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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천 동화선집 상세페이지

강소천 동화선집작품 소개

<강소천 동화선집> 강소천은 동화에 적극적으로 꿈의 기법을 도입해 한국 창작동화의 서정성을 높이고 다양한 서술구조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한 동화작가였다. 그의 초기 동화는 ‘상실과 찾음’이란 구성 원리를 기저로 대상성에 깊이 파고들어 그 대상을 내면화한다. 이 책에는 ≪꿈을 찍는 사진관≫ 외 13편의 동화가 실려 있다.

당신의 꿈을 찍는 방법
하얀 종이 한 장을 준비하세요. 만나고 싶은 이와 지난날의 추억 한 토막을 파란 잉크로 쓰세요. 가슴에 얹고 두 손으로 포개 안고 눈을 감으세요. 깊이 잠드세요. 눈을 떴을 때 하얀 종이는 당신의 꿈을 보여 드립니다.

꿈을 찍으시려는 분들에게!
이렇게 멀리서 찾아오신 손님에게 먼저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께서 이곳까지 찾아온 데는 두 가지 뜻이 있을 줄 압니다. 그 하나는 신기한 것을 즐기는 마음이요, 또 하나는 무척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당신과니 말이지만, 오늘 저 세상 사람들은 오늘의 문명을 자랑해서 ‘텔레비숀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 이 일에 비하면 그까짓 게 다 무엇입니까? 문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 더우기 6ㆍ25사변을 치루고 난 우리들에겐 많은 잃은 것 대신에, 가진 것은, 안타깝게 보고 싶고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 우리에게 없지 못할 가장 귀한 것의 하나는 과거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추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묵은 앨범을 끄내어, 사진 위에 머물러 있는 지난날의 모습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사진이란 다만 추억의 그 어느 한 순간이요, 그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란 흔히 사진첩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불완전한 것이나마 사변으로 인하여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요행히 우리에겐 ‘꿈’이란 게 있읍니다.
이미, 저세상에 가 버리고 없는 그리운 얼굴들도 꿈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읍니다.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이라도 쉽게 만날 수 있읍니다. 꿈길엔 38선이 없읍니다.
정말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 꿈이란 사람의 마음대로 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 꿈에 보려고 애를 써도 뜻대로 잘 안 되는 수가 많읍니다. 그러나, 어떻게 잠간 꿈을 꾸게 된다 해도, 그 꿈이 곧 깨면 한층 더 안타까운 것뿐입니다.
여기에 생각을 둔 나는 이번에 꿈을 찍는 사진기를 하나 발명했읍니다. 이는 결코 거리의 사진사들처럼 영업을 목적한 건 아닙니다.
내게는 안타깝게 그리운 아기가 있읍니다. 나는 그 아기의 사진까지를 송두리채 잃어버렸읍니다.
내가 이 사진기를 만들게 된 게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자아,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읍니다.
그럼, 인제 꿈을 찍는 방법을 설명해 드려야죠. 무엇보다 그게 더 궁금하실 테니깐요.

≪꿈을 찍는 사진관≫, ≪강소천 동화선집≫, 강소천 지음, 김용희 엮음
* 초판본 사용, ≪꿈을 찍는 사진관≫, 홍익사, 1954

이것이 그 유명한 강소천의 대표작인가?
≪꿈을 찍는 사진관≫의 일부다. 6ㆍ25 이후 고향과 처자식에 대한 상실감이 그리움과 소망으로 작가에게 내면화되었다. 고향에 대한 기억과 세월의 안타까움을 절실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스토리라인을 요약하면?
주인공인 ‘나’는 어느 일요일 따사한 봄볕의 유혹에 스케치북과 그림물감을 들고 뒷동산으로 올라간다. 그림 그리기보다 봄 경치에 취해 있던 나는 ‘꿈을 찍는 사진관으로 가는 길. 동쪽 5리’라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그곳을 찾아간다. 사진관 주인이 준 책자에는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하얀 종이에 만나고 싶은 이와 지난날의 추억 한 토막을 파란 잉크로 써서 가슴에 넣고 잠을 자면 꿈을 찍을 수 있다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나는 하얀 종이에 고향의 동갑내기 친구인 순이에 대한 추억을 적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사진관 주인에게서 받은 사진 속에 순이와 내가 여덟 살 차이로 찍혀 있어 내심 놀란다. 그것은 북한의 고향땅을 떠나온 지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뜻이다. 나는 처음 앉았던 뒷동산에 와서 그 사진을 다시 꺼내 보고 또 한 번 놀란다. 그 사진은 사진관에서 받아 온 사진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동화집 갈피 속에 끼여 있던 노란 민들레꽃 카드였기 때문이다.

