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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서울길 상세페이지

에세이/시 에세이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

소장종이책 정가16,500
전자책 정가20%13,200
판매가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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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작품 소개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 서울의 주산 백악과 삼청동천 길



한양의 주산인 백악과 그곳에서 발원하는 삼청동천과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서울의 속살 같은 그윽한 계곡, 백사실 계곡에 남아 있는 문화유적을 둘러보는 여정





한양 도읍의 주산, 백악

백악(白岳)은 한양 도읍의 주산으로 내사산(內四山) 중에서 북쪽에 위치합니다. 달리 면악(面岳), 공극산(拱極山)으로도 불리는데, 흔히들 북악(北岳)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름에 대한 역사적인 연원은 없고, 단지 일제강점기에 서울의 내사산 중에 북쪽에 있다고 북악이라 하였습니다.
백악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백악산신을 모시고 진국백(鎭國伯)에 봉하였기에 신사의 이름을 따라 그리 불렀습니다. 면악은 고려시대에 불리던 이름입니다. 남경을 설치하려고 궁궐터를 찾던 중 “삼각산의 면악 남쪽이 좋은 터”라는 문헌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면악 남쪽에 남경의 궁궐인 연흥전을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이 지금의 청와대 자리이고, 면악은 바로 지금의 백악을 일컫습니다. 공극산은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백악을 ‘북쪽 끝을 끼고 있다’는 뜻으로 공극(拱極)이라 이름 지어준 것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백악은 세 개의 수려한 골짜기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백악의 서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오른쪽을 휘감아 흐르는 백운동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백악의 동쪽 사면을 흘러내려 경복궁의 왼쪽을 휘감아 흐르는 삼청동천이며, 마지막은 도성 밖인 백악의 북서쪽 사면을 흐르는 백석동천입니다.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은 도성 안의 청계천으로 흘러들고, 백석동천은 도성 밖 홍제천으로 흘러듭니다.
백악의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삼청동천과 백운동천을 비롯하여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 낙산 서쪽의 쌍계동천, 목멱산 북쪽의 청학동천은 도성 안의 경치 좋은 다섯 골짜기로 꼽히던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삼청동천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경치 좋은 도성 안 으뜸 계곡 삼청동천

삼청(三淸)이란 이름은 도교의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을 모시는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곳이라서 붙여졌다고도 하고, 달리 산 맑고(山淸), 물 맑고(水淸), 사는 사람 또한 맑아서(人淸) 붙여졌다고도 합니다.
삼청동천의 다른 이름인 삼청동문(三淸洞門) 글씨가 국무총리 공관 건너편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숙종 8년(1682년)에 명필가인 김경문이 쓴 것입니다. 4백여 년이나 되는 문화유산입니다만, 지금은 아쉽게도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까치발을 하거나 발돋움하면 글씨의 윗부분만 조금 보일 뿐입니다.
수려한 골짜기를 일컬어 흔히 동천(洞天)이라 하고, 달리 동천(洞川), 동문(同門)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은 같은 물줄기에 기대어 사는 자연부락을 일러 동(洞)이라 부른 데서 연유한 것으로, 특히 동천에 하늘 천(天)자가 사용된 것은 수려한 골짜기에 사람들만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신선들도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삼청동천에는 옥호정이라는 김유근의 별서가 있었는데, 순조의 장인으로 외척 세도정치를 편 안동김씨 김조순이 자신의 별서로 사용하다가 아들 김유근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옥호정은 삼청동 길의 서쪽 언덕 위, 현재의 칠보사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청동의 동쪽 골짜기와 서쪽 골짜기 사이에는 서촌의 다섯 사정(射亭)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운룡정이라는 활터가 있었습니다. 온전한 활터의 자취는 사라지고, 지금은 바위에 새겨진 ‘운룡정(雲龍亭)’이라는 세 글자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서촌 5사정은 삼청동의 운룡정을 비롯하여 옥인동의 등룡정(登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과 등과정(登科亭) 그리고 누상동의 백호정(白虎亭)을 일컫는 말입니다.
삼청터널에서 발원한 삼청동천은 삼청공원을 거쳐 삼청동 길을 따라 경복궁 동쪽 담장을 끼고 흐르다가 동십자각을 지나서 물줄기 이름이 중학천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교보문고 옆에 있던 혜정교를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듭니다. 동십자각 부근에 한양 4부학당의 하나인 중학당이 있어서 중학천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지금은 복개되어 물줄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북촌 언덕에 한옥마을이 조성되기까지

