관 시몬 베유(Simone Veil)가 발의해 1975년 1월 17일 가결되고 공포된 ‘베유법’, 즉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률’로 향하는 거대한 전환점이 됐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산산이 조각나는 것입니다!” _액상프로방스 재판

1980년 12월 23일 발효된 ‘성폭행 및 사회 도덕을 저해하는 행위에 관한 법률’ 또한 지젤 알리미의 공로였다. 1974년 8월 21일,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Marseille) 인근의 바위로 둘러싸인 작은 만에서 스물네 살 안느 통글레(Anne Tonglet)와 열아홉 살 아라셀리 카스텔라노(Araceli Castellano) 두 명의 여성이 캠핑하다가 남성 세 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가해자인 세 남성은 합의에 따른 성관계였다며 성폭행 사실을 부인했다. 액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열린 이 재판에서 지젤 알리미는 피해 여성들을 변호했고, 이를 계기로 성폭행이 엄연한 범죄로 법률에 명시되도록 하기 위한 페미니스트들의 새로운 투쟁이 시작됐다. 재판은 무려 3년 동안 이어졌다. 1977년 5월 29일, 그녀는 TV 인터뷰에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깨진 그릇이 됩니다. 산산이 조각나는 것입니다. 다시는 예전의 그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무뢰배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했고 심지어 뺨을 맞기도 했다. 그녀가 지나갈 때 침을 뱉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렇지만 1978년 5월 3일 최종 공판에서 주동자 한 명에게는 징역 6년, 나머지 두 명에게는 징역 4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성폭행이 범죄로 판결되는 판례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자유는 억압하고 법은 해방시킨다

지젤 알리미는 이 책에서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자유는 억압하고 법은 해방시킨다”는 앙리 라코르데르(Henri Lacordaire)의 말을 인용하며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법, 제도, 규칙이기에 “특권을 없애고, 지배관계를 무력화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법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65년부터 그녀가 지지했던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이 1981년 대선에서 제21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자 지젤 알리미는 정치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 즉 법을 바꾸고 만들겠다는 욕구를 갖게 됐고, 같은 해 시행된 총선에 사회당 소속으로 출마해 하원의원으로 선출됐다. 1984년까지 국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모두 7개의 법안을 발의했으며 선거 여성 할당제를 법제화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미테랑 대통령이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실망감에 그를 ‘마키아벨리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녀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여성의 몸을 판매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갈하면서 매춘 및 대리모 합법화를 격렬히 반대했다. 1985년에서 1986년에는 유네스코(UNESCO) 프랑스 대사로, 1989년에는 유엔(UN) 프랑스 대표단 특별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정치 평등을 실현코자 애썼다. 1998년에는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를 공동 설립하고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아르테미스(Artemis)라는 이름의 매춘시설을 운영키로 하자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를 향해 결단을 촉구했다.

─페미니즘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지젤 알리미는 평생을 여성의 대의를 외치고 페미니즘을 옹호하다가 갖은 모욕과 살해 위협까지 받았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이 조의를 표하고 찬사를 보냈다. 모든 프랑스 언론은 그녀의 사회 참여와 열린 정신, 페미니즘 운동에서 이룬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프랑스 하원은 묵념에 이은 박수갈채로 그녀를 애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은 국가 차원의 경의를 표했다. 철학자 마릴린 마에소(Marylin Maeso)는 “총체적이며 고집스러울 정도로 일관성 있는 그녀의 페미니즘은 모든 페미니즘을 초월한 페미니즘”이라고 표현했다.

그녀가 타계한 직후 페르-라세즈(Pere-Lachaise) 묘지에 안치된 유해를 팡테옹(Pantheon) 국립묘지로 이장해야 한다는 청원이 이곳저곳에서 이어졌다. 그중 한 청원은 “여성을 위해, 성소수자를 위해, 반식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여성에게 어울리는 경의를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청원은 “이 위대한 여성이 남긴 자취를 우리 마음에 영원히 새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녀는 2019년 8월, 생애 마지막이 될 〈르몽드〉와 인터뷰에서 늙지 않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의가 아닌 것을 참을 수 없어요. 이것으로 내 일생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젤 알리미는 페미니즘이 향해야 할 길을 제시했고 힘차게 나아갔다. 자신의 세대는 물론 다음 세대 여성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데 영혼을 바쳤다.”
_[르몽드]

“그녀의 유산은 여전히 여성 투쟁의 동력이다. ‘불의를 온몸으로 참을 수 없다’던 그녀의 외침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어 우리 시대 페미니즘으로 타오르고 있다.”
_[가디언]



저자 소개

저 : 지젤 알리미 (Gisele Halimi)

변호사, 페미니즘 운동가, 반전·반식민·반자본주의 활동가, 정치가, 문필가. 1927년 7월 27일, 프랑스 식민지였던 튀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극심한 남아선호 분위기 속에서 여성에게 채워진 족쇄를 끊고자 부단히 저항했다. 딸을 공부시킬 생각도 능력도 없던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은 채 오롯이 자신의 노력으로 튀니지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다음, 1944년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프랑스로 건너가 지금의 파리 제1대학교인 팡테옹소르본대학교(Universite Pantheon-Sorbonne)에서 법학 및 철학 학위를 취득한 뒤 1949년 변호사에 임용됐다.