그는 ‘꿈’의 작가인가?
그렇다. 이 작품은 동화에 꿈의 기법을 도입해 한국 창작동화의 서정성을 높이고 다양한 서술구조를 확장한다.

꿈의 기법을 사용한 작품은 어떤 것인가?
≪꿈을 찍는 사진관≫, ≪꿈을 파는 집≫, ≪꼬마들의 꿈≫, ≪인형의 꿈≫, ≪8월의 꿈≫, ≪노랑나비의 꿈≫ 등이다. 작품 제목으로도 쉽게 간취될 만큼, 강소천은 인간의 심리적 현상인 꿈을 작품 자체로 받아들이며 다양한 구성 원리로 원용했다. ‘동화문학은 꿈을 추구하는 문학’이라는 자신의 동화관을 일관되게 관철했다.

작가는 왜 꿈에 집착했나?
한국전쟁으로 함경남도 고원을 떠나 단신으로 월남했다. 타계할 때까지 실향민으로 살았다. 그의 전기적 측면을 고려하면 꿈 모티프는 상실감을 극복하는, 또 다른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창작 원리로 사용했다.

전쟁은 강소천에게 어떻게 다가왔나?
가족과의 생이별은 그에게 존재 의미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진정한 세계의 상실을 의미한다. 밀려오는 그리움과 외로움,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그의 문학에서 전쟁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전후 그의 동화문학에 부모 잃은 아이, 아이 잃은 부모가 등장한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상처 입은 아이와 어른은 모두 전쟁의 입상이다. 그것은 전쟁의 현실을 자신의 처지에서 받아들인 결과다.

꿈은 불행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이었는가?
강소천에게 꿈은 현실의 결핍을 충족시키고 상실감을 아름답게 극복하는 치유 공간이다.

꿈 모티프는 어떻게 힐링의 방법이 될 수 있는가?
‘있는 세계에서 있어야 할 세계로’ 지향하는 꿈 인식의 특징 때문이다. 그 꿈은 “저세상에 가 버리고 없는 그리운 얼굴들”이나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이라도 쉽게 만날 수 있”게 연결해 주는 무지개 같은 다리였다.

우리도 꿈으로 치유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의 글을 보자. ≪꽃신≫은 “아기 아버지께!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당신을 이렇게 불러 봅니다”며 아기가 태어난 것을 기뻐하는 엄마의 편지글로 시작한다. “우리가 란이 아빠와 란이 엄마의 자격을 가지는 것은 오직 꿈나라에 갔을 적만이어요”라고 아기의 죽음을 알리는 슬픈 사연으로 끝맺는다.

슬픔만 밀려오는데 어떻게 치유가 된단 말인가?
란이의 죽음은 아기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군인 아빠가 아기의 첫돌 기념 선물로 사 보낸 ‘꽃신’이 원인이 되었다. 강소천은 그런 아기 죽음의 비극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꽃신이 ‘꿈나라’에서만은 “영원히 신고 다닐 수” 있으며, 엄마 아빠의 자격도 “오직 꿈나라에 갔을 적만” 얻을 수 있다고 쓴다. 꿈의 논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비극 아닌가?
아니다. ≪꽃신≫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맺는 이야기지만, ‘꿈나라’라는 영원성의 문제로 그 비극성 자체를 아름답게 승화한다.

