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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으로 읽는 조선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역사

전란으로 읽는 조선

반란과 전쟁, 혁명이 바꾼 조선과 동아시아 | 규장각 교양총서 13

구매종이책 정가19,800
전자책 정가14,900(25%)
판매가14,900

책 소개

<전란으로 읽는 조선> 동아시아를 바꾼 전쟁들과 권력 투쟁
상흔, 불행, 굶주림……
조선의 탄생과 망국은 바로 ‘전란’에서 비롯되었다

수백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쌓아온 것은 전쟁으로 인해 한순간 재가 되고
역사는 바로 그 폐허 위에서 다시 힘을 가동시켜 한발 내딛는 과정이다

국가는 전란과 함께 형성된다

하나의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서 전란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특히 반도라는 지리적 요건을 지닌 조선은 다양한 방식의 전란에 휘말려왔다. 그때마다 역사의 권력자들은 전란이 국가 발전을 위해 필요한 단계라고 말해왔다. 이는 ‘신화 만들기’의 일부로, 전란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나 상대국과의 관계 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과정 등으로 치부되어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란에는 필연적으로 피해가 뒤따른다. 침탈에 의한 문화재 소실이나 자원 고갈은 물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반민의 희생은 기존 사회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온다. 이로 인해 피해가 어느 정도 수습된 뒤에도 전란은 사회 전반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때문에 한 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또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를 알아보려면 먼저 그 나라가 겪어왔던 전란을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돌아보는 행위에는 어느 정도 ‘신화 만들기’의 입김이 작용한다. 이것은 어느 국가에든 해당되는 사안이며, 조선의 전란에 대한 기억과 기록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
이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는 조선의 주요 전란을 새로운 관점으로 돌아보기 위해 『전란으로 읽는 조선』을 기획했다. 이 책에서는 세종 원년에 단행되었던 쓰시마 정벌부터 주권국가 개념이 도입되었던 근대의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겪었던 굵직한 전란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단순한 역사 돌아보기에 그치는 것이 아닌, 독자 스스로 전란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재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어떠한 이익관계도 얽히지 않은 시각이란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 가능한 한 객관적 사실 그대로를 바라보려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역사를 마주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조선이 멸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 현대의 한국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시시각각 전란의 위험에 휩싸인다. 이러한 현대 한국과 이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후대의 역사가는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역사는 언제나 미래의 과제인 동시에 현재의 과제로 남는다.