1953년 모크닌(Moknine) 재판에서 튀니지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했고, 알제리 독립 전쟁 때는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등 프랑스 지식인들과 함께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면서 재판에 회부된 민족해방전선(FLN) 활동가들을 변호했다. 특히 1960년 프랑스군에 체포돼 온갖 고문과 성폭행을 당한 스물두 살 여성 자밀라 부파차(Djamila Boupacha)의 변호를 맡아 그 참상을 폭로하고 여론을 이끌어냈다.

1967년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 중 저지른 범죄와 패악을 심판하고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제창하고 장 폴 사르트르 등 당대 유력 지식인 및 정치인 25인이 발족한 러셀 법정(Tribunal Russell) 조사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베트남을 방문했다.

1971년 당대 여성 저명인사 343명이 들고 일어나 피임과 낙태의 적법한 권리를 요구한 ‘343 선언(Manifeste des 343)’에 동참했으며, 같은 해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여성의 대의를 선택하다(Choisir la cause des femmes)」 협회를 설립해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수많은 여성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면서 페미니즘 투쟁을 본격화했다.

1972년에는 성폭행으로 임신한 태아를 낙태해 기소된 열여섯 살 고교생 마리-클레르(Marie-Claire)와 어머니 미셸 슈발리에(Michele Chevalier) 그리고 이들을 도운 세 명의 여성을 모두 변호한 보비니(Bobigny) 재판에서 승리함으로써 3년 후 ‘베유법’, 즉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75년~1978년 액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재판은 그동안 온전히 범죄로 인식되지 못했던 성폭행이 비로소 중범죄로 규정되는 전환점이 됐으며, 1980년 ‘성폭행 및 사회 도덕을 저해하는 행위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이어졌다.
1981년 국회의원 당선 후 1984년까지 활동하면서 선거 여성 할당제를 법제화하고자 노력했고,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매춘 및 대리모 합법화에 격렬히 반대했다. 1985년~1986년 유네스코(UNESCO) 프랑스 대사로, 1989년에는 유엔(UN) 프랑스 대표단 특별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정치 평등을 실현코자 애썼다. 1998년에는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를 공동 설립해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동참했다.

재판, 입법, 시위, 조직, 여론 등과 더불어 출판도 주요 투쟁 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대표작인 이 책 외에도 『자밀라 부파차(Djamila Boupacha)』『부르고스 재판(Le Proces de Burgos)』『낙태, 재판 중인 법: 보비니 사건(Avortement, Une loi en proces: L’Affaire de Bobigny)』『성폭행: 액상프로방스 재판(Viol, Le proces d’Aix)』『여성의 공동 계획(Le Programme commun des femmes)』『오렌지 우유(Le lait de l’oranger)』『잃어버린 아름다움(Une embellie perdue)』『여성의 새로운 대의(La nouvelle cause des femmes)』『정치 생활의 평등(La parite dans la vie politique)』『무례한 변호사(Avocate irrespectueuse)』『열정의 역사(Histoire d’une passion)』『치열한 자유(Une farouche liberte)』 등 수십 권의 책을 썼다.
평생 페미니즘 운동에 헌신하고 여성의 대의를 위해 투쟁한 지젤 알리미는 2020년 7월 28일, 자신의 아흔세 번째 생일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역 : 이재형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원대학교, 상명여자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우리에게 생소했던 프랑스 소설의 세계를 소개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많은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지금은 프랑스에 머물면서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세상의 용도』 『부엔 까미노』 『어느 하녀의 일기』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꾸뻬 씨의 시간 여행』 『꾸뻬 씨의 사랑 여행』 『마르셀의 여름 1, 2』 『사막의 정원사 무싸』 『카트린 드 메디치』 『장미와 에델바이스』 『이중설계』 『시티 오브 조이』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 『레이스 뜨는 여자』 『정원으로 가는 길』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 『사회계약론』 『법의 정신』 『군중심리』 『사회계약론』 『패자의 기억』 『최후의 성 말빌』 『세월의 거품』 『밤의 노예』 『지구는 우리의 조국』 『마법의 백과사전』 『말빌』 『신혼여행』 『어느 나무의 일기』 등이 있다.

목차

옮긴이 해설_페미니즘을 초월한 페미니스트

개정판 서문_오해의 시대
초판 서문_감금당한 여성

제1장_나의 삶
제2장_선택 협회
제3장_보비니 재판
제4장_형법 제317조
제5장_낙태와 성
제6장_그르노블 사건
제7장_알리바이
제8장_투쟁의 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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