강소천은 누구인가?
1915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1931년부터 동요를 발표했고 ≪까치야≫가 ≪아이생활≫ 5월 호에 윤석중의 고선으로 뽑히고부터 정식 작가로 인정받았다. 1937년 소년소설 ≪재봉 선생≫과 1939년 동화 ≪돌맹이 Ⅰ, Ⅱ≫를 ≪동아일보≫에 발표한 이후 동화작가로도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고향에서 6ㆍ25를 당하고, 1ㆍ4후퇴 때 고향에 부모와 처자를 남겨 둔 채, 흥남에서 군부대를 따라 단신으로 월남했다. 이때 그는 가족과 일시적으로 떨어져 지낼 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국 평생 가족의 상실감을 짊어지고 살게 되었다. 월남 후 그는 주로 아동잡지 편집과 교육 활동에 종사하며 1963년 타계할 때까지 10여 년간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그는 우리 아동문학에 무엇을 기여했나?
처음에는 동요ㆍ동시를 썼다. 그의 동요는 당시 주류를 이루던 가창 동요의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탈피하고 새로운 시적 차원을 구축한다. 해방 이후 우리 동시문학의 방향이 여기서 정향된다.

그의 동요ㆍ동시의 대표작으로 무엇을 꼽을 수 있나?
단연 ≪호박꽃초롱≫이다. 해방 전 윤석중의 동요ㆍ동시집 출간 이래 유일하게 간행되었다. 이 한 권만으로도 한국 동시문학사의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동시에서 동화로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1960년 ≪동아일보≫에 ‘≪돌멩이≫ 이후’라는 글에서 “나는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화에다 나는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은 이야기며 그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월남 이후 그가 쓴 동화와 소년소설 대부분은 1950년대란 시대사의 명제를 안고 있다. 그에게는 일제강점기의 고통보다 한국전쟁의 충격이 더 깊은 아픔이 되었다. 고향과 혈육을 잃었기 때문이다.

장르 전환이 자기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론이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강소천의 동화문학은 삶의 원리이고 존재 방법이었다. 동요ㆍ동시에서 동화로의 전환은 단순한 대리충족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삶의 창조 곧 ‘찾음’이란 생성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안으로 ‘상실’이라는 충격적인 현실에 순응하면서 밖으로는 새로운 자기를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딜레마의 해결책이 바로 꿈이었나?
바로 ‘꿈’이다. 그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바로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상실감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것, 그것이 자신의 상실감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용희다.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부센터장이고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다. 아동문학을 평론한다.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동화문학선집’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0명의 동화작가와 시공을 초월해 명작으로 살아남을 그들의 대표작 선집이다.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공동 기획으로 7인의 기획위원이 작가를 선정했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대표작을 고르고 자기소개를 썼다. 평론가의 수준 높은 작품 해설이 수록됐다. 깊은 시선으로 그려진 작가 초상화가 곁들여졌다. 삽화를 없애고 텍스트만 제시, 전 연령층이 즐기는 동심의 문학이라는 동화의 본질을 추구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편저자가 작품을 선정하고 작가 소개와 해설을 집필했으며,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다.