일본과의 극단적인 관계는 계속된다-쓰시마 정벌과 삼포왜란
일반적으로 쓰시마 정벌 및 삼포왜란을 다룰 때 각 국가의 이익에 맞춰 해석하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국제 교역과 질서를 반영한 시각을 통해 바라봐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관계는 조선 전기에도 이어졌다. 조선과 일본은 우호적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적대관계에 서 있었다. 두 국가 사이에 존재했던 기본적인 존립 방식의 차이는 곧 사회경제적·정치적 구조의 차이로 이어졌다. 또 각각 반도와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도 큰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쓰시마 정벌과 삼포왜란은 단순한 국가 간의 충돌이라는 미시적 관점이 아닌, 국제 정세에 의한 거시적 관점을 통해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15~1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명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전 국가들이 그래왔듯 명은 주변 국가에 조공제도를 시행토록 했는데, 여기에 부수적으로 집행되었던 해금海禁 정책이 문제였다. 해상 교통·무역·어업 등을 제한하는 해금 정책은 명의 선진 문물의 유출을 막는 역할을 했는데, 이는 바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북로남왜北虜南倭 현상으로 불리는 침략 행위가 늘어나는 등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흔들리고 있었다. 1392년 건국된 조선은 국가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수립했다. 이에 따라 국가 단위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적 형태를 보유했기에 명의 해금 정책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달랐다.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전국시대가 펼쳐지면서 각 지방은 생존을 위해 밀무역과 해적활동도 불사하는 등 매우 공격적인 대외 교역을 행했다.
이에 1419년, 연해지역을 침입하는 왜적의 본거지를 소탕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조선군이 쓰시마를 정벌했다. 명이 무로마치 막부를 통해 왜적을 제어하는 데 실패하자, 조선은 이런 명의 움직임을 탐지한 뒤 대규모 정벌에 나선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해안지대 개척을 통해 사회경제적 안정을 갖추게 되었고, 외부적으로는 명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한층 높아진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1510년 4월 발발한 삼포왜란 역시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면포를 필두로 한 물품 거래를 늘리려 했던 일본과 이로 인한 국부 유출을 염려했던 조선이 다시 맞붙은 것이었다. 292명의 사상자를 내며 난은 진압되었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512년 임신약조 체결을 통해 두 나라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충돌의 시발점에 불과했다. 두 국가의 사회적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벌어졌고 그만큼 갈등 해소도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전란의 기억은 시대의 필요에 따라 변화한다-나선 정벌
17세기 중반 청은 북만주로 남하하는 러시아, 즉 나선을 막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조선군은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으로 출정했다. 2차 원정에서 조선군은 러시아 지휘관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20명을 전사시켰으며 러시아군 포로를 10여 명 노획했다.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 8명, 중상 15명, 경상 11명에 그쳤다. 조선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피해는 전사 120여 명, 부상 230여 명뿐이었다. 명백한 연합군의 승리였다.
그러나 조선 군인들에게 나선 정벌은 승리의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2차 원정의 사령관 신유는 오랑캐인 청의 요구에 따라 다른 오랑캐인 러시아를 치러 먼 길을 떠난 심경을 연작시로 남겼다. 시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신감은커녕 어서 귀국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하다. 이런 심리 상태는 조선에 남아 있던 양반 엘리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1680년 신유의 부고를 듣고 많은 이들이 만사輓詞를 썼다.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만사는 총 50편인데, 이중 30편이 북쪽 오랑캐를 가리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북녘의 오랑캐를 연상시키는 상투적 표현을 쓰는 데 그칠 뿐이다. 주가 되는 것은 이루지 못한 북벌의 꿈을 향한 애도나 청 사령관의 요구를 거부하고 귀국한 충의다. 당시 사회 분위기상 청의 지휘를 받아 러시아를 물리친 나선 정벌은 칭송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시대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북벌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효종 재위 기간 동안 정통성을 받쳐준 논리는 북벌이었다. 그러니 북벌은커녕 청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를 패퇴시켰던 나선 정벌은 치욕스런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벌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면서 나선 정벌은 묘한 양상을 띤다. 17세기 말에 재위했던 숙종은 1690년 직접 신유의 제문을 지어 내리며 나선 정벌의 전공을 크게 치하한다. 볼모로 잡혀 있던 효종이나 심양에서 태어났던 현종과 달리 숙종은 북벌 이데올로기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숙종은 선대 왕들이 성취하지 못했던 북벌에 대해 가시적인 성과물을 제시해야 했고, 나선 정벌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사례였다. 이로써 나선 정벌은 의도적인 기억 전환 작업을 통해 실제 역사적 사실로 변모했다.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게 굴복한 수치심과 북벌을 이루지 못했던 자괴감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나선 정벌이었던 셈이다.