삼청동천을 벗어나 동쪽 언덕 위로 올라서면 정겨운 한옥들이 즐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대부분 리모델링하여 주인의 취향에 따라 작은 박물관을 비롯한 문화시설로 바뀌거나 다양한 볼거리를 준비하여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곳을 북촌이라 하여 외국인 관광 코스에 들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원래 한양의 북촌이라 함은 출사한 사대부들이 사는 곳으로, 사대부들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를 포함해 큰 규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종로구청 자리가 삼봉 정도전의 집터였고, 헌법재판소 자리가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의 집터였으니, 그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일합방 직후 통감부를 비롯한 일제의 주요 통치시설들은 흔히 남촌이라 부르는 목멱산 아래 자리 잡고 있었는데, 1920년대에 와서 일제는 계획적으로 청계천 넘어 북촌 진출을 시도하였습니다. 총독부를 북촌으로 이전하고, 총독부, 경성부청의 관사와 동양척식회사 직원 숙소 등을 인근에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맞서 경남 고성 출신 정세권이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하여 경성 전역에 근대식 한옥단지를 조성하였습니다. 그의 개발사업은 익선동을 시작으로 가회동, 삼청동,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큰 한옥을 부수고 그 자리에 작은 한옥 여러 채를 지은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좁은 한옥 공간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트인 ‘ㅁ’자형으로 압축해 넣었습니다. 그리고 부엌을 입식구조로, 외부공간이던 대청마루를 내부공간의 거실로 바꾸어 일종의 ‘개량 한옥’을 선보였습니다. 개량 한옥의 확산은 옛 도시를 헐고 그 자리에 서양식, 일본식 주택을 지으려고 한 일본에 맞서 전통 건축양식을 지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촌 언덕배기에 개량 한옥 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산줄기가 궁궐에 딸린 정원인 유원(囿園)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궁궐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 지역이었습니다.


숙정문의 기구한 운명

이 언덕과 이어진 삼청공원을 지나 북쪽 능선을 오르면 비로소 백악의 품에 들게 됩니다.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입니다. 숙정문의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습니다.
숙정문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태종 때 풍수 학생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청문은 풍수지리적으로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며 상소를 올려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창의문과 숙청문을 폐쇄하고 그 주위에 소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이후 숙정문은 계속 닫혀 있게 되었으며, 다만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시기에만 문을 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음양오행사상에 따르면 북쪽은 음(陰)과 수(水)에 해당하며 남쪽은 양(陽)과 화(火)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낼 때는 북문인 숙정문을 열고 남문인 숭례문은 닫았으며, 장마가 져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낼 때는 남문인 숭례문을 열고 북문인 숙정문을 닫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권 때 백악 일대를 전면 개방하며 숙정문이 열렸습니다.
이와는 달리 창의문은 인조 때부터 문이 열렸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반정 군인들이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와 반정을 성공시키고 인조를 등극시켰으므로, 창의문은 그들에게 개선문이었던 것입니다.
숙정문은 최양선의 상소가 없었더라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습니다. 도성의 북문으로서 성 밖을 나서면 그 길이 한양에서 원산으로 가는 경원가로로 이어져야 하는데, 삼각산과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사람이 쉽게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숙정문 훨씬 동쪽에는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곳에 혜화문이 놓여 있습니다. 이 문을 이용하면 쉽게 경원가로를 오갈 수 있기에, 숙정문은 만들 당시부터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한 문이었습니다. 숙정문에서 창의문에 이르는 성곽 주위에는 태종 때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도 잘 자란 소나무가 많이 널려 있습니다.
백악 정상에 이르기 전에 성곽은 북쪽으로 툭 불거져 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데, 많이 굽은 성이라고 해서 이곳을 곡성(曲城)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북쪽을 조망해 보면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어떻게 한양 도성으로 그 기운을 뻗쳐오는지 지세를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삼각산의 세 봉우리인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는 보현봉과 문수봉에서 갈라집니다. 문수봉에서 서쪽으로 의상봉까지 뻗어나간 산줄기는 북한산성의 남쪽 능선을 이루고, 또 다른 한줄기는 남쪽으로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 수리봉을 지나 불광동 쪽으로 내려섭니다. 보현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는 국민대학교 뒤편의 형제봉을 지나 북악터널 위에 있는 보토현(補土峴)으로 내려섰다가, 북악스카이웨이가 있는 구준봉을 넘어 마침내 한양 도성의 성곽과 만나 백악에 이르고, 그 지세는 경복궁으로 이어집니다.
백악 정상에는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위용을 뽐내는 바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백악 정상에서 창의문까지 내려오는 길은 깎아지른 절벽에 놓인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조금은 힘든 구간이나, 눈앞에 펼쳐진 풍광은 그야말로 장쾌하기 그지없습니다.
도성 밖 오른쪽에는 경치 좋기로 이름난 자하문 밖 세검정 일대가 문수봉에서 향로봉, 그리고 탕춘대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아래 펼쳐져 있으며, 정면에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인 인왕산의 주능선이 서북쪽으로 길게 누워 있고, 그 능선을 따라 한양 도성이 하안 띠를 두른 듯이 백악 아래 창의문으로 이어집니다.
창의문은 달리 자하문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은 많은 곳에서 장의문(藏義門, 壯義門))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창의문 올라가는 기슭에 장의동(藏義洞)이 있기 때문에 장의동에 있는 문, 즉 장의문으로 쉽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창의문도 숙정문과 마찬가지로 최양선의 건의에 따라 태종시대부터 문이 폐쇄되었습니다만, 인조반정 때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해 창덕궁을 장악함으로서 반정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때 도끼 한 자루로 창의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반정 공신들에게는 창의문이 개선문과 같은 것이어서 이때부터 문이 다시 열리게 됩니다. 특히 영조는 이곳에 들러 반정을 기리는 시를 짓고, 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창의문에 걸게 하였습니다. 현판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출판사 서평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
: 서울 인문역사기행