강소천은 1931년부터 동요ㆍ동시를 써 오다 1939년 ≪동아일보≫에 동화 ≪돌멩이≫를 발표한 이후 본격적인 동화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동화와 아동소설 장르 전반에 걸쳐 꿈의 기법을 도입하며 자신의 동화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꿈을 찍는 사진관≫, ≪꿈을 파는 집≫, ≪꼬마들의 꿈≫, ≪인형의 꿈≫, ≪8월의 꿈≫, ≪노랑나비의 꿈≫ 등 작품 제목으로도 쉽게 간취될 만큼, 강소천은 인간의 심리적 현상인 꿈을 작품 자체로 받아들이며 다양한 구성 원리로 원용했다. 그것은 ‘동화문학은 꿈을 추구하는 문학’이라는 자신의 동화관을 일관되게 관철한 일이기도 했다.
강소천 동화문학의 중요한 유형적 특징 중 하나는 ‘상실과 찾음’이란 구성 원리에 입각해 있다는 점이다. 이때 강소천 동화문학에 나타난 꿈은 구성상 단순한 복선이나 인물과 플롯의 인과적 계기로 활용되어 동화의 의미를 조성해 가는 주제적 문제보다 문학작품에 고착적인 꿈의 속성들을 다양하게 배치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의미성을 유발해 내는 기법상의 문제에 관여되어 있다. 6ㆍ25동란으로 고향인 함경남도 고원을 떠나 단신으로 월남해 타계할 때까지 실향민으로 살았던 그의 전기적 측면을 고려하면, 그의 꿈 모티프는 상실감을 극복하는 또 다른 삶의 문제로 떠올린 창작 원리이기도 했다.
강소천의 초기 동화는 외부의 모든 대상들이 등장인물과 교감하면서 시적 이미지망으로 구축되어 화자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서정적 과정으로 이야기화된다. 곧 일관성 있게 ‘상실과 찾음’이란 구성 원리를 기저로 대상성에 깊이 파고들어 그 대상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내면화된 현실을 표층으로 드러낸 것이 꿈 모티프다.
강소천은 동화에 꿈 모티프를 서간체나 독백체 등 다양한 서술 기법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동화세계를 심화ㆍ확장해 갔다. 이때 꿈 모티프는 암시적ㆍ비유적ㆍ상징적 기능을 조성하여 서정적 분위기를 강화하며 동화적 의미를 구현하는 작용을 한다. ≪민들레≫, ≪꽃신≫, ≪꽃신을 짓는 사람≫ 등에서 이러한 구성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
강소천은 자기 스스로 상실에 대한 아픈 경험을 통해 동화작가로서의 정당한 창작 원리를 설정했으며, 그 극복의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용기와 의지를 심어 주는 ‘찾음’이라는 경험의 모형을 상징적인 꿈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곧 그의 꿈의 기법은 안으로는 ‘상실’이라는 충격적인 현실에 순응하면서, 밖으로는 ‘찾음’이라는 새로운 자기 발견을 감내하는 원리이자 통로였다. 그에게 분단이 고착화될수록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증폭되었고, 그의 동화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들을 꿈으로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강소천의 동화문학에 풍부하게 발현된 꿈은 인간의 욕망 충족적 삶의 측면에 관여하면서 더 나아가 인간의 궁극적 존재에 대한 물음이자 삶의 문제로 제기된 서사적ㆍ서정적 장치로 활용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강소천은 동화에 적극적으로 꿈의 기법을 도입해 한국 창작동화의 서정성을 높이고 다양한 서술구조를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한 동화작가였다.


저자 프로필

강소천

  • 국적 대한민국
  • 출생-사망 1915년 9월 16일 - 1963년 5월 6일
  • 경력 1962년 한국 문학가협회 이사
    1961년 문교부 우량 아동도서 선정위원
    1960년 한국아동문학 연구회 회장
    1959년 국정교과서 편찬위원
  • 데뷔 1931년 아이생활 동화 '버드나무 열매'
  • 수상 1985년 국민훈장 대한민국 금광문화훈장 추서
  • 링크 공식 사이트