전란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돌이켜보다-이인좌의 난
1728년 이인좌 세력이 일으킨 무장 반란은 가히 전쟁이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였다. 3월 중순에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 20일 넘게 지속되었던 이 반란은 영조 집권기는 물론 조선의 정치질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인좌의 난은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형태를 띠고 있었다. 먼저 다양한 당색을 지닌 유력 양반 가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던 것과, 전라도·평안도·서울 등 여러 지역에서의 반란을 계획했던 것, 농민과 노비 등 하층민이 가담했던 것 등이 그렇다.
이인좌는 청주성을 필두로 반란군을 지휘했으며 경상도와 충청도, 경기 지역 인물들이 차례로 합류했다. 이인좌는 9일 만에 오명항 부대에 패하여 서울로 보내졌으나 경상도 안음·거창·합천에서 따로 거두했던 무리는 4월 초까지 지역을 장악했다. 이곳의 주도 세력은 주로 지방의 유력 양반들이었다. 전라도에서도 태인 현감인 박필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곳에는 나주와 부안 지역의 사람들에 이어 심지어 노비 도적떼까지 참여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양반들이 큰 규모의 반란을 주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국왕 영조와 그를 지원하고 있는 노론에 대한 반감을 들 수 있다. 반영조·반노론 의식은 조선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이뤄져왔던 당파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다가 영조의 선왕이었던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는데, 그 당시 소론을 포함한 대부분의 백성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반란에 참여했던 상천민은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조정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경우였다. 당시 많은 기록은 이들을 두고 “나라를 원망하며 반란을 생각한다怨國思亂”고 표현했다. 이들의 반란 참여는 곧 반상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신분제도가 흔들리는 일이었다. 이에 반란이 어느 정도 진압된 뒤 영조는 오랫동안 농민을 고통스럽게 했던 양역을 개혁하여 균역법을 시행했다. 기존에 간행되었던 윤리서를 새로 찍어 보급하기도 했다. 또 사회를 안정시키고 당쟁을 막기 위해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한편 반란 시기 충의를 지켰던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표창했다.
이인좌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닌,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나도록 한 대사건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이들은 패배했지만 남긴 것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를 비롯한 집권세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붕당이 가지고 있던 힘의 균형은 깨지고 말았다. 깨진 균형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의 어깨 위로 고스란히 올라앉았고, 이는 조선의 후대까지 이어졌다.

그 외에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에 반발하는 뜻에서 일어났던 이시애의 난과 조선시대 민본주의 이념이 근본적으로 붕괴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홍경래의 난, 민중이 스스로 궐기함으로써 지식인 중심이던 기존 운동의 한계를 벗어났던 동학농민운동 등은 조선이라는 국가가 내부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 대외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이뤄졌던 여진 정벌과 해양 세력이 대륙 세력이 최초로 정면 도전한 사건이었던 임진왜란, 명청 교체와 그에 따른 외교정책의 실패로 발발했던 병자호란, 그리고 제국주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질서로 인한 프랑스·미국의 침공과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은 외부세계를 통해 조선이 점하고 있던 위치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지리적 위치상 조선은 항상 정치적 긴장관계의 초점이 되었고, 그에 따라 국제정세의 판도가 바뀔 때마다 전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편자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세워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뒤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창설 230년이 되는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 통합함으로써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 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의 한계를 넘어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규장각 자료총서> <한국문화연구총서> <한국학 공동연구총서> <한국학 모노그래프> <한국학 연구총서> <한국학 자료총서> 등 900여 책을 펴냈다.

기획 -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저서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21세기 한·중·일 역사 전쟁』, 공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현대사적 성찰』 『조선 기록문화의 역사와 구조 2』 외 다수.

목차

머리글_"신화 만들기"의 기억 너머에서 진실과 마주하기

1장 왜, 이만주를 죽여야 했는가?_조선의 북방 정책과 여진 정벌
| 이규철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박사후연구원

2장 이시애 반란 사건의 비밀_함길도 토호들은 왜 들고일어났을까
| 오종록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3장 열탕과 온탕을 오가는 일본과의 교류_쓰시마 정벌과 삼포왜란
| 윤훈표 전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원

4장 임진왜란, 동부 유라시아 대륙 플레이어들의 각축전_열국지적 질서와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한반도
| 김시덕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5장 병자호란을 보는 새로운 시각_국제 패권들의 대결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6장 오랑캐 러시아를 무찌른 정벌은 왜 상처가 되었나_나선 정벌의 경험과 그 기억의 전환
|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7장 "영조는 우리 국왕이 아니다!"_1728년 이인좌 세력의 무장 반란
| 정호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8장 평안도가 낳은 저항의 주체들_홍경래의 난과 조선 민본주의의 붕괴
|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9장 제국의 함포, 조선의 위기_프랑스와 미국의 조선 침공
| 윤대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0장 민초, 혁명을 말하다_동학농민혁명을 둘러싼 왜곡을 넘어
|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11장 "우리 나라 이익의 초점은 조선에 있다"_동아시아 패권질서의 재편과 청일전쟁
| 강상규 방송통신대 일본학과 교수

12장 신소설에 그려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_『혈의 누』와 『절처봉생』을 중심으로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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