서울은 무척 넓고 깊다

서울은 삼국시대 초부터 우리 역사의 중심무대였다. 한성백제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 신라의 유적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이 설치되었고, 조선 개국 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수도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서울은 여러 시대에 걸친 다양한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 속에는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원형질이며 빛나는 역사의 숨결이 스며 있다. 개항 이후 서구문화의 유입과 함께 펼쳐진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대한제국의 멸망에 이은 일제강점기의 아픈 생채기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이 부려놓은 역사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우리는 서울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서울의 문화유산은 안타깝게도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많은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고, 일제에 의해 훼절 왜곡되었으며, 한국전쟁의 참화를 견뎌야 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문화유산의 상당수는 개발논리에 밀려 원형을 잃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서울의 문화유산은 상처투성이인 채 점으로 존재할 뿐이다.
인구의 4분의 1이 서울을 무대로 살아감에도 서울을 애틋한 고향으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뉴요커, 파리지앵 같은 자부심이나 서울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도 크지 않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우리는 단지 서울에 살 뿐 서울을 잘 모른다. 서울의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관심도 아직은 낮다.

6년에 걸쳐 테마가 있는 서울길 코스 개발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이다. 이에 발맞추어 서울에도 걷기 좋은 길이 부쩍 늘고 있다. 점으로 남아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을 선으로 연결하고, 면을 만들고, 온전한 입체로 만들어야 할 때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역사적 상상력’이 결합할 때 그것은 가능해질 것이다.
‘서울학교’는 지난 6년 동안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 코스를 개발해왔다. 또한 시민들과 함께진행한 수십 차례의 역사기행을 통해 내용을 검증하였다. 하나하나의 코스는 5시간 남짓 걷는 일정으로 짜여졌다. 그동안의 성과 가운데 10개의 코스에 살을 입히고 피를 돌게 해 세상에 내놓는다. 필자는 서울학 전도사이자 길 위의 스토리텔러로서 새로운 모습의 서울을 알리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 최연 서울학교장이다.

사대문을 벗어난 지리적 스케일

이 책의 특징은 하나하나의 길이 주제를 지닌 걷기 코스라는 점과 사람들이 흔히 아는 사대문 안과 궁궐 위주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산(內四山: 백악, 인왕, 낙산, 목멱)과 각각의 산이 품고 있는 마을(삼청동천, 옥류동천, 쌍계동천, 청학동천)을 하나씩의 테마로 다루는 스케일도 남다른데, 지리적으로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 안산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우백호 산줄기며, 한강 너머 서달산과 옛 양천 고을의 강화길까지를 각각 하나의 테마로 개발하였다. 서울 도심 기행을 ‘대한제국의 길’과 ‘기미년 만세운동 길’로 테마를 부여한 것 역시 눈에 띈다.
‘걷기’와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특색 있는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이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의 문화유산을 시민이 함께 복원하는 인문역사기행에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싶다.


저자 소개

최연

‘서울학교’ ‘고을학교’ ‘간도학교’를 이끌며 인문여행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가는 길 위의 스토리텔러. 주문이라도 걸 듯 ‘진정한 서울 사람’을 만들어주는 서울학 전문가.
최연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청춘을 바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한때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을 때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인문학이었습니다. 헌책방을 순례하고 자료를 모으면서 일찍이 관심을 갖고 있던 ‘서울’과 ‘조선’에 대한 지식을 심화시킬 수 있었고, ‘걷기’와 ‘스토리텔링’ 컨텐츠를 결합한 서울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이어서 지역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고을학교’와 항일유적지를 둘러보는 ‘간도학교’를 만들고, 조선통신사 길, 열하일기 길 등 인문여행의 지평을 해외로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문화법인 ‘해아라’는 공공부문을 지원하고 함께 협업하기 위한 문화 플랫폼입니다.
길 위의 스토리텔러 최연의 흥미진진한 발걸음은 오늘도 멈추지 않습니다.

목차

서울의 주산 백악과 삼청동천 길
인왕산과 옥류동천 길
낙산과 쌍계동천 길
서울 남산과 청학동천 길
도성 밖 으뜸 경치 성북동천 길
도성 밖 우백호 산줄기 안산 길
망국의 한이 서린 대한제국의 길
기미년 서울 만세운동 길
충효를 생각하는 서달산 길
허준과 정선을 만나는 강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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