2014.11.07.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자 - 강소천
강소천(姜小泉)은 1915년 9월 16일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면 미둔리에서 부친 강석우 씨와 모친 허석운 씨의 2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용률(龍律)이다. 고원공립보통학교와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9년 고향 미둔리에서 결혼했으며, 1945년부터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 고원중학교, 청진여자고급중학교, 청진제일고급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1931년 동요 <무궁화에 벌나비>와 소년시 <봄이 왓다>가 ≪신소년≫ 2월호에 실린 후, 같은 해 ≪아이생활≫에 동요 <길ㅅ가엣어름판>, <얼골몰으는 동무에게>, <울어내요 불어내요>, <코스모스꽃>, <호박꽃과 반딧불> 등을 투고하여 발표했다. 1933년 동요 <울엄마젓>이 ≪어린이≫ 5월호에 입선되고, <까치야>가 ≪아이생활≫ 5월호에 윤석중의 고선으로 뽑혀 발표되고부터 정식 작가로 인정받았다. 1936년 ≪童話(동화)≫에 동요 <제비>, <◇리아>, 동시 <국화와 채송화> 등을, 1937년 ≪소년≫ 창간호에 대표작 <닭>을 발표했으며, 1937년부터는 동요·동시와 함께 동화와 소년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7년 소년소설 <재봉 선생>과 1939년 동화 <돌맹이 Ⅰ, Ⅱ>를 ≪동아일보≫에 발표한 이후 동화 <감과 꿀>(≪아이생활≫ 1940. 2), <따짜구리>(≪소년≫ 1940. 12), 장편동화 <희성이의 두 아들>(≪아이생활≫ 1940. 9·10∼) 등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동화작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1941년 첫 동요시집 ≪호박꽃초롱≫을 간행했다. 해방 전 윤석중의 동요, 동시집 출간 이래 유일하게 간행된 ≪호박꽃초롱≫은 그 한 권만으로도 한국 동시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이다. 이 동요시집은 일제 말기 혹독한 우리말 탄압 정책 아래 간행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당시 주류를 이루던 가창 동요의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탈피하고 새로운 시적 차원을 구축해 해방 이후 우리 동시문학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까닭이다. ≪호박꽃초롱≫에는 서른세 편의 동요·동시와 창작동화 <돌맹이 Ⅰ, Ⅱ>가 수록되어 있는데, 1939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이 <돌맹이 Ⅰ, Ⅱ>는 그가 동시인에서 동화작가로 변신함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강소천은 고향에서 6·25를 당하고, 1951년 1·4후퇴 때 고향에 부모와 처자를 남겨 둔 채, 흥남에서 군부대를 따라 단신으로 월남했다. 이때 그는 남한 땅을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는 일시적으로 떨어져 지내야 하는 한시적 삶의 공간으로 생각했으나 6·25 전쟁은 남북을 갈라놓은 휴전으로 종결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결국 남한 땅은 그에게 삶의 터전으로 새롭게 일구어 내야 하는 공허한 삶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월남 후 그는 주로 아동잡지 편집과 교육 활동에 종사하며 1963년 타계할 때까지 10여 년간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어린이 다이제스트≫ 주간, ≪새벗≫ 주간, ≪아동문학≫ 편집위원,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분과위원장, 아동문학연구회 회장, 문인협회 이사, 한국보육대학 강사,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강사, 국정교과서 국어과 심의 의원, 서울 중앙방송국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60년 ≪동아일보≫에 ‘<돌멩이> 이후’라는 글에서 “나는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화에다 나는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은 이야기며 그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월남 이후 그가 쓴 대부분의 동화와 소년소설은 일본사람들에게 나라를 빼앗겨 고통 받은 이야기가 아니라 6·25로 야기된 참혹한 피해에 대한 복구가 요원했던 1950년대란 시대사적 명제를 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체험한 나라 잃은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싶어 했지만 그보다 고향과 혈육의 상실을 가져다준 6·25의 충격이 더 근원적인 아픔으로 남았던 까닭이다. 문학이 한 시대의 갈등과 고뇌를 반영한다는 보편적인 인식을 간과하더라도 6·25 종전 이후 동화와 소년소설에 본격적으로 매달려 온 강소천 동화문학의 제반 내용은 6·25 체험과 고착화된 분단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을 만큼 그 충격은 강소천 동화의 발생론적 배경이 되었다. 강소천에게 6·25가 가져다준 고향과 가족의 상실은 존재 의미를 감당하기 힘들 만큼 진정한 세계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강소천에게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한 1950년대란 살아가야 하는 생존 자체도 문제였지만 보다 근원적인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문제가 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삶의 의미를 차단한 분단의 벽을 스스로 당면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스러운 인식에서였다.
강소천의 동화문학은 그에게 상실감을 안겨 준 엄청난 6·25의 체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수난의 문제를 감싸 안고 있는 삶의 원리이자 존재 방법이었다. 동요·동시에서 동화로의 전환은 이야기하고 싶은 단순한 대리충족의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삶의 창조 곧 ‘찾음’이란 생성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극복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안으로 ‘상실’이라는 충격적인 현실에 순응하면서, 밖으로는 새로운 자기 발견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이다. 6·25로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 밀려오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몸소 체험해야 했던 강소천에게 우선 어떠한 과제보다 가장 인고하기 힘들었던 문제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상실감이었다.
강소천은 그러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자 했다. 그는 ≪인형의 꿈≫(새글집, 1958) 후기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꿈을 주기 위해서 늘 동화를 쓰고 있습니다”라는 신념을 표명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강소천 문학에 나타난 꿈은 자신이 인식한 수난의 문제에 대한 수습의 과정을 실현하는 인과적 계기물이자 보다 극명한 자신의 내면 정신을 구현하는 하나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고향을 북에 두고 단신 월남한 그에게 동경하는 세계에 대한 내면적 지향성이 절실하면서도 6·25란 시대사적 명제를 극복해 내고자 한 긴장감이 꿈으로 변이되었던 까닭이다. 곧 그에게 꿈이 6·25 이후의 고통스러운 자폐적 삶의 공간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하고, 정당한 문학적 감응력에 소진할 수 있게 한 양식임은 자명한 일이다. 이처럼 강소천은 1951년 1·4후퇴 때 월남 이후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 주는 동화작가로 변신해 1963년 간경화증으로 타계할 때까지 10여 년간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친 동화작가였다.
1963년 세상을 떠난 직후 그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던 ≪아동문학≫ 5집(1963)은 추모특집으로 그를 기렸고, 이듬해 ≪아동문학≫ 10집은 <소천의 인간과 문학>이라는 특집으로 그를 조명했으며, 1964년에는 배영사에서 전 6권의 ≪강소천아동문학전집≫이 간행되었다.
그는 마해송 등과 어린이 헌장을 기초했고, 어린이들을 위한 독서 지도와 글쓰기 지도 등을 통해 아동문예 육성에 남다른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아동애호에 대한 노력은 그의 작품과 함께 인정받아 사후 1963년 5월 문공부 주최 제2회 5월문예상 본상을 수상했으며, 정부는 1985년 10월 19일 ‘문화의 날’을 맞아 그에게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의 72회 탄생일인 1987년에는 그를 아끼는 문인들이 동요시 <닭>을 새긴 강소천 문학비를 서울대공원 진입로에 세웠으며, 1965년 배영사에서 제정한 ‘소천아동문학상’을 오늘날까지 시상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현재 그는 경기도 양주군 교문리 가족묘지에 잠들어 있다.
저서로는 동요시집 ≪호박꽃초롱≫(박문서관, 1941), 동화집과 소년소설집으로 ≪조그만 사진첩≫(다이제스트사, 1952), ≪꽃신≫(한국교육문화협회, 1953), ≪진달래와 철쭉≫(다이제스트사, 1953), ≪꿈을 찍는 사진관≫(홍익사, 1954), ≪달 돋는 나라≫(대한기독교서회, 1955), ≪바다여 말해다오≫(대한기독교서회, 1955), ≪종소리≫(대한기독교서회, 1956), ≪무지개≫(대한기독교서회, 1957), ≪인형의 꿈≫(새글집, 1958), ≪꾸러기와 몽당연필≫(새글집, 1959), ≪대답 없는 메아리≫(대한기독교서회, 1960), ≪강소천 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1), ≪한국아동문학전집-강소천편≫(민중서관, 1962), ≪어머니의 초상화≫(배영사, 1963), ≪강소천 아동문학전집≫ 전 6권(배영사, 1964), ≪강소천문학전집≫ 전 15권(문음사, 1981), ≪강소천 아동문학전집≫(교학사, 2006) 등이 있다.

해설 - 김용희
동시인, 아동문학평론가.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아동문학평론≫지에 아동문학평론이 천료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했으며, ≪쪽배≫ 동인으로 동시조를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아동문학평론집 ≪동심의 숲에서 길 찾기≫, ≪디지털 시대의 아동문학≫, ≪옥중아, 너는 커서 뭐 할래≫(엮음), 동시조집 ≪실눈을 살짝 뜨고≫, 동시 이야기집 ≪짧은 동시 긴 생각 1≫ 등이 있으며, 제9회 방정환문학상, 제18회 경희문학상, 제21회 한국아동문학상, 제1회 이재철아동문학평론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부센터장, 한국아동문학학회 회장, 계간 ≪아동문학평론≫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돌맹이 I
돌맹이 II
전등불의 이야기
조그만 사진첩
박 송아지
꽃신
빨강 눈 파랑 눈이 내리는 동산
꿈을 찍는 사진관
민들레
꽃신을 짓는 사람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
영식이의 영식이
꾸러기와 몽당연필
어머니의 초상화

해설
강소천은
김용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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